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희섭섭 Sep 07. 2015

열흘 연속 하늘에 별이 여러 개 보여서

그림을 그려야겠다. 

계절 할 때 계(季) 자와 순진무구한 남자 아이의 얼굴을 잘 섞어서 도화지를 채워야지. 포스트모더니즘이라 하는 건 바로 그런 게 아닌가. 계절과 남자 아이의 얼굴이 아무렇지도 않게 섞이는 것.

아니, 그리지 않는 편이 좀 더 포스트모던-할지도 모르겠다. 더군다나 오늘같이 실내외의 온도 차가 큰 겨울날에 그림을 그리다 보면 겨드랑이에 땀이 맺히기 십상이니까.     


계절 계(季)는 벼 화(禾) 아래에 아들 자(子)가 붙어있는 모양이다. 시계도 달력도 없던 시절, 아이들은 벼의 상태를 보고 계절을 짐작했기 때문에 만들어진 상형자라고 한다. 

그나저나 벼는 봄, 여름, 가을, 겨울에 각기 어떤 모습일까. 달력과 시계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똑한 관계로 나는 바보가 되어간다. 

곰곰이 보니 가을 추(秋)는 벼 화(禾) 옆에 불 화(火)가 붙은 꼴이다. 가을의 벼는 불에 타들어 가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나 보다. 곰곰이 본다면, 누구도 아주 바보는 아니다.      


철부지(철不知). 

철을 알지 못하는 사람, 계절을 모르는 사람. 

언제 씨를 뿌려야 할지, 언제 수확을 하고 언제 놀아야 할지를 모르는 사람을 철부지라고 하나보다. 계절을 모르고 날뛰는 사람에게는 철이 없지만 매력이 있다. 한편,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마저 죽은 마당에 이제 호밀밭은 누가 지키나 걱정이다.

비정규직이라도 좋으니 나에게 호밀밭의 파수꾼 직책을 맡겨준다면 죽을 때까지 철부지도 살아도 괜찮을 것 같은데. 그러나 시대가 시대인 만큼 파수꾼에 지원하려면 학점 4.0에 토익 900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걱정이다.   

살아 생전 조그마한 항아리 속으로 못 들어가고

죽어서는 조그마한 항아리 채우지 못하네. 

정삼일, [인생] 


지하철에 승객들의 안전을 위해 스크린 도어를 설치하면서 생기게 된 얼떨결 한 공간에 시를 새겨 넣기로 한 건 서울특별시가 특별하게 잘한 일 중 하나인 것 같다. 

 “내 나이가 73살이기 때문에 나를 위한 자리가 따로 있어.”라고 큰소리치며 노약자석으로 위풍당당하게 걷는 한 할아버지는, 

“지가 죽어봤어? 죽어봐야 천국인지 지옥인지 뭐시기가 있는지 알지. 그래 내가 곧 알게 되겠지 뭐.”하고 말씀하셨는데, 저 나이가 되면 저런 이야기도 아주 크게 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조금 부러웠다. 

 나도 어서 나이를 먹고 73살이 되어 할 말이 아주 많아지게 되면 사는 게 조금은 수월하지 않을까. 빨간 목도리를 하신 73세 할아버지의 인생은 어떤 것이었을지 궁금하다. 조그마한 항아리와 어떤 연관이 있었을까. 항아리가 중요한가.      


항아리, 항아리, 항아리. 

새삼 어감이 마음에 들어, 몇 차례 되뇌어보았다.  

살아서 조그마한 항아리 속으로 못 들어가고 죽어서는 조그마한 항아리 채우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살아있는 동안 조그마한 항아리 속에 들어가 보겠노라 무모해져 보는 일, 육신이 완전히 사라진 자리에 남겨진 향기가 항아리를 한가득 채울 수 있게 되면 어떨까, 하는 바람으로 사는 일 등은 조금 매력적인 것 같다. 

내 친구가 이런 내 생각에 동의해줬으면 좋겠다.

     

몸은 바쁘고 마음은 한가롭다. 

열흘 연속 하늘에 별이 여러 개 보여서, 기분 또한 상당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