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에 입학한 큰아빠 댁 손자, 나에게는 사촌 조카를 만난 자리에서의 일이다. 아이가 학교 끝나고 집까지 혼자 찾아온다는 사촌 오빠의 말에 나도 모르게 "혼자서?"하고 되물었다. 오빠네 가족은 초등학교를 품은 아파트라는 ‘초품아’까지는 아니더라도 학교가 내려다 보이는 곳에 살고 있었다. 그래서 손자가 어디쯤 오는지 볼 수 있기도 하고 길도 쉬워서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고, 큰엄마께서 말씀하셨다.
너무 놀란 게 민망해서 요즘 세상이 워낙 흉흉해서요,라고 덧붙였으나 내가 듣기에도 위험한 세상에 무책임하게 아이를 내놓은 어른들을 질책하는 말처럼 들려 한껏 더 민망해졌다. 하지만 여전히 의아했다. 이제 막 앞니가 다 빠져 귀엽기만 한, 저 통통 거리는 조그마한 녀석이 혼자 집을 찾아온다고?
하긴, 생각해 보니 썩 놀랄 일은 아니었다. 나도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무려 이 년 동안은 매일 삼십 분 씩 걸어서 다녔으니까.
내가 어린 시절을 보낸 집은 경기도의 어느 연립주택으로, 일곱 살이었을 때부터 열다섯 살이 되기 전까지 일곱 해 남짓 살았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주방과 거실 그리고 큰 방과 작은 방까지 모두 한눈에 들어오는 작은 집이었다. 그곳에서 엄마, 아빠, 나와 여동생까지 네 사람이 복닥거리며 살았다. 그 후로도 수많은 집을 거쳐왔지만 어린 시절 대부분의 기억은 그 집을 배경으로 두고 있기에 우리 집, 이라는 말을 떠올릴 때 가장 먼저 생각나는 곳이기도 하다. 집 앞에는 두 동 짜리 복도식 아파트가 우뚝 서있었다. 부모님은 아파트 상가에서 당신들의 첫 가게를 열었다. 애초에 가게를 얻으면서 그 근처로 이사 간 거였다.
가게는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열어야 했다. 아빠가 가장 바쁘셨겠지만 엄마 역시 눈코 뜰 새 없이 움직이셨다. 가게 일과 집안일, 그리고 어린 두 딸을 돌보는 일까지 모두 해내셔야 했기 때문이다. 엄마는 아침마다 우리를 깨우고 씻기고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보낸 후 집에서 퇴근하는 동시에 가게로 출근하셨다. 오후에는 학교에서 돌아온 우리를 씻기고 저녁도 해 먹이기 위해 가게에서 퇴근하는 동시에 집으로 출근하셨다. 그리고 또다시 가게로 출근했다가 우리가 잘 때쯤 '마지막으로'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셨다. 가게를 오픈했을 때 아빠는 서른다섯, 엄마는 스물아홉 살이었다.
내가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하자 아빠가 가게에서 쓰는 오토바이 뒤에 실어서 데려다주고 데려 오고 했던 기억이 난다. 엄마와 함께 가게에 있던 나와 동생을 집에 데려다 줄 때도 그랬다. 아빠가 나와 동생을 번쩍 들어 등받이에 고정된 네모난 플라스틱 통 안에 넣어 주시면 둘이 쪼그리고 앉아 키득 거렸다. 아주 그냥 스릴 만점이었다. 지금이라면 아이를 그렇게 위험하게 태우고 다니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겠지만, 많은 일들이 그랬듯 그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빠가 시켜주는 오토바이 등하원은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중단되었다. 플라스틱 통에 쪼그리고 앉기에는 키도 자라고 무거워진 탓도 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차도 때문이었던 것 같다. 오토바이로 학교에 가려면 차들이 많은 큰 도로로 다녀야 해서 위험했다. 학교는 어른 걸음으로 삼십 분, 아이 걸음으로는 한 사십 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큰길도 두 번 건너야 했다. 물론 학교 앞까지 가는 버스가 버젓이 있었지만, 걸어 다니는 게 훨씬 좋았던 기억이 난다. 아마도 학교와 집을 오가다 보면 가운데에 있는 시장을 반드시 통과해야 했기 때문일 것이다. 신발주머니를 통통 차며 시장 한복판을 지나가면 상인들이 이따금씩 “학교 가니? 혼자서도 씩씩하게 잘 다니네! 잘 다녀와”하고 인사를 해 주시곤 했다. 그 말이 참 듣기 좋았다.
우리 가족이 그 동네에 자리 잡았을 즈음에 집 근처에 아파트 단지가 크게 지어졌다. 아파트 주민들의 자녀들을 수용하기 위해 초등학교도 새로 지어진 건 당연한 일이었다. 진정한 ‘초품아’였다. 우리 집에서 내 걸음으로 이십 분 정도 걸렸으니, 원래 다니던 학교보다 훨씬 가까운 거리였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부모님이 뒤늦게 3학년 진학에 맞춰 나를 그곳으로 전학 보냈던 것 역시 당연한 선택이었다. 이제 큰길은 한 번만 건너면 되었다.
거리는 훨씬 가까워졌지만 난이도가 조금 높은 미션이 생겨났다. 반드시 두 가지의 관문 중 하나를 선택해서 통과해야만 학교에 다다를 수 있었다. 하나는 장의사집이고, 다른 하나는 카센터였다. 지금은 찾아볼 수 없지만 그 시절에는 평범한 상점들 사이에 장의사집이 있었다. 장의사집이 왜 미션인지에 대해 특별한 설명이 필요 없을 것 같으나 굳이 해보자면, 그 앞을 지나갈 때 숨을 쉬면 귀신이 코로 빨려 들어온다는 그럴듯한 소문을 철떡 같이 믿었기 때문이다. 장의사집 근처에 다다르면 한참을 서성거리다가 코와 입을 손으로 막고 마구 뛰어갔던 기억이 난다. 나는 한두 살 때부터 엄마 따라 착실하게 교회를 다니는 어린이였다. 하지만 그 나이 때는 어떤 말이든 쉽게 믿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다른 하나는 왜 미션이 되었는지 예측하기 어려울 법한 카센터인데, 문 앞에 빨간 눈을 한 큰 개가 있었기 때문이다. 동네 아이들은 그 개를 미친개라고 불렀다. 한 번 물리면 광견병에 걸려 죽을 거라고 겁을 줬다. 웬만한 개는 무서워하지 않았지만 물리면 죽을 수 있을 것 같은 개는 무서웠다. 목줄은 바닥에 수직으로 박힌 철근에 항상 단단히 매어져 있었으나 그 앞을 지나가려고 하기만 하면 철근이 흔들리도록 달려들며 짖어대는 통에 혼비백산해서 뛰어가곤 했다. 그런 고난과 역경에도 ‘혼자서도 씩씩하게 잘 다니는’ 어린이의 부심은 쉬이 꺾이지 않았다. 동생과의 관계만 보면 겁도 많을 것 같지만 웬걸, 꽤나 독립적이고 용기 있는 어린이였다.
우리는 독립적일 뿐만 아니라 상당히 자유롭게 자라기도 했다. 어디까지나 요즘 아이들과 비교했을 때 얘기지만 말이다. 부모님이 워낙 생계로 바쁘셨기 때문에 우리는 방과 후 대부분의 시간을 집이나 옆집이나 동네 골목에서 보냈다. 놀거리는 늘 많았다. 아랫집에도 아이가 있고 윗집에도 아이가 있었다. 시도 때도 없이 서로의 집에 놀러 가 인형 놀이를 하거나 카드 게임을 하거나 공기놀이를 했다. 우리 집에는 인형도 카드도 없었지만 아이들은 우리와 항상 장난감을 공유해 주었다. 집 안에서 노는 게 지겨워지면 집 앞에 나가 분필로 선을 그어 땅따먹기를 하고, 주차장 기둥에 고무줄을 묶어 고무줄놀이를 했다. 차가 있는 집이 거의 없어 주차장은 항상 비어있었다.
집 근처에서만 놀다가 나이가 들면서 점점 행동반경을 넓혀 ‘모험’을 떠났다. 집 앞 아파트 단지는 진녹색 쇠창살로 된 담벼락으로 둘러쳐있었는데, 모험의 첫 관문은 그 쇠창살 사이를 통과하는 것이었다. 모든 쇠창살을 통과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고 딱 한 군데, 다른 곳보다 창살 사이의 간격이 넓은 ‘특별한 통로’가 있었다. 먼저 한쪽 다리를 창살 틈으로 집어넣고 몸을 옆으로 돌려 통과한 후 어딘가 긁히지 않도록 조심하며 머리까지 살살 빠져나오면 되었다. 그 통로로 동네 아이들이 수없이 드나드는 것을 아파트 관리인도 분명 알고 있었을 텐데 이상하게도 한 마디 꾸지람 들은 기억이 없다. 단지 안에 있는 벚꽃 나무에서 빨갛게 익은 버찌 열매를 따 먹어도, 대추나무에서 대추를 따 먹어도, 사과나무에서 꽃사과를 따 먹어도.
이렇게 맨날 밖에서 뛰어놀면서 공부는 어떻게 했을까. 간단하다. 안 했다. 요즘 도시 아이들은 상상도 못 하겠지만 나와 동생은 공부 스트레스 없이 해맑게 뛰어놀기만 하며 자랐다. 부모님은 두 분 다 충청도에서 태어나고 자라셨다. 시골에서 자라면 당신이 못한 공부를 자식들에게 시키고 싶은 열망이 크거나, 건강하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에 교육에는 별 욕심이 없거나 둘 중 하나일 텐데 부모님은 후자에 속하셨던 모양이다. 교육 문제에는 큰 관심이 없으셨다. 친구들하고 사이좋게 지내고 밥 잘 먹고 씩씩하게만 자라면 그만이었다. 그래서인지 중학생이 되기 전까지는 공부를 가르쳐 주는 학원을 다닌 기억이 거의 없다.
이런 어릴 적 기억들을 하나하나 끄집어내다 보면 나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된다. 겁도 없이 스물두 살에 홀로 떠난 뉴질랜드 워킹홀리데이를 시작으로, 겁도 없이 내일로 여행을 하겠답시고 혼자서 전라도 경상도 강원도를 한 바퀴씩 돌고, 겁도 없이 혼자서 몇 주 씩 해외여행을 착착 잘만 다녀오는 이유를. 만일 내가 우리 집이 아닌 아파트 대단지에 살면서 학원만 몇 개씩 다니는 요즘 아이들처럼 어린 시절을 보냈다면, 공부는 지금보다 많이 했을지 몰라도 모험가 기질을 발견하기는 훨씬 어려웠을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자라난 건 부모님이 우리와 이웃,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동네를 믿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집에 누군가 혼자만 남겨져 있는 게 아니라 늘 함께 있어줄 수 있는 언니와 동생 사이, 어울려 놀 수 있는 또래 아이들, 언제나 우리가 잘 있는지 봐줄 수 있는 이웃 어른들, 안전하고 아늑한 집, 골목, 서로 웬만하면 얼굴을 다 아는 작은 동네를 믿었기에. 일터에 매여 있어 어쩔 수 없이 아이들을 학원에서 학원으로 돌리지 않더라도 안심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 적어도 내가 어릴 때, 삼십 년 전에는 그랬다.
타고난 기질을 벗어던질 만한 드라마틱한 성장 스토리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마냥 마음 약해 빠진 순딩이처럼 자란 건 아니다. 그건 남편도 마찬가지다. 그는 부모님으로부터 꽤 빠른 시기에 정서적 독립을 이뤘다. 나와 남편은 결혼하기 전보다 결혼한 후에 서로의 어린 시절에 대한 얘기를 많이 나누고 있다. 지금의 이 결점이, 혹은 강점이 언제부터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는지에 대해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어떤 환경에서 어떤 경험을 하며 살아왔는지를 각자의 관점에서 풀어내다 보면, 서로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 두 사람이 똑같이 자신의 강점 중 하나로 꼽는 것 역시 독립성이다.
사람들이 흔히 말하듯 나고 자란 환경이 한 사람의 인생에 미치는 영향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강력하다. 타고난 기질이 아무리 중요하더라도 어디서 어떻게 태어나고 무엇을 보고 배우며 자랐는지에 따라 사람의 성격은 빈번히 새로고침 당하기 마련이다. 그래서인지 엄마는 우리 자매의 어린 시절 얘기를 할 때 “엄마가 바쁘다는 핑계로 너희를 방치했지”라고 자책하시며 슬퍼 보이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한 얼굴이 된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집과 가게가 지척에 있는 아기자기한 동네에서, 보이지 않는 그 투명 울타리 속에서 나와 동생은 더없이 안정감을 느끼며 씩씩하게 자랐다. 척박한 환경에서도 그런 환경을 만든 부모님을 원망하며 반항적인 아이로 자라나기보다는 독립적이면서도 자유롭게 자라나는 편을 선택했다. 부모님 또한 아이들을 바로 옆에 끼고 돌볼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매일 전전긍긍하고 애만 태우기보다는 우리와 이웃을 믿는 편을 선택했고 그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엄마가 한 건 방치가 아니라 방목이었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