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역에도 서사는 존재한다.
“주영쓰~ 밥 먹으러 가자.”
“오늘 점심 뭐 나와?”
“오늘 노맛. 형광펜으로 그은 거 하나도 없어.”
“젤 아이라이너 있는 사람~ 나 빌려줄 사람~”
선생님이 나가자마자 금세 소란스러워진 점심시간은 가장 두려운 시간이자 가장 편안한 시간이다. 점심시간은나의 상황과 처지를 단번에 파악하기 쉬운 시간이었고, 아이러니하게도 신경 쓸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점에서 편안한 시간이었다. 오늘도 아무것도 들리지 않은 사람처럼 귀에 이어폰을 끼고 영어 단어장을 꺼냈다. 음악을 재생하기 전, 귓가에 파고든 음성을 미처 피하지 못했다.
“아, 되게 짜증 나네.”
“야 참아, 꼴 보기 싫으면 내가 쳐줄까?”
“됐어, 어디 가서 자기 잘못만 쏙 빼고 말하겠지, 쟤 특기잖아.”
“뻔뻔한 걸로 대학 갔으면 서울대 수석감 아님?”
“밥이나 먹자, 얼굴 보면 식욕 떨어질 것 같음~”
‘그 아이’와 다른 아이들은 교실 불을 끄고 나갔다. 맞다. 맞는 말이었다. 스스로 인정하고 수긍하는 말임에도 손끝이 떨리고 마른침을 삼켰다. 나는 복도로 나가는 발소리가 교실에서 멀어질 때까지 단어장에 시선을 고정했다가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아무도 없었다.
“그래, 나중에 한번 보자. 나 전화 들어온다. 먼저 끊을게.”
사람은 여러 가지의 페르소나를 갖고 있다. 공사를 구분하는 태도도 페르소나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래서 관계는 다양한 색깔과 모양으로 우리 곁에 도사리고 있다. 어떤 관계는 각지고 모나서 상처를 내는데, 이러한 관계는 날이 닳아 없어질 정도로 표피 속 신경이 모두 끊어내서 통각을 느낄 수 없게 된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또 어떤 관계는 너무 크고 무거워서 질질 끌려가기도, 무리해서 끌고 가기도 한다. 그중 지영과의 관계는 뭐랄까, 조금 어렵다. 어떤 모양인지, 질감인지, 색깔인지 가늠이 가지 않는다. 그래서 여전히 지영과 통화를 하면 긴장감을 숨길 수 없고 고작 몇 분 대화하는 사이에 몰래 몸집을 키운 피로감이 삽시간에 덮친다. 아마 은연중에 ‘그 이름’이 들릴까 봐, 그래서 내가 또 다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이젠 달래줄 방법을 정말 모르겠어서 더 다치는 것이 몸서리칠 만큼 무서워 피하고 싶었다.
눈을 지그시 감고, 크게 숨을 내쉬었다.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둘러보니 친숙한 우리 집 거실이 눈에 들어왔고 나는 식탁 근처에 서 있었다. 커피를 끓이는 중이었다는 것까지 기억해낸 나는 바로 커피잔을 만졌다.
“아... 식었네.”
차갑게 식은 커피의 수면에 비친 무표정한 얼굴을 보니 무의식의 밑으로 가라앉은 기억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바람결에 따라 흔들리는 커튼과 텅 빈 교실이 주는 편안함은 아마 ‘아무도’ 없는 빈 공간 특유의 안정감이 주는 선물이다. 1교시부터 4교시까지 사용된 칠판은 아무리 지우개로 지워봐도 본연의 초록색으로 돌아올 수 없었고, 흩날리는 분필 가루와 먼지는 서로 뒤섞여 공중에 떠다녔다. 쾌적할 리 없는 공기와 깨끗할 수 없는 환경 속에서 나는 주위를 둘러본 후 아침에 엄마가 손에 꼭 쥐여준 묵직한 봉지를 꺼냈다.
“희주야, 어제 엄마가 팔고 남은 빵 싸온 거야. 친구들이랑 나눠 먹어.”
요새 친구들이랑 안 노느냐고 물어보던 엄마의 의심이 확신으로 바뀔까 봐, 얼른 빵 봉지를 받아 들었다.
“뭘 이런 걸 가져왔어. 무겁게. 손목도 아프다면서… 고마워 엄마.”
씩씩하게 나선 발걸음이 점점 무거워지더니, 이내 멈춰 서서 빵 봉지를 가방에 쑤셔 넣고 학교로 향했다. 혹시라도 내 손에 들린 빵 봉지를 보고 ‘같이 먹을 사람도 없는데 왜 갖고 왔냐’ 혹은 ‘빵으로 환심 사려고 난리 친다.’와 같은 말을 들을까 봐 겁이 난 나는 빵 봉지를 필사적으로 숨겼고 어느 때보다 긴장한 얼굴로 교실문을 들어섰다.
혼자 교실에 남겨진 점심시간에 빵 봉지를 가방에서 꺼냈다. 그리고 남긴 빵을 보며 딸의 교우관계를 걱정할 엄마가 걱정되어 입 속으로 욱여넣었다. 목이 막힐까 봐 우유까지 같이 넣어준 엄마는 아마도 빵을 뇌물로 우리 딸을 잘 부탁한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을 것이다. 계속 우유를 마셔도 자꾸만 목이 매어왔다. 토할 때까지 입 속으로 빵을 구겨 넣었다. 마지막 빵을 집어 드는 순간, 작은 메모지 하나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허리를 숙여 메모지를 주운 손이 떨려왔다.
‘희주야, 친구들이랑 점심 맛있게 먹어.’
어쩌면, 엄마는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정말 어쩌면 엄마는 소질 없는 내 거짓말과 연기에 속아주는 연기를 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낯익은 엄마의 필체를 보며 집에 가서 ‘엄마, 애들이 빵 잘 먹었대. 정말 감사하대.’라고 전할 말이 어색하지 않도록 입 밖으로 수없이 되뇌며 학교가 끝나기를 빌고 또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