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루의 수도 리마
페루의 수도 리마.
하늘이 늘 흐리고 파도가 늘 느리다.
6시 30분에 시작되는 요가 수업을 위해 무려 6시 25분에 기상했으나 주말 일과에 맞춰 요가 수업은 7시에 시작이다. 운동은커녕 가벼운 스트레칭을 한 지도 너무 오래됐다. 몸이 이상한 곳으로 움직인다. 요가 하다가 요강에 토하는 줄 알았네.
변기는 서양식 변기 모양을 흉내 내고 있는데 물 내리는 게 없다. 큼지막한 페인트 통에 일을 보고 그 위에 나무 톱밥을 뿌려 냄새를 막는다. 그 위에 또 싸고 또 뿌린다. 우리의 똥과 오줌은 얼마 뒤 무공해 농장의 비료로 쓰인다.
아침 식사는 파파야 바나나 사과와 비건 요거트, 그라놀라. 깨끗한 음식들로 밤과 아침내 이어진 공복을 채운다는 건 더없이 기쁜 일이다. 먹는 일의 즐거움. 하는 건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일 테다.
아침을 먹고 4시간의 봉사활동을 할 시간.
무슨 일을 하고 싶은가 묻기에 모조리 다 하고 싶다고 답했다.
“주방 괜찮니?” 묻기에 얼떨떨, "당연히 좋지!" 라 했다. 아침을 먹으며 멕시코에서 와 한 달째 머무르고 있다는 페를라에게 들은 벽화 그리기가 더 흥미로워 보였으나 뭐든 어떠랴. 채식 요리를 할 테니 고기나 생선을 만질 일이 없을 테고, 새로운 일을 배우는 건 늘 즐거우니.
주방장 아줌마는 산타, 10년째 채식을 하고 있으며 몸의 변화를 느끼느냐는 질문에 대한 길고 알아듣기 힘든 대답 중 'tranquilo(편안하고 얌전하고 고요하고…)'라는 단어가 어쨌든 들어 있었다.
주황색 고추를 자르고 씨를 모조리 뺐다. 또 다른 종류의 마른 빨간 고추는 빡빡 소리가 나게 빨래를 했다. 매운 걸 정말 못 먹는 페루인들의 고추를 맵지 않게 만드는 과정이다. 매운맛을 내기 위해서 고추를 쓰는 나에겐 문화충격. 배추는 양파처럼 썰었다. 몇 가지 채소를 더 손질해 커리를 만든다. 인도에서 온 향신료가 들어간 진짜배기 커리. 커리에는 고기도 들어갔는데 고기의 이름은 soya meat, 콩고기다. 돼지고기 씹는 느낌과 비슷했다. 콩으로는 우유를 만들고 두부를 만들고 고기를 만들 수 있기 때문에 훌륭한 음식이라고, 산타 아줌마는 말했다. 된장과 청국장도 만들 수 있으니 정말 훌륭한 음식이 맞구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두부를 1cm 정도 두께로 잘라 깨끗한 기름에 튀겼다. 커리와 함께 먹을 거다. 갖가지 야채를 찢고 라임을 짜 샐러드를 만들었다.
요리하며 맛을 보는 일이 없다. (냄새로 간을 맞춘다니, 맙소사) 이 모든 음식은 크리슈나에게서 온 것이며 크리슈나가 가장 먼저 맛을 보아야 한다는 것. 요리가 끝난 후 모든 음식을 조금씩 덜어 크리슈나에게 바치는 의식을 행한다. 음식을 땀 흘리며 힘들게 만들어 이것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니고 하느님이 내려 주신 것이라며 감사의 기도를 하고 음식을 먹는 기독교 문화와는 사뭇 다른 풍경.
역사에 남을 만큼 맛있는 점심 식사를 마치니 이미 3시다. 일찍 일어난 탓에 잠이 살살 오지만 이 시간에 자 버리면 밤에 잠이 안 와 고생하고 내일 하루가 힘들겠지. 샤워를 해야겠다.
남반구의 7월, 이곳은 겨울이지만 온수가 없다. 가장 더운 시간에 샤워를 해야지 하고 어제 오후부터 버텼는데 더운 시간도 없다. 찬물로 꾸역꾸역 몸을 씻었다.
집 앞 해변을 걷는다.
새들이 와서 죽는다는 리마의 해변. 황량하고 쓸쓸하다. 어제 막 태어난 갈매기도 여기에 오면 당장 죽어버릴 것 같다. 카메라를 꺼내 사진도 몇 장 찍고 피리도 한 소절 불고(오래간만에 '산골 소년의 슬픈 사랑 이야기'를 불었는데 계이름이 다 기억나서 기뻤다), 해먹에 누워 책을 펼쳤다. 길에서 만난 친구에게 내 책을 두 권 주고 대신하여 받은 알랭 드 보통의 '불안'이다.
‘불안’이라는 단어가 왠지 어색한 외국어처럼 느껴져서 이내 책을 덮었다.
황량하기 그지없는 바닷가 해먹에서 와이파이가 터진다. 맙소사. 숙소를 정하기 전 "인터넷 안 돼요?"라 묻고 안 되는 곳을 골라 가야 할 세상이다. 인터넷 없는 생활의 풍족함을 몇 차례 느꼈으나 와이파이가 콸콸콸인 곳에서 파란색과 노란색이 아름다운 어플리케이션들을 열지 않을 자신은 없다. 채식을 지향하지만 부드러운 닭다리 살이 혀에 올라오면 씹지 않을 자신이 없는 것과 같다. 원칙을 가지되 그것에 원칙이라 이름 붙이지 않는다면 하루가 조금 더 풍요로워지는 것 같기도 하다는 생각이다.
그건 그렇고 해먹에 누우면 언제나 잠이 온다. 6시에 저녁을 먹는데, 저녁 먹고 자야지 좀만 참고 저녁 먹고 이 닦고 푹 자고 일찍 일어나야지 좀만 참고…. 하다가 5시 50분쯤에 잠들었나 보다. 98년 월드컵 본선 첫 경기 멕시코전 눈 비비며 기다리다 눈 떠보니 이미 3:1이었던 날과 비슷한 기분이다.
일어나니 6시 45분, 저녁은 누가 벌써 다 치운 거야. 나는 냄새도 못 맡았는데. 배고프다.
밤 10시, 징조가 좋지 않다. 일기를 다 썼는데, 잠은 어디로?
<이름 없는 들풀로 피어>라는 제목의 노래가 들려온다. 내일은 같은 제목의 그림을 한 장 그려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리마 Eco Truly Park의 어느 토요일.
의식주 생활부터 사소한 일상까지 모조리 부딪힌다. 남들이 모두 그렇게 하니까 당연했고, 그래서 늘 그렇게 해왔던 모든 것들과 이곳의 생활이 매 순간 충돌한다. 이것이 맞을 수도 저것이 맞을 수도 있다. 여기에 맞는 것도 있겠고 저기에 맞는 것도 있겠다. 그러니 충돌할 필요가 있다.
내가 사는 세상이 뭔가 많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 무렵 떠나온 이곳 '대안 세계'.
충돌은 어느 하나의 부서짐이 아닌 진화와 퇴화와 아름다운 조화를 의미할 것이다.
나와 세상이 충돌하고 나의 세상과 너의 세상이 충돌하는 흥미진진한 여행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