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살다 보니 나라에 고마운 일이 다 생긴다. 건강검진에서 불혹은 첫 번째 생애전환기이다. 그래서 위암 검진을 위해 위 내시경이 적극 권장되고, 위 내시경 검사 비용의 90%까지 나라에서 지원된다.
놀랍게도 나는 태어나서 내시경 검사를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다. 지난 수요일에 병원에 가서 처음으로 위 내시경을 해 보았는데, 병원에서도 놀랐다. 요즘 이 나이가 되도록 내시경 한 번 안 해 본 사람이 흔치 않은 탓이다. 주위에 큰 회사에 다니는 친구들 같은 경우에는 사무직이라고 하더라도 일찍부터 온갖 검사를 다 해 준다. 벌써 대장내시경까지 여러 차례 받아 본 친구도 많다. 나도 첫 회사에 계속 다녔다면 어땠을지 모르겠다. 생기지 않을 일은 고민하지 말아야지.
내시경 검사가 끝나고 의사 선생님과 면담을 하는데 검사를 하면서 중간중간 촬영한 사진을 보여준다. 곳곳에 핏자국이 있다. 십이지장궤양이라는 태어나서 몇 번 들어본 적도 없는 병이란다.(아프니까 '병'이 맞겠지?) 조금만 더 진행되었다면 천공이 생겼을 수도 있다고, 정말 지금까지 아프지 않았냐고 묻는다. 며칠 지나는 동안 지난날을 회상해 보니 속쓰림이 조금 심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냥 으레 그러려니 했는데. 생각지도 않은 약 처방을 받고, 용종도 있다고 해서 일주일 뒤에 다시 내원해야 한다는 말도 들었다. 조직검사 결과를 보아야 한다나. 사진으로 보았을 때, 용종은 뭐 별 특이점은 없어 보였지만.
태어나서 처음 내시경한 것도 놀라운데 십이지장궤양이라니. 동네방네에 자랑했더니 다들 놀라는 반응이다. '너는 술도 잘 안 먹잖아', '너는 커피도 안 마시지 않나', 'honest가 스트레스가 심했나 보구나' 등등. 그렇다. 나는 정말 술도 안 마시고, 담배도 안 피우고, 카페인 섭취도 잘 없는데 결국 원인은 스트레스 때문이겠지. 브런치에도 많이 적었지만 요즘 별의별 일이 다 있지 않았던가. 심지어 그 와중에 회사 일마저 많아졌다.
그런데 조용히 한 번 혼자서 생각을 해 봤다. 내 인생이 정말 그렇게 스트레스가 많은 인생일까 하고. 가정이 평화롭지 못한 건 큰일은 맞는데, 단순 성격차이에서 발생한 일이지 누군가의 엄청난 과실로 인해 다툼이 온 건 아니다. 세상엔 크산티페도 있고, 때리는 남편, 의심하는 아내, 바람 난 배우자 등등 별별 사람이 다 있는데 다행히도 내게는 그런 사정은 해당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고 보면 그렇게 심각하게 스트레스를 줄 일은 아니지 싶다. (물론 그럼에도 나는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있지만)
회사에서도 사람들과 잘 못 지내고 있고, 일도 잘 풀리지 않고 있다. 그렇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렇다고 해서 당장 내가 내일 잘릴 정도로 직장에서 위태로운 건 아니지 않는가. 아니다. 도리어 회사에서 생긴 분쟁을 핑계로 내 맘대로 더 편하게 지낼 수 있게 된 측면도 있어서 꼭 나쁘지만은 않다. 이것 저것을 다 떠나서 이런 상황에서도 당장 잘릴 걱정하지 않고 지낼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복인가. 실은 회사에서 하루종일 아무 말도 못 하면서 지내는 까닭에 내가 받는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것도 별일 아니다 싶었다.
부모님이 크게 편찮으신 것도 아니고, 속 썩이는 아이가 있는 것도 아니며, 내가 어디에서 사기를 당한 것도 아니고, 큰 병이 있지도 않다. 사실 나는 지금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있지만 한 번 냉정히 따져 보니 딱히 나는 객관적으로는 그렇게 크게 스트레스를 받을 환경은 아니었던 거다. 지금뿐만이 아니다. 내 인생 자체가 그랬다. 살면서 그렇게 큰 우여곡절을 겪어 본 적이 없는 인생이었다. 물론 누구나 다 자신의 인생은 대하드라마나 대서사시 같다고 느끼고, 나 또한 마찬가지지만 브런치에다가도 적었던 것 같은데, 막상 남들에게 설명하려고 하면 정말 그럴듯하게 느껴질 만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진 못하다. 무난하다고 할 순 없겠지만, 특별할 것도 없는 인생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내가 받고 있는 스트레스가 사라지진 않겠지만 '좋은 인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크게 스트레스받을 일을 많이 겪지 않으면서 살아 왔으니 얼마나 좋은 인생인가. 물론 그 바람에 남보다 스트레스에 대한 역치가 낮아서 작은 일에도 큰 스트레스를 받고 살고 있긴 한 것 같지만, 다행히도 내가 지금 처한 환경에 대해 객관적으로 깨달을 수도 있었다. 어쩌면 그런 생각도 한다. 남들은 진작에 지금 내가 받는 스트레스는 젊었을 때 받고 졸업할 정도의 수준인데 그간 내가 너무 평온(?)하게 살아왔던 까닭에 지금 이 나이에도 고작(?) 그 정도의 스트레스로 힘들어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이렇게 점점 이런 일, 저런 일 겪어 가면서 성장하는 것일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틀린 것 같지만) 별다른 우여곡절이 없는 삶이었으면 좋겠다. 굳이 여러 스트레스를 경험하면서 큰 인물이 되기엔 이미 틀린 것 같다. 이왕 그간 좋은 인생으로 평안히 살아왔다면, 앞으로도 남들보다 비록 경험도 적고 어린 사람이 되더라도 별일 없이 무탈하게 살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부디 불혹까지 그리 살아왔으니 앞으로도 그리 살게 해 주소서. 이제 와서 남들만큼 스트레스받고 힘들어 하며 삶을 산다면 너무 힘들지 않겠나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