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onest Dec 03. 2023

제 주변에서 제일 잘 살고 계신 것 같은데요

선우예권의 피아노 연주를 듣고 나오는 길이었다. 클래식에 조예가 깊다고 할 수는 없지만, 어느 순간부터 클래식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래도 코로나 전부터였으니까 한 5~6년 정도는 된 것 같다. 아직은 조예가 깊은 정도는 아니어서 유명한 연주자, 좋아하는 곡 위주로만 찾아 듣는다. 선우예권의 피아노 연주를 들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가장 저렴한 좌석이긴 했지만 그래도 사전에 예매 일정을 미리 알아두고 서두른 덕에 가장 저렴한 좌석 가운데서는 나름대로 가장 좋은 좌석이었다. 12월은 송년이라 클래식 공연이 잦다. 어쩌면 다른 달도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내가 선호하는 공연이 연말에 더 많은 것일 수도 있다. 어쩌다 보니 그래서 올 한 해 내내 거의 찾지 못했는데 이번 달에만 세 번을 가게 되었다. 선우예권의 피아노 연주가 그 처음이었다.


얼마전에 모(母)회사의 한 직원과 처음으로 같이 점심을 먹었다. 봄쯤에 일이 같이 엮인 적이 있었는데 이제와서야 처음으로 같이 한 번 밥을 먹게 된 거다. 모회사 직원은 모회사 직원대로, 나는 나대로 각자의 직장생활에서의 힘듦과 괴로움에 대해 토로하다가 회사로 돌아오는 길에 그 직원이 의외의 말을 한마디 꺼냈다.


[그런데 제 주변에서 제일 잘 살고 계신 것 같은데요? 여기저기 놀러도 잘 다니시고, 시간도 잘 보내시는 것 같고, 사람도 많이 만나고, 부러워요. 본받아야겠다고 생각했는데요? 저는 한라산도 10년 전에 영실 코스로만 한 번 가 봤어요.]


생각지도 못한 의외의 이야기였다.


아마도 그 직원은 내가 '오늘 선우예권의 피아노 연주를 들었습니다'라고 하면 또 깜짝 놀랄 것이다. 그러면서 '역시 제 주위에서 제일 잘 살고 계신 것 같아요'라는 말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피아노 연주를 듣고 나오는 내 마음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이 쓸쓸했는데, 귓가에는 오히려 '제 주변에서 제일 잘 살고 계신 것 같아요'라는 말이 맴돌았다. 이 부조화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그러고 보니 점심을 그 직원과 먹고 저녁모임에 나가서 만난 후배에게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다. 다음 한 달 살이 지역으로 제주와 여수를 고민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꺼냈고, 여럿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예전에 내가 몽골 여행 다녀온 이야기까지 하게 되었다. 그런데 대뜸 한 후배 녀석이 '형이 정말 저보다 훨씬 재미있게 잘 살고 계신 것 같아요. 저는 지금 형이 말씀하신 데를 거의 다 한 번도 못 가 봤거나, 가 봤다고 할 수도 없는 수준' 이렇게 이야길하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 녀석에게는 예전에도 비슷한 이야길 들었던 적이 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도리어 그 후배가 부럽다. 얼굴도 상당한 미남이고, 우리나라 5대 그룹 총수와 관련된 사건을 직접 했던 적도 있다. 잘 나가는 변호사라는 뜻이다. 10위권 내의 로펌에 있다가 작년쯤 독립했는데 나름대로 자신의 사무실도 잘 꾸려 나가고 있다. 그래서 내가 이 후배를 만나면 항상 하는 말이 '사무장 시켜 줘!'이다. 정확한 후배의 벌이를 알 수 없어서 계산하기 어렵지만, 아마도 대략 내 벌이의 세 배 이상은 벌고 있지 않을까 싶다.


나는 벌이가 적다. 어제도 MBA의 한 동문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최근에 질병까지 얻은 내 건강을 염려하며 건강까지 상해 가며 다닐 직장은 아닌 것 같다는 말을 들었다. 그 정도라면 금융치료라도 되어야 할 터인데, 내가 다니고 있는 회사는 그렇지가 못하다. 물론 이렇게 저렇게 따지면 우리 나이 또래의 평균보다 더 많이 받는 것은 확실하다. 객관적인 사실마저 부정하진 않겠다. 업종이 후져서 그렇지 업종 안에서는 그렇게 못 받는 편도 아니고. 다만 이것도 또한 확실한데 내가 만나는, 내 주변 사람들 가운데에서는 가장 적게 번다는 것이다. 이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지인들 가운데 전문직만 모아도 몇 트럭만 나올 거고, 거의 다 유수의 대기업에 다니고 있다. 실은 내 지인 가운데 좋소기업에 다니는 사람은 나뿐이다.(대표 제외)


물론 벌이가 다는 아닐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았는데 내 경우엔 대신 압도적으로 시간이 많다. 여유 시간이 많다는 뜻이다. 변호사인 그 후배는 눈을 뜨는 즉시 출근이요, 눈을 감아야 퇴근이라고 했다. 내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 냉정하게 관찰해 보면 회사에서 일할 때도 개인 카톡이 일보다 더 우선이다.(아주 급할 때 제외) 그만큼 뭐 바쁜 일도 많지 않고, 넉넉한 일정 속에 살고 있다는 의미다. 다만 이런 현실에 내가 만족하며 지내는가는 별개다. 한 번 따져 보았다. 내게 시간이 이렇게나 소중한 것인지. 내가 하고 싶은 다른 일이 있고, 즐기는 취미생활이 있다거나, 너무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아마도 시간은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자산일 거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나는 위에 적어 둔 그 무엇에도 해당되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 생각을 했다. 난 시간이 좀 적어도 괜찮은데, 벌이가 더 많다면.


남들이 보기에 내 생활이 좋아 보이고, 잘 사는 것 같다면 아마도 시간 때문일 것이다. 나는 시간이 너무도 많아서 그 시간에 여행도 다니고, 이렇게 클래식 공연도 보고 한다. 물론 이 모든 걸 찾아보기 위해 노력할 만한 여유도 없다고 한다면 거짓말이다. 한 후배는 나를 '제주 전문가'라고 부르는데, 렌트며 항공권이며 항상 거의 최저가로 여행을 다녀오는 까닭이다. 최저가로 다녀오는 여행에 대해 한 선배는 자기 친구는 시간이 훨씬 소중한 가치이기 때문에 최저가를 찾아볼 시간에 그냥 더 비싼 돈을 주고 표를 산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내 삶은 그렇지가 않은 걸 어쩌나. 나는 돈은 많지 않지만 대신 시간이 많다. 당연히 시간이 많다고 다 나처럼 살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그냥 흘려 보내는 시간을 싫어하는 내 성향도 한몫하지 싶다.


최저가 비행기, 최저가 렌트, 그리고 (모텔이나 여관까지는 아니지만) 중급 정도의 호텔. 그럴듯해 보이는 클래식 공연이라 해도 저렴한 좌석을 찾는다면 경제적으로 그렇게까지 많은 부담이 되지는 않는다. 한 번 찾아보았더니 미쉐린 가이드의 별을 받은 식당 가운데 내가 가 본 곳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빕구르망이라는 가성비 식당은 매년 소개되는 집의 절반 정도는 가 본 곳이었다. 그렇게 살고 있다. 그 정도는 살 수 있으니까.




내가 정말 잘 살고 있단 이야기를 하려고 브런치를 켠 게 아니다. 선우예권의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을 들었지만 내게는 그걸 공유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옆에 앉은 관객은 무엇이 그리 급한지 연주가 되고 있는 와중에도 다른 사람과 메시지를 주고받기에 열심이던데 한편으로는 눈이 찌뿌려졌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했다. 지난 토요일에 다녀온 한라산의 설경은 정말 진국이었다. 나에게 한라산의 사진을 받은 사람이 수십 명 되었지만 실은 나는 한라산을 나 혼자가 아니라 다른 사람과 같이 오를 수 있었다면 더 좋았을테고, 힘든 여정이니 같이 오르지 못하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누군가와 같이 오르고 있다는 느낌만은 받고 싶었다. 친구도 많고 심지어 결혼도 했건만 내게는 그런 나의 마음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나 또한 나의 인생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은 인생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심지어 최근에는 회사 일로 건강까지 상했지만 이 정도의 작은 스트레스조차도 견뎌내지 못할 정도로 내가 수월한 인생을 살았던 것은 아닌가 되돌아보게 되었을 정도로. 아프지만 죽을 병은 아니고, 가정에 큰 문제가 있지만 어찌 보면 나만 겪는 문제도 아니고 누군가가 경제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엄청난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니고 보면 다 못 겪을 일도 아니란 생각을 한다. 브런치에도 적었듯 어찌 보면 참 좋은 인생이다.


좋은 인생


그러나 어쩌겠는가. 다른 사람보다 훨씬 예민한 사람으로 태어난 것을. 좋은 풍경을 보고, 좋은 연주를 들었을 때 느껴지는 환희도 물론 있지만, 그 속에 나만 있다는 것을 느꼈을 때의 고립감을 남보다 훨씬 더 깊이 느끼는 사람인 것을. 오죽하면 그래서 후배가 '오빠는 그러니까, 너무 섬세해서요.'라고 거절할 수밖에 없었던 이야기를 꺼냈겠는가.


오빠는 그러니까 너무 섬세해서요


잘 살고 있는 것 같지만 잘 살고 있지 않다. 어쩌면 겉으로 보기에 멀쩡해 보이지만 마음은 다 병들었는지도 모른다. 제주도에 가지 않아도 되고, 클래식 연주를 듣지 않아도 괜찮다. 이 모든 특별한 이벤트보다 나는 실은 아주 작은 일상을 공유할 수 있는 벗이 내겐 훨씬 소중하다. 배우자이든 진정한 친구든 한 사람만이라도 그 사람을 진짜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삶은 외롭지 않고, 성공한 것이라는 옛말은 결코 틀리지 않다. 어쩌면 그런 사람을 가진 사람이 많지 않은지도 모르겠지만 그래서 내 인생도 아직 성공했다고, 좋은 인생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때는 아닌 것 같다. 물론 너는 다른 사람에게 그런 사람이 되었느냐고 묻는다면 나 또한 아직 거기에 '그랬다'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는 없다는 것도 문제겠지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