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보로비코프스키<두 자매 초상화><로푸히나의 초상>

19세기 러시아 명화

by 갤러리 까르찌나
러시아만의 인간 중심 초상화풍을 최초로 확립시킨 보로비코프스키
블라디미르 보로비코프스키(1757~1826), <두 자매 초상화-안나와 바르바라 가가리나 공주>, 1802년, 75x69.2cm, 캔버스에 유채, 트레챠코프 미술관, 모스크바


보로비코프스키 그림 속 여인들의 표정은 참으로 미묘하다.

생동감 넘치고 호기심이 가득 어린 눈빛으로 관람자를 압도하는가하면 전체적인 느낌은 신비로울 정도로 차분하고 내면적이다. 그러면서 그녀들의 은근하고 미묘한 표정을 저토록 생생히 포착해낸 보로비코프스키의 관찰력과 표현력에 새삼 놀라게 된다.


보로비코프스키는 러시아 초상화의 새로운 장을 연 작가 중 하나다. 로코토프에서 시작된 러시아만의 인간 중심 초상화풍이 보로비코프스키에서 꽃을 피웠으며, 드디어 아카데믹한 초상화 형식에서 완벽하게 탈피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럼 보로비코프스키의 초상화는 어떤 면이 다를까? 우선 보로비코프스키 그림 속 모델들은 어두운 클래식한 배경에서 벗어나 아름다운 자연 풍경을 배경으로 관람객을 쳐다보고 있다. 즉 화려한 자연광속에 노출되어 있다.

또, 사랑스런 미소와 함께 옛날 그리스 로마시대의 엠파이어풍 고전 드레스를 입고 마치 여신 같은 우아함을 가지고 있다. 옷이나 장신구로 신분을 과시하던 기존의 초상화 기법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모델들은 세상의 모든 일을 뒤로 한 채 태초의 순수함만을 간직한 듯 선한 표정이다. 물론 그림 속 배경이나 모델들의 의상은 모두 작가 상상의 산물이라 한다. 이런 시도는 당시 상황에 비추어 상당히 획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보로비코프스키의 초상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러시아의 시대상을 알 필요가 있다. 러시아 18세기는 프랑스 계몽주의를 추구하는 귀족 중심 사회였다. 하지만 이 그림이 그려질 당시 세계사를 보면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여 루이 16세가 처형된 바로 직후 그려진 그림이다. 프랑스 책을 읽고 프랑스어로 말하고 모든 것을 프랑스식 대로 살아가며 프랑스에서 생겨난 계몽주의를 받아들이던 러시아 귀족들은 이러한 현실 앞에 당황하게 되고, 프랑스 혁명의 주된 힘이 된 계몽주의가 러시아에 퍼지는 것을 두려워하여 철저하게 금지한다.


그로 인해 당시 러시아에서 팽배하던 계몽주의 관련 모든 예술과 사상 등이 감상주의라는 옷 속에 몸을 감추게 된다. 그런 시대적 배경 때문인지 보로비코프스키는 어떠한 시류에도 영향을 받지 않는 자신만의 독특한 초상화 기법을 창안해낸다. 태초에 어떠한 티끌에도 오염되지 않은 순수 결정체 같아 보이는 모델들이 누구의 발길도, 손길도 닿지 않은 듯한 자연풍경을 뒤로 한 채 화폭에 자리잡고 있다. 어느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미묘하고 아름다운 미소를 머금은 여인들이 말이다. 마치 신의 영역에 사는 천사 같은 느낌이다.


800px-Borovikovsky_maria_Lopukhina.jpg 블라디미르 보로비코프스키(1757~1826), <로푸히나의 초상>, 1797년, 72x 53.5cm, 캔버스에 유채, 트레챠코프 미술관, 모스크바

러시아 최고의 미인 '로푸히나'-순수의 결정체


로푸히나는 아름답고 매력적이다. 살짝 올라간 입꼬리 때문인지 새침한듯 보이기도 하지만 어여쁜 소녀가 가지고 있는 유순하고 차분한 느낌이 전체 분위기를 지배한다.


하지만 보로비코프스키 초상화가 갖는 신비하고 묘한 느낌 때문일까? <두 자매 초상화-안나와 바르바라 가가리나 공주>와 나란히 전시되어 있는 <로푸히나의 초상>은 압도적인 아름다움을 뽐내며 러시아 최고의 미녀 초상화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는 초상화지만 근거를 알 수 없는 괴이한 소문에 쌓여있는 그림이기도 하다. 마치 인기있는 연예인들이 끊임없이 구설에 휩쓸리는 것처럼 말이다. 러시아 그림책에도 자주 등장하는 이 그림과 관련된 에피소드는 꽤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그림 속 모델 로푸히나는 이반 톨스토이 장군의 딸로 그림이 그려질 당시의 나이가 18살이었고 이미 결혼을 한 상태였다고 한다. 이 그림은 로푸히나의 집에 걸려 있었는데, 그림이 완성된 후 5년쯤 지나 그녀는 병들어 죽는다. 우연의 일치인지 로푸히나의 사망 후 이 그림을 보았다고 추정되는 비슷한 또래의 여인들이 연달아 목숨을 잃는 일이 발생하는데, 그 이유가 그림에 걸려있는 저주 때문이라는 소문이 돌게 된 것이다. 게다가 이 소문에는 로푸히나 아버지의 기이한 행동들이 큰 역할을 했다. 그는 러시아 신비주의를 신봉했고, 그런 그가 딸의 죽음을 슬퍼한 나머지 주술을 걸어 죽은 로푸히나의 영혼을 그림에 집어넣어 이 그림을 가까이에서 본 젊은 여인들이 똑같은 병에 걸려 죽는다는 것이었다. 한 마디로 죽음을 부르는 괴기한 그림이 되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런 괴소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러시아 최고 콜렉터 트레챠코프는 작품의 예술성을 극찬하며 1880년 그림을 구매하여 자신의 미술관에 걸어 놓는다. 흥미롭게도 그 후 이 그림을 본 많은 사람들 중에서 소녀들이 죽었다는 이야기는 없다.


하지만 이 작품은 또 다른 괴소문에 지금도 시달리고 있다. 결혼할 연인들이 이 그림 앞에 나란히 서서 관람하면 나중에 반드시 결별하게 된다는 미신 아닌 미신이 현재도 있다고 하니, 로푸히나 초상을 볼 때는 멀찌감치 떨어져 마치 서로 남인 양 그림을 관람해야 하지 않을까? 혹은 헤어지고 싶은 연인이 있다면 이 그림을 보러 가자고 말해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사연이야 어찌되었든 이 그림이 너무나 뛰어나니 그런 소문에 시달리는 것 아닌가 싶다. 세계 최고의 명작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도 비과학적인 일화들을 많이 가지고 있듯, 이런 에피소드는 명작에 으레 따라붙는 것일 거다. 한 마디로 로푸히나 초상화는 트레챠코프 미술관에서 가장 인기 있는 그림 중 하나다.


어떤 괴소문을 가지고 있든 이 그림이 그려진 시기는 18세기 러시아 초상화의 황금기였으며, 보로비코프스키에서 시작된 초상화의 새로운 기법은 후대 많은 작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늘 정형화된 포즈와 어두운 색채의 고전적인 초상화에 식상했다면 조금 시간을 두고 보로비코프스키의 이 초상화를 음미해 보자. 예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순수한 감정의 한자락이 솟구치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보로비코프스키의 초상화를 보고 후대의 화가 베누아도 ”보로비코프스키의 초상화에는 수천 명의 화가들이 흉내 낼 수 없는 독창성이 있어, 그는 아주 러시아적인 작가이며 세계 최고의 작가다”라며 그의 작품성에 최고의 가치를 부여했다.


18세기 러시아 계몽주의

프랑스 계몽주의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예카테리나 2세(1762~1796)가 집권하던 때를 러시아 계몽주의 시대라 칭한다. 당시 황제는 프랑스 사상을 찬양하며 스스로 계몽군주임을 자처했다. 그래서 보통 이 시기를 러시아 계몽주의 시대이면서 ‘귀족의 시대’라 부르는데, 귀족의 시대는 표트르 대제가 황제 수하에 묶어 두었던 과거 대귀족들을 예카테리나 2세가 다시 복권시켜 준 데서 유래한 명칭이다. 물론 프랑스 계몽주의와는 성격이 많이 다르다. 볼테르를 직접 페테르부르크로 초빙하기도 하고, 프랑스 계몽주의자들과 나눈 서신들을 묶어 책으로 펴내기도 했던 예카테리나 2세였지만, 실제 정치에서는 계몽주의와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농민 반란을 무참히 진압했으며, 철저히 귀족 중심의 정치, 귀족 시대를 펼쳤다. 이때 대표적인 계몽주의 사상가로 알렉산드르 라디셰프(1740~1802)를 들 수 있다. 이 시기 러시아 귀족들은 철저하게 프랑스식 문화에 젖어 살았다. 프랑스어를 쓰고 프랑스 책을 읽고, 프랑스식 문화 생활을 즐기지만 계몽사상의 평등 개념은 수용하지 않았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계몽주의 시대와는 사뭇 다른 러시아만의 계몽주의지만, 이 시기를 러시아 계몽주의 시대라 부른다. 즉, 프랑스의 사상이나 사회적 분위기를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러시아가 아니라, 단지 프랑스의 유행을 '흉내내는' 러시아라 생각하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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