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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갤러리 까르찌나 Apr 11. 2021

1. 파벨 트레챠코프(1832~1898)

19세기 러시아 미술계의 대부,러시아 그림 콜렉터

그림을 진정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기쁨을 줄 수 있는 작품들을 소장하여 
누구나 쉽게 볼 수 있도록 하고 싶을 뿐이다. 
나는 러시아 화가들의 작품으로 이루어진 국립 미술관을 남기고 싶다.

-1832년 러시아에서 태어난 유명한 상공인이자 트레챠코프 미술관을 설립한 파벨 미하일로비치 트레챠코프(1832∼1898)의 말이다.  

일리야 레핀이 그린 파벨 트레챠코프


◆ 파벨 트레챠코프는

· 1832년 부유한 상공인 집안 출생
· 러시아 그림 N.G. 쉴데르의 <유혹>과 V.G. 쿠댜코프의 <핀란드 밀수꾼과의 전쟁>을 사들이며
  콜렉 시작
· 친구 크람스코이가 1870년부터 시작한 이동파의 활동을 지원,  당시 대부분의 이동파 그림을 소장.
· 1870년부터 자신의 집에 미술관을 열고 일반인들에게 그림 관람을 허용.
· 1892년 1,276점의 그림, 471점의 드로잉, 10점의 조각과 동생 세르게이 트레챠코프가 수집한
  서유럽 미술품 84점과 함께 자신의 미술관을 국가에 기증.
· 1893년 8월 15일 ‘파벨과 세르게이 트레차코프 시립미술관’ 개장.
· 현재 트레챠코프 미술관은 1856년 개관된 러시아 최초의 미술관으로, 
  62개 전시홀에 순수 러시아 명작들 18만 점 정도 소장 전시.
· 트레챠코프 미술관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주 박물관과 함께  러시아 2대 미술관
모스크바 트레챠코프 미술관 외관

파벨 트레챠코프는 러시아 미술 컬렉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사람으로서 

1856년 러시아 아카데미 화파의 대표 화가 작품인

N.G. 쉴데르의 <유혹>과 V.G. 후댜코프의 <핀란드 밀수꾼과의 전쟁>을 

사들이면서 그림을 모으기 시작했다. 

좌) 니콜라이 쉴데르, <유혹>  1857년, 캔버스에 유채 (우) 바실리 후댜코프, <핀란드 밀수꾼과의 전쟁>, 1853년, 캔버스에 유채


특히 트레챠코프의 콜렉션이 큰 의미를 가지는 부분은 

아카데미 화파에 속하지 못한, 즉, 제도권의 혜택을 받지 못한, 

가난한 러시아 미술가들(이동파)의 그림을 사들이고 

1870년 자신의 집에 미술관을 열어 일반인들에게도 그림 관람을 허용했다는 점에 있다.  

트레챠코프 생전의 트레챠코프 미술관 모습


트레챠코프 미술관을 찬찬히 돌아보면 

‘이런 주제의 그림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니’ 하면서 

감탄을 내뱉을 여러 작품들이 즐비하다. 

트레챠코프가 없었다면 역사의 불구덩이 속에 모두 사라졌을 주제의 그림들이

큰 문화 유산으로서 현재 러시아 국민들에게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트레챠코프는 러시아 인텔리겐치아

(지식 노동에 종사하는 사회계급)의 한 사람으로서 

자신의 부를 사회에 환원하는 방법의 일환으로 

그림을 수집하고 미술관 설립을 추진한 것이다.


파벨 트레차코프는 문화 엘리트의 일원으로서 

공공봉사와 자선사업, 예술 후원의 과업을 제대로 실천한 

노블레스 오블레주의 표상이라 할 수 있다. 



◆트레챠코프 미술관은◆

자국의 미술품만을 전시한 박물관으로서 세계 최대 규모

트레챠코프 미술관 모습


‘러시아 그림들은 모두 민중에게 속해야 한다’는 신념 아래 

1892년 1,276점의 그림, 471점의 드로잉, 10점의 조각과 

동생 세르게이 트레챠코프가 수집한 서유럽 미술품 84점과 함께 

자신의 미술관을 국가에 기증한다. 

그렇게 1893년 8월 15일

 ‘파벨과 세르게이 트레챠코프 시립미술관’이 문을 열었고, 

매년 15만 명 이상이 찾는 모스크바의 명소가 되었다. 

현재 공식 명칭은 ‘국립 트레챠코프 미술관’이다. 

1918년 러시아 혁명 후 이 시립 미술관은 국유화되었다.

트레챠코프 미술관 실내 전시장 모습


모스크바 트레챠코프 미술관은 

1856년 개관한 러시아 최초의 미술관으로,

 62개의 전시홀에 순수 러시아 명작들 18만 점 정도가 

소장 전시되어 있다


(사실 트레챠코프 미술관은 1892년 오픈했지만, 

공식 개관일은 설립자 파벨 트레챠코프가 

처음으로 러시아 화가들의 그림을 구입한 1856년으로 잡고 있다.)  



이 미술관은 러시아 역사가 시작되는 시기부터

 1900년대 초반까지의 러시아 미술품을 소장하고 있어 

전 세계를 통틀어 자국의 미술품을 전시하고 있는 세계 최대 규모의 미술관이며,  

20세기 초반부터 현대까지의 그림은

 크림스키발에 위치한 트레챠코프 미술관 신관에 

소장 전시되어 있다. 

트레챠코프 미술관 구관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주 박물관과 함께 
러시아 2대 미술관이다.


특히 트레챠코프는 유언장에

 자신의 미술관에 소장된 콜렉션을 그대로 보존하라는 것을 강조하였고,

이에 따라 어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트레치야코프 미술관 소장품은 

여러 미술관으로 흩어지지 않았다. 



*이동파: 

1870년 제정 러시아에서 이반 크람스코이(Ivan Kramskoi)에 의해 제창된 미술운동이다. 이 운동은 1863년 가을 14명의 상트페테르부르크 미술아카데미 학생들이 아카데미의 획일적이고 보수적인 교육에 반기를 들고 작품 창작 시 주제를 선택할 권리, 즉 창작의 자유를 요구하며 아카데미를 집단 탈퇴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 이 사건은 이후 러시아 미술사에서 '14인의 반란'이라는 명칭을 얻으며, 이동파의 탄생을 예고했다. 
1870년 크람스코이와 비평가 스타소프(Vladimir Vasilievich Stasov)의 전격적인 합의로 '이동 전시 협회'를 결성함으로써 마침내 미술사에 '이동파'라는 이름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동파는 동시대 모든 사람들에게 예술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 러시아 지방 곳곳을 순회하며 전시회를 개최한다는 의미에서 이 같은 이름이 붙여졌다. 이 운동은 특수한 몇몇 사람이 아니라 가능한 많은 사람들이 전시회를 볼 수 있도록 한다는 점에서 일종의 미술계의 브나로드 운동이었다.  
이동파의 목표는 예술을 관료행정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예술을 통해 민중을 교화시키는 것에 있었다. 따라서 미(美)에 대한 탐구보다 사회적, 윤리적 문제에 더 관심을 가졌다. 화풍도 대중에게 더 잘 어필할 수 있는 사실주의를 지향했으며, 삶의 진실이라는 러시아 미술의 전통을 극대화 시켰다. 이들 작품은 시골과 도시의 일상생활 장면이 주요 테마가 되었고, 일상과 축제 속의 농민과 도시민들이 주인공이 되었다. 
주요 활동 작가로는 크람스코이를 비롯해 니콜라이 게(Nikolai Ge), 그리고리 마소예도프(Grigoriy Myasoyedov), 일리야 레핀(Ilya Repin), 바실리 막시모프(Vassili Maximov), 바실리 수리코프(Vasily Surikov), 이반 시슈킨(Ivan Shishkin), 바실리 폴레노프(Vasily Polenov), 이삭 레비탄(Isaac Levitan), 발렌틴 세로프(Valentin Serov) 등 19세기 러시아 미술의 핵심 인물들이 참여했다. 
이동파는 1923년 마지막 전시를 갖고 혁명 정부 하에서 조직 개편을 위해 해체되었다. 정부의 후원 없이 거의 반세기 동안 지속된 이 그룹의 사상과 작업은 후대 러시아 미술과 서구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 트레챠코프의 대표 콜렉션 ※

일리야 레핀(1844~1930),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 1884년, 160.5 × 167.5cm, 캔버스에 유채, 트레챠코프 미술관
이반 크람스코이(1837~1887), <미지의 여인>, 1883년, 75.5 x 99cm, 캔버스에 유채, 트레챠코프 미술관
니콜라이 야로센코 (1846~1898), <삶은 어디에나>, 1888년, 212 × 106cm,  캔버스에 유채, 트레챠코프 미술관
니콜라이 게(1831~1894), <진리란 무엇인가>, 1890년, 233 x 171cm, 캔버스에 유채, 트레챠코프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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