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사순절

세례받음의 의미

by 조희선

예수님의 세례

​(마가복음 1:9-13)

​⁹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¹⁰곧 물에서 올라오실 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¹¹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¹²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¹³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우리 중 많은 이가 아버지로부터 (말로든 표정으로든 포옹으로든) "내가 너를 사랑하는 자녀란다."라는 말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다. "내가 너로 인해 참 기쁘단다."라는 말을 듣는 것은 더더욱 기대하기 어렵다. 오히려 안타깝게도 많은 아버지들이 정반대의 길을 간다. 그들은 자주 화난 목소리로 쏘아붙이거나 모질게 거절하며 문을 쾅 닫아 버린다.

하나님은 우리를 바라보며 말씀하신다. "너는 내가 사랑하고 사랑하는 자녀란다. 내가 너를 기뻐한단다."

하나님은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하셨던 말씀을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하셨듯이 오늘 우리에게도 하시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의 이 말씀이 없다면, 우리가 마음의 귀로 듣게 되는 것은 대부분 문이 꽝 닫히는 소리일 뿐일 것이다.


"그때 예수께서 ... 하늘이 갈라짐을 보시더니... "에서

'하늘이 갈라짐을 본다'는 건 무슨 뜻인가. 마치 우리 앞에 보이지 않던 휘장이 갑자기 열려 나무와 꽃과 건물 대신에 또는 예수님의 경우라면, 강과 광야와 물 대신에 전혀 다른 차원의 현실 앞에 서 있게 되는 것과 같다.

기독교 신앙의 많은 부분은 우리가 그런 식으로 다른 현실을 볼 수 없을 때조차 그것을 따라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마가는 예수님의 삶 전체를 바로 그런 방식으로 바라보고 이해해야 한다고 우리에게 말한다. 이 이야기를 보고, 이 삶을 보라. 그리고 그 속에서 하늘의 환상을 보고 하늘의 음성을 듣는 법을 배워라. 이 말씀이 너희에게 주어지는 말씀으로 듣는 법을 배워라. 이 말씀이 너희를 변화시키고 너희를 빚으며 너희를 새 사람, 곧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빚게 하라. 이 이야기에서 평소에는 감춰져 있는 하나님의 세상에 속한 하늘의 차원을 발견하라.

오늘의 교회에서도 세례를 베풀고 세례를 가르치면서 이러한 의미를 되살릴 방법을 찾아야 한다.

예수님처럼 우리도 광야로 내몰릴 준비를 갖추게 된다.

예수님이 반드시 걸어야만 하는 길이 있다. 하느님의 사랑하는 아들이기 때문에 걸어야만 하는 길이 있다.

그 길은 메마르고 먼지 날리는 작은 길이고 유혹과 겉보기의 실패처럼 보이는 순간들을 거쳐가는 길이다. 우리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의 말씀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그 길을 헤치고 나아갈 수 있다.

마가는 예수님이 들짐승과 함께 계셨다고 말한다. 그는 들짐승이 위협을 뜻하는지, 혹은 새 창조의 표증인지 (예수님이 새 에덴 농산의 둘째 아담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천사들도 그곳에 있었다. 천사들이 그곳에 있었던 것은

예수님이 사탄에게 시험받지 않도록 막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최종적으로 예수님의 갈보리를 막지 않은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보다 천사들이 그곳에 있었던 것은 예수님에게 사랑하는 그의 아버지께서 그를 지켜보고 계시고, 그곳에 그와 함께 계시며, 그를 사랑하시고 그를 통해 일하시며, 그를 통해 그분의 영을 늘 부어 주신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기 위해서였다. 예수님은 그의 모든 백성에 가야 하는 길을 먼저 가셨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실 수 있었던 것은 그 사랑의 말씀, 생명의 말씀을 들었기 때문이다.


《톰 라이트의 사순절과 부활절》야다북스 13~ 17.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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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를 받는다는 건 무엇인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딸)이라는 건 어떤 건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세례를 받는다는 건,

우리 중 어떤 이가 기대하는 바와 같이, 우리 앞에 좋은 길이 펼쳐지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예수께서 가야만 했던 그 길을 우리도 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건, 들짐승과 천사가 있는 길이다. 위험한 길, 새 창조를 하는 길이며, 공평과 사랑, 정의, 자유를 위해 차별과 불의가, 폭력과 전쟁이, 살인과 광기가 만연하는 오늘을 거슬러 사는 길이다.

하나님 그분은 그런 위험을 막아주시지 않는다. 다만 그런 가운데 믿음이 있는 이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한다는 말씀을 들을 수 있기에 견딜 수 있는 것 뿐이다.


어쩌면 우리 대부분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 앞에 놓인 위험을 막아주시는 분으로만.

마가는 아니라고 한다. 도리어 우리 옆에는 들짐승이 있다고 가르친다.

무언가를 누군가를 무시하고 버리고 죽이는, 종교를 비롯한 제도와 문화가, 거기에 물들은 대중이 있다. 거기에 거스르는 삶을 위협하는 존재들이 있다고.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개종시키는 일이 아니라, 그런 제도와 문화를 거슬러 새 창조를 하는 일이다.

그리할 때, 사람들은 물을 것이다. "왜?" 우리는 그때 하나님의 사랑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의 죄를 다 예수께 전가하는 게 과연 기도이던가. 그리스도인의 삶이던가. 그게 아니라면, 세상을 모르고, 그리스도인의 삶이 가능한가.

예수께서는 정치범으로 처형당하셨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나는 여전히 세상을 너무도 모른다. 조금 아는 영역에서조차 나는 여전히 새 창조에 너무나 미약하고 한없이 더디게 움직인다. 때로는 퇴보한다. 수시로 퇴보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나를 사랑하는 이의 사랑을 받아들인다.


시대가 바뀌면서 옳고 그름에 변화가 생겼다고들 한다.

과연 그런걸까.

어쩌면 시간이 흐르면서, 그동안 몰랐던 걸 비로소 알게 된 것, 알아가는 것 아닌가.

우리의 생각은 언제나 잘못된 것일 수 있다.

누군가는 말한다. 우리가 죽는다는 것 외에는 만고의 진리란 없다고. 우리가 확신하는 어떤 것도 틀릴 수 있다는 유연한 사고가 필요하다. 특히 그리스도인이라면, 자신과 교회의 기독교적 확신에 대해 주의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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