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온한 사과2

현재와 과거, 한 끗차이

by 희블리

한 민족의 돌림노래가 있고, 한 가족에도 돌림자가 있다. 그리고 이 한 반에도 돌림따가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서열이 존재했고 암묵적인 동의 하에 그 서열은 유지되었다. 학기 초에 형성된 무리와 그 무리 안에 존재하는 서열에 익숙해지지 못하거나 혹은 피라미드 꼭대기에 위치한 그 아이, 브라만의 심기를 거스른다면 가차 없이 불가촉천민으로 전락해버린다. 나는 그 브라만의 충직한 신하이자 친절한 하인으로 불가촉천민을 업신여기는 데 일조했고, 그에게 버림받지 않기 위해 더욱 과장된 말투와 행동으로 조소했다.


“주영아, 이거 이번에 새로 나온 패딩 아니야? 엄청 예쁘다!”

“이거 아이돌 지니가 입은 거잖아, 존예다.”

“개비싸지 않아? 역시 주영쓰!”


유명 연예인이 광고해 SNS에서 유명하고 값비싼 옷을 입고 나타난 주영은 자신을 좇는 수십 개의 눈들을 즐기듯 서있었다. 그런 주영의 눈은 정확히 누군가의 등에 꽂혔다.


“비싸긴 한데, 비싼 이유가 있더라고. 어디에든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니까.”

의미심장한 마지막 말에 주영의 옆에 있던 다른 아이들도 꼿꼿하게 앉아있는 누군가를 쳐다봤다.

“그렇지, 괜히 그러겠어?”

“어디서든 입 털고 다니는 애들이 문제지.”

“극혐”


자신을 향한 말임을 알지만 나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영어 단어장에만 시선을 내린 채 옆머리로 얼굴을 가렸다. 얼른 1교시를 시작하는 종이 울려서 선생님이 들어오고 내게 날아든 날 선 시선들이 흩어지길 간절히 바랬다.


왕따, 집단 따돌림을 당하면 교실과 환경은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시선으로 재해석된다. 그래서 나는 그 시절 내내 맨 뒷자리 혹은 맨 앞자리를 선호했는데 이유는 간단했다. 맨 뒷자리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자리였고 맨 앞자리는 눈을 둘 곳이 칠판뿐이라 시선 처리를 하기 용이했기 때문이다.


‘탁’


제 몫을 다 한 커피포트에서 피어 오른 연기가 넓은 무대에서 홀로 춤을 추듯 공간을 메우자,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갔던 내 정신도 포트 소리에 깨어났다. 학교를 졸업한 지 8년이나 넘었지만 지치지도 않는지 여전히 날 따라다니며 괴롭히는 그 기억들은 아직 내가 받고 있는 형벌인가 보다. 어쩜 이리 지독한지.


월세를 올리겠다는 집주인과 끝끝내 협상을 하지 못한 채, 지금보다 저렴한 월세방을 알아보기 위해 며칠을 발품 팔았다. 겨우 얻은 전셋집에 이사 갈 준비를 하기 위해 먹다 남은 삼각김밥을 식탁에 올려놓으며 짐을 조금씩 정리했다. 머릿속으론 얼마큼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는지 고민하면서 한참 계산기를 두들기고 있었고, 양손은 버릴 책을 상자에 담으며 바쁘게 움직였다. 한쪽 귀퉁이에 모아둔 교과서들도 상자에 옮겨 담다가 한 장의 사진이 떨어졌다. 친구들과 교복을 입고 찍은 우정 이미지 사진 한 장에 그동안 잊으려고 몸부림쳤던 얼굴들이 하나씩 눈에 들어왔다. 촌스러운 일자 앞머리에 하얀 얼굴, 검은 두 눈, 빨간 입술. 모두가 똑같은 화장법과 웃고 있는 얼굴들. 자세히 보니 우린 정말 어렸다. 멍하니 사진을 보던 중 책상을 울리는 진동에 휴대폰을 쳐다봤다. ‘오지영’ 3글자를 보자마자 피식 마른 웃음이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어, 왜?”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툭 묻자 잔뜩 성이 난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돌아왔다.

“왜긴! 사건·사고 없으면 전화도 못하냐! 뭐 하고 있어?”

“뭐 하긴. 커피 끓이려고 포트에 물 올려놨지.”

믹스 커피를 담은 컵에 뜨거운 물을 붓자 원두와 프림이 녹으면서 특유의 달콤한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왜, 무슨 일 있어?”

“아니, 어제 완전 대박인 얘기를 들었거든? 주영이 기억나지?”



또 불안정하게 뛰는 심장을 부여잡았다. 그리고 3초간 ‘어떻게 그 이름을 잊을 수 있을까’ 속으로 자조적인 웃음을 흘리며 애써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럼, 기억하지. 근데 왜?”


“글쎄 내가 어제 걔랑 만났는데 이젠 너랑 아무렇지 않게 술 한잔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거야~ 그래서 내가 냉큼 희주한테 물어보겠다고 했지.”


아무 일도 아니란 듯이 말하는 지영의 모습에 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그리고 너랑 아린이랑 친한 거, 모르고 있었더라? 너한테 친구가 하나도 없다고 생각했나 봐.”


혼자서 차가워질 수밖에 없었던 내게, 내 존재를 ‘그 잘못’, 하나로 온전히 평가하지 않고 다가와준 아린이의 이름이 들리자 비로소 숨통이 트였다. 서로의 안부를 묻고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고, 공감하며 웃고, 그러다가 다음에 만날 약속을 기약하며 마무리하는, 지극히도 평범한 이 통화가 힘든 건 아마도.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여전히 아마도 순간적으로 튀어 오른 이름 때문일 것이다. 이걸 이름 탓이라고 할 수 있을까?


오랜만에 듣는 그 이름에 다시 그 교실 안으로 들어간 듯한 착각이 들었다. 사물함이 닫히는 소리, 의자 끄는 소리,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뒤섞인 소음과 익숙한 공기, 그리고 낯선 시선들이 교차한 이 곳에서 나는 혼자였던 그 끔찍한 독방에 죄수 번호를 달고 들어간 기분에 사로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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