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온한 사과4

썩은 혹은 고인

by 희블리

무슨 정신으로 집에 왔는지 모르겠다. 현관문을 열어젖히고 그대로 소파로 직행했다.

‘털썩’

가만히 누워 창밖을 바라보았다. 뉘엿뉘엿 자기를 감추는 해는 어느덧 달과 자리를 바꾸었고 시곗바늘은 자정을 가리키고 있었다. 오전에 먹은 삼각김밥 말고는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않아 위와 장에서 자기주장을 강하게 하고 있었지만, 손하나 까딱하기 싫었다. 그런데 자꾸 배실배실 웃음이 흘러나오는 이유는 무엇이며. 종일 걷고, 또 걸어서 다리가 퉁퉁 부었지만 개운한 기분은 또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땀에 몸과 옷이 다 젖었다. 평소 같았으면 외출한 옷은 옷걸이에 걸어 옷장에 정리하고, 나머지 옷은 세탁기에 넣고, 바로 화장실로 들어가 온수에 얼은 몸을 녹였을 텐데, 이대로 잠이 들어도 상관없을 만큼 피곤이 몰려왔다. 8년간 묵은 때를 밀어내서 그런가, 스르륵 감긴 눈은, 혜안이 생긴 그 눈은 다시 지금보다 더 먼 그때를 떠올렸다.

“야 들었어? 양희주가 이지혜 뒷담 까다가 걸렸대.”
“헐 진짜? 김혜빈도 이지혜 뒷담 까다가 나가리 됐던데, 이번엔 양희주야?”
“양희주가 김혜빈한테 이지혜 얘기했는데, 그걸 김혜빈이 고대로 이지혜한테 일러 받친 거 같던데?”
“헐, 개오바. 김혜빈, 이지혜한테 왕따 당할 때 도와준 게 양희주 아니야?”
“그니까, 양희주가 믿는 도끼에 발등 제대로 찍힌 거지.”

교실 안에 울리는 의자 끄는 소리, 사물함 닫는 소리, 교실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 그 많은 소음 중에 왜 내 얘기만 이렇게 귀에 쏙쏙 박히는 건지, 아니면 내가 내 얘기에만 귀를 열고 있는 건지 분간이 안 간다. 불명확하고 불확실할 상황 속에서 가장 정확한 건 단 한 가지. 나는 학교 폭력 가해자보다 더 질이 나쁜 방관자였고 나는 절대 불가촉천민으로 전락하지 않으리라는 간절함이 가득했다. 교실 속 소사회의 분위기를 양손에 쥐고 흔들며, 손쉽게 누군가를 조롱의 대상으로 만드는 술탄은 자신의 기분이 곧 정치적 견해임을 거침없이 쏟아낸다. 그 술탄인 이지혜는 늘 웃는 얼굴과 재미있는 농담으로 주위의 시선을 끌었고 이는 곧 그의 양손에 권력을 쥐어줬다.

그리고 그의 옆엔 항상 김혜빈이 있었다. 김혜빈은 술탄의 맞춤형 충신이었다. 그러던 중 중학교 2학년 학기 초에 전학 온 나와 짝꿍이 된 김혜빈은 대화가 잘 통한 내게 이지혜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진짜 너무 힘들어, 지가 무슨 왕이야 뭐야, 노래방 가자고 하면 가야 하고, 자기 집에서 놀자고 하면 놀아야 하고.”
“그래? 피곤하겠다. 나는 집순이라 학교 끝나자마자 집에 가고 싶어.”
“사실 나도 완전 집순인데! 난 집 밖을 나서는 순간부터 집에 가고 싶어.”

통하는 게 많았던 우리는 급속도로 가까워졌고 자신보다 나를 더 챙기고 아끼는 김혜빈의 모습이 심기에 거슬렸던 이지혜는 김혜빈을 향해 자신이 쥔 권력의 칼을 휘둘렀다. 누구 하나 자상을 입지 않았다. 아니, 사실 다들 조금씩은 자상을 입었으나 냄새를 숨긴 것일지도 모른다. 이지혜가 휘두른 칼에 조용한 피 냄새가 진동한 교실이었고, 그 피 냄새는 김혜빈에게서 진하게 풍겨왔다.

“아 어디서 김혜빈 냄새 안 나냐?”
“걸레 냄새 아니야?”
“아 완전 극혐”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웃음과 극명한 시선의 끝엔 김혜빈, 네가 서 있었지. 그런데도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이지혜의 옆에 우직한 신하처럼 서서 가만히 쳐다보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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