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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nest Nov 27. 2023

하룻밤 새에 든 생각들

우도에 갇혀 보낸 하루

제주도. 내가 가장 사랑하는 공간인 그곳에 나흘 동안 다녀왔다. 지난 봄에 제주도에 다녀오면서 이제는 웬만한 곳은 거의 가 보았다는 생각을 했다. 하루는 한라산을 간다 치고, 남은 시간은 어떻게 보낸담. 고민하다가 선택한 행선지가 우도였다. 물론 우도도 가 보았다. 지난 2016년 설 연휴에. 그래도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흘렀고, 지금쯤 다시 한번 가 봐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냉담자이긴 하지만 이래 봬도 천주교 신자다. 새로 생겼다는 우도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우도봉에도 올라가고, 우도를 한 바퀴 돌면 하루 일정으로는 충분하겠단 생각이 들었다. 처음 생각은 그랬다. 누구나 다 생각이 있다. 새로운 상황에 맞닥뜨리기 전까지는.




가장 중요한 일정은 한라산 등정이었다. 그게 3박 4일 일정의 메인 이벤트이기도 했고. 오래전부터 일기예보를 예의주시하면서 가장 좋은 날씨에 한라산 등반을 잡았다. 이게 문제였다. 덕분에 우도는 도착 첫날 들어가게 되었는데 바람이 심상치 않았다. 실은 일기예보에도 그렇게 나왔었다. 이걸 어쩌나. 숙소를 우도 안에다 예약해 놓았는데. 물론 새로 숙소를 잡는 방법도 있다. 평일이었으니 그렇게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나란 사람의 독특한 특성이 하나 나온다. 나는 계획에서 어긋나는 걸 무척 싫어한다. 그리고 의외로 내가 세운 계획에 대해서는 무대책인 면이 있다. '결국에는 계획대로 될 거야'라는 말도 안 되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성산항에 도착해서 우도로 향하는 배표를 끊는데 '내일 못 나오실 수도 있어요. 그런데 괜찮아요?' 하고 묻는다. 잠깐 움찔했다. 확실히 못 나온다면 아마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글쎄요. 내일 아침 되어 봐야 알아요. 내일 아침에 확인해 보세요' 바람이 많이 불기는 한다. 이런 바람 속에도 배가 뜨는데 설마 뭐 내일 아침이라고 얼마나 다르겠는가. 여기에서 나의 말도 안 되는 믿음이 사고를 쳤다. 그렇게 나는 우도로 들어갔다.


평일 마지막배를 타고 들어간 우도는 썰렁했다. 실은 배에도 승객이 나를 포함해 3명밖에 없었다. (차를 타고 배에 오른 승객 제외) 예전에 우도에 갈 때는 배가 시끌벅적했던 기억이 있던 까닭에 '뭔가 잘못되었는데' 하는 생각이 없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이 또 어느 때인가. 5시면 깜깜해지는 11월 말이 아니던가. 우도에 도착했더니 이미 어스름하게 저녁이 가까워져 오고 있었다. 뭔가 불안했다. 그랬다. 나는 잘못 온 것이었다.




도착한 게스트하우스는 무척 조용했다. 사람들의 후기를 보았을 때는 사람도 많고 시끌벅적한 것 같았는데. 내가 입실한 게 6시 정도였다. 사위(四圍)가 고요했다. 바람소리만 엄청 크게 들렸다. 그 바람소리는 오히려 공포심을 자아냈다. 나는 지금 와야 할 곳에 잘 온 건가. 뭔가가 잘못되어도 잘못되었음이 틀림없었다. 6시부터 8시까지 휴대전화를 만지작만지작하면서, 가져간 주간지를 보면서 내내 로비(? 게스트하우스니깐 식당이라고 해야 하려나)에 머물렀다. 고양이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았다. 결국 방으로 돌아가서 씻고 잘 준비를 했다. 그때부터는 조금 실감이 났다. 아, 나는 오늘 이곳에 혼자 있구나. 그런데 그건 몰랐다.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사장님을 뵙고 알게 된 건데 실은 나는 그 게스트하우스 전체에 혼자 묵었다. (사장님도 번거로우셨을텐데 차라리 일찍 연락 주셨으면 숙소를 취소하는 건데...)


원래 휴대전화를 달고 살긴 하지만 기상청 홈페이지에 그렇게 끊이지 않고 접속하기는 난생 처음이었다. 내일 배로 꼭 나가고 싶었다. 우도 여행 계획이고 뭐고 일단 육지로 돌아가고 싶었다.(여기에서의 육지는 제주도 본섬이다.) 갇힌다고 해 봤자 하루이틀일 것이었다. 그리고 태풍이 온 것도 아니었기에 정말 응급한 상황이 생기면 나갈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왜인지 모르게 섬에 갇혔다는 데서 오는 외로움과 두려움이 있었다. 아마 그 게스트하우스에서 컴퓨터를 쓸 수 있었다면 브런치에 엄청난 명작을 남길 수도 있었을텐데. 일단은 이 고립감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들려오는 소식은 오히려 다 부정적인 것들뿐이었다. 풍랑주의보가 밤부터 발효되었고, 강풍주의보도 발효 예정이었다. 그러더니 결국에는 자정을 넘어서 발효되었다. 둘 중 하나만 있어도 배가 안 뜰 수도 있는데 그래도 하나만 발효되었을 때는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가져볼 수 있었다. 그런데 둘 다 발효되다니. 나는 여지없이 이곳에 갇힌 것이었다.




냉정하게 생각해 보았다.


하루종일 있는다고 해서 못 지낼 곳도 아니었다. 가 볼 곳이 많았고 충분히 좋은 여행지였다. 숙소도 넘쳤기에 오늘 머문 곳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내일은 또 다른 곳에 머물 수도 있었다. 일기예보를 보니 하루만 버티면 배는 뜰 것 같았다. 물론 모레 새벽까지도 풍랑이 좀 거세 보이긴 했다. 그렇지만 이틀을 갇힌다 쳐도 글피에는 무조건 나갈 수 있을 것이었다. 예보상으로 글피의 바다는 호수와도 같았다. 어차피 비행기는 글피에 타는 것이었다. 물론 이미 정해 놓은 숙소들에 예약한 돈을 날릴 수도 있단 위험이 있지만, 섬에 갇혔다는데 설마 환불을 안 해 주겠는가. 심지어 글피에 간다는 건 최악의 상황이고 모레면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 고작 하루 못 버틴단 말인가.


어차피 관광 온 처지였다. 관광지만 달라질 뿐인 거다. 이게 뭐 그렇게 대수라고. 우도 안에 식당도 많고 해 볼 만한 것도 많았다. 첫날은 섬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숙소로 온 터라 아무것도 구경하지 못했다. 갇힌다 쳐도 다음 날 우도 관광을 하고 모레 아침 첫 배로 나가면 된다.


도대체 뭐가 문젠데?




그런데 안타깝게도 나란 사람은 이런 상황에서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 못 되었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어차피 내가 바람을 멈추게 할 수 있는 힘이 있는 것도 아니고(제발 있었으면), 나는 주어진 환경을 그냥 받아들여야 하는 일개 필부에 불과했다. 내가 기상청 홈페이지에 접속한다고 풍랑이 약해질 것도 아니고, 풍랑이 약해지기는커녕 발표할 풍랑주의보나 강풍주의보다 취소될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렇게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 나란 사람이 이렇게 별로인 사람이었단 말인가.


나에 대해 정말 실망할 만한 상황이었지만 벌써 나도 불혹도 지났고 그냥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 나는 그냥 이런 사람이구나. 이런 돌발 상황에서 어쩔 줄 몰라 하고, 불안해하는 사람이구나.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쉬어 보았지만 별로 달라지는 건 없었다. 난 그냥 이 정도의 인물일 뿐이었던 거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런 상황에서 나는 나를 무척 바꾸고 싶어 했다. 그렇지 않은가. 누가 봐도 의연한 사람이 멋지고 대단해 보인다. 그런데 난 그런 사람이 아니니 그렇게 되고 싶었던 거다. 그런데 이제 깨달았다. 난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못 되었다. 특히 한 해, 두 해 나이를 먹으면서 뭔가에 더 두려움을 느끼고 겁을 먹게 되었다. 어쩌겠는가. 그게 나인 것을.


내가 이런 사람인 걸 알았으니 앞으로는 이런 상황에 처하는 것을 피하면 된다. 비겁한 것 같지만 그게 나의 깨달음이었다. 어떻게 모든 어려움에 직면해서 그걸 이겨 내고 극복할 수 있겠는가. 어려움이라고 하기도 뭣하고, 그냥 그런 상황에 처하지 않으면 된다. 그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다. 이번 일도 마찬가지였다. 대책 없이 계획대로 될 거란 생각을 하지 말고, 미리 대비만 했다면 섬에 갇히는 상황은 피할 수 있었을텐데.




그래도 한편으로는 다행인 경험이었다. 실은 신년에 제주도에 한 달 살이를 생각하고 있었다. 한적한 서귀포의 시내에서 한 달 방을 빌려 지내야지, 생각했는데 밖으로 들리는 바람소리를 접하면서, 사위의 깜깜한 어둠을 지켜보면서, 어디에서도 들리지 않는 사람소리를 그리워하면서, 서귀포의 한적한 동네에서의 한 달 살이는 다시 생각해 봐야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만약 이 날 내가 예전과 같이 우도에서 평범하고 즐거운 저녁을 보냈다면 절대 하지 못했을 생각이다. 그럼 한 달 살이 첫날 밤에 나는 무척이나 쓸쓸해 하면서 외로운 밤을 보내야 했겠지. 단 하루로 한 달을 피할 좋은 예방주사를 맞았다.


그간 나는 제주도가 너무 좋았다. 날씨, 바람 등등 제주도의 단점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나도 다 겪어 보았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곳이 제주도라며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던 것 같다. 아마 그때의 나는 지금보다 더 젊고, 덜 외롭고, 더 용기 있고, 그리고 그 휴일을 더 소중히 여겼던 사람이 아닌가 싶다. 하나를 덧붙인다면 그때는 말도 안 탔고.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우도에 들어간 날부터 나오는 때까지 바람은 미친듯이 불었고, 햇볕은 쉽게 볼 수 없었으며, 그래서 사람도 길거리에서 쉽게 만날 수 없었다. 덕분에 나는 지독한 외로움과 쓸쓸함을 느꼈고, 나는 스스로 혼자서 충만해 질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이제는 그걸 변화시키기보다 그냥 그런 내 모습에 적응하고 살 생각이다. 덕분에 제주도에 대해서도 좀 더 객관적으로 보게 되었고, 한 달 살이 일정도 다시 고민해 볼 작정이다.


이 모든 생각들이 그 지난 하루에 다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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