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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희섭 Sep 13. 2015

프렌치 타임은 오늘도 센강처럼


아이슬란드의 수도 레이캬비크의 한 펍에서 술을 먹다가,

 "그래 바로 지금이야. 조금 춥겠지만 한겨울의 산티아고 순례 길을 걷는 거야."

하고 손가락 약속에 도장까지 쿵 찍었던 계획은, 프랑스의 수도 파리의 한 펍으로 자리를 옮겨 술을 먹다가,

 "그래 지금은 아니야. 추우니까 나중에 걷자."

로 급 수정되었다.     


 ‘여행의 목적은 계획을 완수하는데 있지 아니하고 몸과 마음을, 그리하여 나의 기분을 좋은 상태로 유지하는 데 있다.’ 하는데 의견을 함께하는 빈센트는 아이슬란드에서 만나 두  달째 함께 유럽 대륙을 방랑 중인 동갑내기 친구.

Nantes라 쓰고 낭뜨라 읽는 프랑스 서부의 중소도시. 빈센트의 고향 집이 있는 Pontchâteau라 쓰고 퐁차뚜라 읽는 곳으로 향하는 길목에 있는 이 조용하고 활기찬 도시의 깨끗하고 담배 냄새나는 센트의 친구 미카엘의 아파트에서 지내고 있다.


어젠 늦은 밤까지 카드놀이를 하다 잠들었다. 눈을 뜨니 이미 2시. 토스트에 누뗄라를 발라 공복감을 해결하고 거실 소파에 가만히 앉아있으니 창틈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예사롭지 않다.

 “그렇다면 오늘은 산책이란 걸 해보자.”

센트와 오래간만에 뜻이 통한다.  

   

15세기에 지어진 디즈니 동화 풍의 귀여운 성곽과 작가의 의도를 짐작할 수 없는 슈퍼 모던 중층 빌딩들이 풍경을  함께하는 이 도시는, 여기서 크로아상 굽는 법이나 배우며 일 년쯤 살아보면 어떨까- 싶은 생각이 들 만큼 상쾌하다.

강원도 진돗개 마냥 무심해 보이는 요 동네의 구석구석에서도 어느덧 메리 크리스마스 냄새가 난다. 빵 냄새와 치즈 냄새와 와인 냄새와 함께 크리스마스가 스믈스믈 피어오른다.


아페리티프와 앙트레와 쁠라와 치즈와 디저트를 순서로 먹는다. 내가 차린 쁠라인 ‘냉장고에 있는 음식 전부 꺼내 고추장에 볶기’는 소시지, 까망베르 치즈, 레몬 치즈 케이크와 보르도 화이트 와인에 그냥 묻힌다. 프랑스를 싫어해도 프랑스 음식을 싫어할 순 없을 걸? 이란 말이 틀리지 않다.


무진장 잘 먹는다. 배부른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사람들이다. 실제로 프랑스어에는 “배부르다”하는 표현이 없다. “더 이상 배가 고프지 않아.”가 있을 뿐.

저녁 식사를 세 시간 삼십 분 하는 건 이제 조금 적응이 되겠는데, 선천적 소위(小胃)는 여전히 늘어날 생각을 않고 메인 요리와 디저트 사이에 어떻게 하여 치즈의 자리가 생겼나 하는 건 아직도 궁금하다.


식구 미카엘과 마틴은 낭뜨 대학의 대학원에서 해안공학을 공부 중인 학생들이다. 학과 친구들과 당구 약속이 있다 하여 저녁 식사 후 동네 당구 바에 단체로 출동한다. 다섯 명의 학교 친구들에 홀로 껴서 큐에 초크 질을 하며 맥주를 홀짝이자니, 새삼 내 동문들과 그 생활과 모국어가 그리워진다.

열 시에 만나기로 한 친구들과 당구를 한 시간 반 쳤는데 어찌 된 노릇인지 헤어질 때 시계를 보니 한시. 프렌치 타임은 오늘도 센강처럼 유유하고 속 터진다. 프랑스에서의 하루는 오늘도 먹다가 기다리다가 그렇게 끝난다.   

별일 없다. 배우는 것도, 깨닫는 것도 없다. 여행하며 배운 프랑스어라고 해봐야 “더 이상 배가 고프지 않아” 정도가 끝이다. 수업이 없고 과제가 없을 뿐 한국에서의 한량 생활과 별반 다르지도 않다.

그러나 생활을 함께하는 사람들이 다르고 먹는 음식이 다르고 쓰는 언어가 다르고 생활과 놀이의 방식과 규칙이 다르다.(이를테면 이곳의 포켓볼에는 흰 공이 하나, 검은 공이 하나, 빨간 공이 일곱, 노랑 공이 일곱이다.)

그 다름과 다름, 다름으로부터 오는 짜릿한 자극들이 이 날들에 의미를 부여한다.     

얼마 전 아이슬란드에서 함께 지낸 한 슬로바키안 미키 마토 녀석이 가벼운 언쟁 중 나에게,

"젠장 넌 왜 항상 남들과 달라?"

하고 비꼬았는데, 나는 그 말이 왠지 듣기 좋았더랬다.

남들과 다른 것은, 다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는 결코 틀린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한글에서도 '다르다'와 '틀리다'라는 확연히 다른 모양과 다른 소리를 지닌다.

      

“한국에서는 종종 '다르다'와 '틀리다'를 혼동하여 쓰는 경우가 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다르다'를 대신하여 '틀리다'를 쓰는 사람들이 간혹 있다. 가령 인상을 쓰며 ‘아니야, 이 와인은 전에 먹었던 그거랑 틀려.’라고 말하는 것이다.”하는 이야기를 이곳의 친구들에게 들려주려다 포기한다.

이 이야기는 그들에게, “다음 달이 되면 한국에서는 내 나이가 28살이 된다.”하는 것만큼 이해가 어려울 것이기 때문이다.

 

나도 틀리는 건 별로다. 이왕이면 맞고 싶다.

그러나 우리가 비중을 두어 생각하고 고민하여 행동하는 많은 일이 정말 틀리기 싫음에서 기인하는지, 혹여 남들과 달라짐이 두려워서 결국엔 모두가 다르게 생각하고 똑같이 행동하고 있는 건 아닌지, 아니면 은연중에 너도, 나도 '다름'을 '틀림'과 동일시하고 있는 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어 문득 배가 고팠다. 그렇게 먹었는데.

특수한 허기짐이다. 까망베르 치즈를 바케트에 찍어 먹어보기로 하였다.

 

인생을 쉽게, 그리고 안락하게 보내고 싶은가?

그렇다면 무리 짓지 않고서는 한시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 속에 섞여 있으면 된다. 언제나 군중과 함께 있으면서 끝내 자신이라는 존재를 잊고 살아가면 된다.

 

공자, [논어]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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