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희선 May 31. 2024

5월 31일

마술적 사실주의 문학 <고래>를 읽고

나는 누구와 함께 있는가?

땀내 나고, 더럽고, 끈저근적하고, 결코 아름답지 않고 부담스러운, 그러나 가련한 사람들인가?

그렇지 않으면, 의식은 깨어있고 말과 글로는 가난하고 배제당하고 그래서 억울한 일을 당하는 사람들 편에 있는 듯하나 실제로는 배우고 가진 것 없지 않은 고상한 식자층인가?


안따깝게도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은 후자가 아니다. 식자층까지는 아닌 내가 감히 '그럴듯한'  식자층을  만나는 일은 거의 없다. 낮은 데서 (그들 역시 식자층이지만) 지지고 볶고 부대끼며 살아가는 벗 몇이 주변에 있을 뿐이다.

어제 소설 <고래>를 함께 읽은 벗들로부터 왜 <고래>인가? 를 들으며 식자층은 아닌, 사이비 식자층으로서 부끄러움을 느껴야 했다. 다행스럽게도.


벗들과 함께 소설 <고래>를 읽고 나눴다. 마술적 사실주의 문학! 그것이 왜 필요했는지,

그것이 어떻게 마술에 걸리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이들로 하여금 어떻게 현실을 살아내게 하는지, 현실이 너무 힘들고 고단할 때, 마술에 취해 견딜 수 있게 하는지~ 알아버리게 했다. 그들은 현장 자체가 없는 나와는 달리, 실제로 진창같은 곳에서 부대끼며 그렇게 살아가는 이들의 삶을 이해했을 테니까.


과거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을 읽으며, 그 의미를 알지 못했다. 얼마전 오에 겐자부로의 레인트리를 읽으면서도 알듯말듯 했다. 무지한 나는 <고래>와 같은 그 비슷한 소설의 역할을 이해사기보다, '실제의 세상은 우리가 알지도 생각하지도 못하는, 복잡한 것들로 차고 넘칠 것'이라는 우둔한 생각에 그쳤으니 말이다.


솔직히 나는 앞으로도 지금과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알고 있어야 한다. 내가 있어야 할 자리와 지금의 내가 있는 자리의 차이를!


벗!

과연 내가 누군가의 벗일까?, 하여 벗이라는 말을 꺼려왔다.

그러나 앞으로는 벗이라 부르기로. 벗이 될만한 사람이 되기로.


신화, 희곡, 역사, 시 등과 온갖 기적이 섞여 이루어진 성경 또한 당시 희망이 필요했던 이들을 위한 마술적 사실주의 문학의 성격이 가미된 건 아닐까 싶다.

작가의 이전글 5월 26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