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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희섭섭 Sep 07. 2015

타조의 몸집에 병아리의 털을 입고

그러나 알람시계 소리에 화들짝 놀라 눈을 뜨는 것은 얼마나 비 자연스러운 일인가. 수 십 년간 매일 아침이 그렇게 시작된다면 오히려 그게 더 자연스러운 일일까. 

육체에 쉼이 있을 때 마음에도 공간이 생긴다. 참 오랜만에 눈이 자연스럽게 떠질 때까지 잠을 찼고, 참 오랜만에 좋은 꿈을 꿨다. 장소는 뉴질랜드나 호주 아니면 스위스나 오스트리아쯤의 어느 목장인 듯했다.      


양이 여러 마리 뛰어놀고 있다. 양들은 마치 사람이 양의 소리를 모사하는 것처럼 “으메에~ 으메에~” 소리를 냈는데, 그것은 우는 소리라고 할 수도, 웃는 소리라고 할 수도 없었다. 감정이 없는 소리, 무심(無心) 한 소리다. 

“으메에~”

내가 목동이었는지 양이었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텔레비전을 돌리다 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에서 어느 축산농장의 소와 닭, 돼지가 사육되는 모습을 보았다. 그들은 제 몸 하나 겨우 들어갈 공간에 갇혀 성장에 좋다는 사료들을 배가 터지게 먹으면서 자라고 있었다. 움직이면 살이 빠지기 때문에 운동은 절대 금물이다. 그들의 존재 이유는 얼른 적당히 살이 쪄서 적당한 값에 팔리거나, 얼른 많은 새끼를 낳아서 많은 돈을 벌어오는 것, 둘 중 하나인 듯 했다.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성장촉진제를 과도하게 투여 당한 어린 닭이 타조의 몸집을 하고 병아리의 털을 입고 있는 모습이었다. 

    

대학교 신입생이었을 때, 같은 신입생 한 명이 학교 앞 지하철 선로에 몸을 던진 일이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순서 없이 떠나버린 지금이라면 그다지 충격 받을 만한 일도 아닐 수 있겠으나, 세상에 대해 무지할 정도로 낙관적이었던 스무 살의 나에게 동갑내기 동료의 자살은 큰 충격이었다. 

왜 자살을 했을까. 착하고 공부 열심히 하고 소모임으로 밴드 활동을 하는 평범한 학생이었다고, 남은 사람들은 그를 추억했다.      


시대의 지성들은 텔레비전 토론 프로그램, 신문지면 등에 등장하여 사태가 누구의 잘못인가를 밝혀내고 추궁하려 혈안이다. 국내 최고의 대학에서 못다 핀 젊음들이 연이어 자살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편의상 누군가에게, 또는 무언가에 책임을 몰려 애쓰는 듯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 무언가가 특정 대학, 그 제도와 그 총장, 엘리트 교육 등의 특수성이 될 수는 없을 것 같다. 

문제가 있다면, 그것들에 우선하는 닭장, 돼지우리, 성장촉진제에 있는 것이 아닐까.



“공간은 비좁고 공기는 탁하다. 호흡이 곤란하다. 견디기가 쉽지 않다. 이게 사는 건가 싶지만 주위를 둘러보니 다들 그렇게 살고 있다. 그러니, ‘그러려니’ 한다. 때가 되면 밥도 먹여준다. 무슨 맛인지는 잘 모르겠으나 일단 먹어두면 좋다고들 한다. 무럭무럭 자라라며 정체불명의 주사도 놓아준다. 정신이 몽롱하지만, 성장하고 있는 기분이 들 때면 왠지 뿌듯하기도 하다.

그러나 더는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 숨이 막혀온다. 동료들은 하나둘 미쳐가고, 단발 마의 비명을 지르며 갑자기 죽어버리는 중닭들도 있다. 나도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조금만, 조금만 더 버티면 행복한 날이 찾아올 것이라고 들, 한다.”     


아직도 살아 있는 자들은 이렇게 사는 것이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는 것일까, 아니면 언젠가 가치가 있어질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고 사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그저 밥 먹기 바쁘다 보니 그럭저럭 살아지는 것일까. 이러한 생각은 지나치게 염세적인 것일까.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소나 닭, 돼지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누군가에 의해, 다른 무언가를 위해 함부로 길러져서는 안 된다. 소나 닭, 돼지가 그렇게 길러져야 한다는 게 아니다. 누군가가 우리를 그렇게 키우든 말든 그렇게 크거나 그렇게 크지 않을 선택의 자유의지가 분명히 우리 개인에겐 있다는 것이다. 그 선택이 결코 죽음일 필요는 없다.     


닭장 바깥엔 어떤 세상이 존재할까.

모습과 풍경을, 소리를 그려본다. 초원을 뛰어노는 양의 ‘으메에~’를 그려보고, 우리에 묶여 울부짖는 소의 ‘음머~’를 그려본다. 닭장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는 일은 두렵다. 닭장 밖 세상에 아무것도 없거든 그땐 어떡하나. 다시 문을 열고 안락한 닭장 속으로 들어올 수 있을까, 두렵다. 하지만 그것들보다 더 두려운 건, 내가 나로 태어나서 마치 남인 양 살아지는 일이 아닐까. 조금 작더라도 생기가 넘치는 샛노란 병아리로 살아남고 싶다. 

이십대의 한 복판, ‘청춘’이라 불러도 좋을 어느 여름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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