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온한 사과3

깨달음은 생각보다 멀지 않은 곳에 있다.

by 희블리

싱크대 하수구에 커피를 부었다. 이대로 과거의 기억이 오늘을 집어삼킬 것 같은 불길한 기운이 들어 코트를 집어 들고 밖으로 나왔다. 유독 하늘이 높았고 선선한 바람이 뺨을 스쳤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무작정 걸었다. 처음엔 아는 길로, 그다음부턴 낯선 길로. 반짝이는 휴대폰 화면을 보니 누군가가 내게 보낸 메신저 알림이 떴고, 그 뒤로 내가 좋아하는 만화 의 얼굴이 보였다.


스누피가 매번 작성하는 첫 문장, ‘풍우가 몰아치는 밤이었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건 스누피가 아니라 나였다. 매일 밤, 해가 뜨는 것이 무서웠고 매년 관계를 맺는 것이 두려웠다. 간혹 어느 고등학교 나왔어요?라는 질문에 정확한 학교명이 아니라 ‘아 그냥 집 주변에 있는 학교였어요.’라는 동문서답을 하기 시작했고 어쩌다 학교명을 이야기했을 때, ‘어! 거기 내 친구 다녔는데!’라는 말이 돌아오면 ‘설마 내 얘기를 물어볼까? 내 얘기를 알까? 내가 이간질을 하고 다녔다는 그 말을 듣게 될까?’와 같은 불안감에 심박수가 올라가고 이명이 들리면서 급격한 긴장감에 온 몸이 뻣뻣해졌다.


성인이 된 후에 그때 일을 생각하면, 내 단단한 방패막은 단 하나였다.


‘인복’


그저 내가 인복이 없어서 그런 애들을 만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나를 포근하게 감싸줬던 단단하고 견고한 내 방패막에 미세한 금이 생겼다. 대학교에서 처음 만난 동기들,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만난 사람들에게서 ‘나 고등학교 다닐 때 이런 애가 있었다.’와 같은 류의 이야기를 가끔 들을 때였다. 그 이상한 행동이 나와 비슷하게 느껴질 때마다 심장이 뒤틀리고 숨 쉬는 방법을 잊은 것처럼 호흡이 모자랐다. 그리고 뒤에 따라오는 사람들의 대답은 항상 비슷했다.


‘뭐 그런 애가 다 있대?’
‘진짜 한심하다.’


비로소 나는 어려서라는 핑계가 통하지 않는 나이가 되었다. 그리고 이젠 그 방패막을 사용하기엔 나를 객관적으로 볼 시선이 기어코 생겨버렸다. 그땐 보이지 않았고, 지금은 보이는 그것. 그동안 들어갈 용기가 없어 닫아버렸던, 먼지 쌓인 진실의 방 문고리를 잡았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거침없이 앞으로 뻗었던 걸음이 멈췄고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천천히 골랐다.


그날, 난 처음으로 ‘나’를 직면했고, 그날은 특별할 것 없는, 어제처럼 미세먼지 농도가 나쁨인 날이었다. 그리고 그때 했었어야 했던 그 말을 처음으로 내뱉었다.

‘있잖아, 난… 또 버림받을까 봐… 그게 무서워서 그랬어.”

그리고 비로소 독방을 나갈 문고리를 움켜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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