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의 맛을 본 나는 다음 대상이 내가 될까 봐 무서워, 모두가 잠든 밤에 김혜빈을 만나러 아파트 공원에 갔다. 이미 한 차례 울었는지 퉁퉁 부은 눈을 가리기 위해 모자를 푹 눌러쓰고 나온 김혜빈과 함께 울고, 이지혜를 원망하고, 모두가 잘못된 것을 알지만, 그 누구도 나서지 않는 모순된 환경을 탓하며 밤을 보냈다. 그리고 아침이 오면 나는 다시 술탄의 옆으로, 김혜빈은 불가촉천민으로, 모두 제자리로 돌아갔다.
무서웠다. 그 모진 말을 여린 몸으로 견뎌내는 네가, 너와 나의 위치가 바뀌는 건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더 쉬운 한 끗 차이라는 걸 너무나 잘 알아서 두려웠다. 그리고 시시각각 변하는 시선의 온도에 심기를 건드린다면 김혜빈처럼 공개처형을 서슴지 않겠다는 다분한 의도를 우리에게 자꾸 그 모습을 상기시켜주는 이지혜의 웃음 뒤에 가려진 영악함은 늘 서늘했다.
그러나 며칠 후, 나는 카스트제도의 가장 밑바닥으로 전락했다.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어진 약자는 다시 강자의 곁을 찾게 된다. 김혜빈은 우리가 밤에 나눈, 나는 추억이라 부르는 그 시간과 계절을 이지혜에게 이야기했다. 물론 우리가 나눈 대화 중 극히 일부를 발췌해서. 표면적으론 나를 고발하는 내용이었지만, 내면으론 ‘나를 다시 받아달라는’ 구애였다. 그 후로 김혜빈에 잘잘못을 따지거나 만나 달라는 연락을 하는 등의 행동은 하지 않았다. 그냥 가만히 모든 걸 듣고, 받았다. 나를 앞세운 그 구애에 얻은 교훈이 있었다.
‘고등학교에 가서 친구가 생기면, 다신 나를 못 떠나게 해야지’
이건, 괴물의 씨였다.
눈을 찌르는 햇빛에 미간을 찌푸렸다. 이사 가면 이번엔 진짜 암막 커튼을 사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기지개를 켰다. 아주 미세한 차이였지만 어제와는 확연히 다른 하루의 시작이었다. 직면과 인정은 마트에 가면 1+1처럼 본 상품을 사면 따라오는 사은품처럼 내게 왔다. 정말 우연한 순간에 찾아온 경각은 내게 울림보다 부끄러움을, 핑계보다 수긍을 선물했다. 기나긴 독방에서의 시간이 끝나가고 있다. 한 줌의 빛도 허용하지 않았던, 온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던 그 방에서 지낸 내게 그 찰나의 순간은 어제와 다른, 1년 전과 다른, 8년 전과 다른 하루를 보상했다.
땀냄새가 잔뜩 베인 옷을 화장실 앞에 아무렇게나 벗어놓고 거울을 보았다. 정말 오랜 수감생활 끝에 나온 듯한 몰골로 서 있는, 표정 없는 자신의 모습에서 자꾸 고등학교 때 모습이 떠올랐다. 샤워 부스로 들어가 온수를 틀었다. 콸콸 터져 나오는 온수를 온몸으로 맞으며 흘러 내려가는 물처럼, 내 몸에 덕지덕지 붙은 과거의 흔적도 깨끗이 씻겨져 내려가길 빌었다. 눈을 지그시 감고 쏟아지는 따뜻한 물에 몸과 정신을 맡겼고, 수증기가 화장실을 가득 채운 것처럼 그때 생각이 한가득 메웠다. 졸업식에 친구가 없는 모습을 들킬까 봐, 하나뿐인 딸의 졸업식에 부모님의 축하를 한사코 거절했던 지난날부터 대학교에서도 온전한 관계를 맺지 못한 현재 모습까지.
‘탁’
살짝 눈꺼풀을 들어 잦아드는 물줄기를 보며 수건을 집어 들었다. 머리카락을 탈탈 털고,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화장대 앞으로 걸어가 로션을 바른 후, 드라이기로 머리카락을 말렸다. 향긋한 샴푸 냄새와 개운한 상태임에도 여전히 표정 없는 얼굴을 보고 ‘그때 내 얼굴도 이랬나, 언제부터 난 표정을 잃었지’의 문이 들었다. 손가락으로 얼굴을 더듬다가 문득 내 뒤에 있는 책장 제일 하단에 꽂아놓은 고등학교 졸업 앨범에 눈길이 갔다.
‘제4회 동백고등학교 졸업 앨범’
졸업식날 이후로 처음 꺼내는 앨범에는 먼지가 잔뜩 쌓였다.
‘3학년 5반… 3학년 5반…’
찾았다.
장미꽃을 입에 물고 윙크를 하거나, 브이 포즈를 하며 활짝 웃는 애들이 많은 반면, 딱딱한 얼굴로 카메라 렌즈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는 어린 나를 단번에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옆에 보이는 주영과 친구들의 얼굴도 눈에 들어왔다. 이미지 사진과는 또 다른 모습. 나와 ‘친구’였을 때 얼굴과 나와 ‘친구가 아닐 때’ 얼굴은 사뭇 달랐다. 그때와 같은 하얀 얼굴과 검은 눈, 빨간 입술은 변하지 않았지만 다르게 본 건, 아마 내 시선이었을 것이다. 내 시선 끝에 넌 어떤 모습이었는지 다시 생생하게 재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