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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nest Feb 08. 2024

홀로서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이혼도 쉽지 않습니다 11

삶에서 이렇게 힘든 시간을 보낸 적이 얼마나 있었는지 헤아려 본다. 거의, 아니 아예 없었던 것 같다. 천만다행으로 나는 살면서 가까운 가족의 사고나 죽음을 경험해 볼 일이 없었다. 부부상담을 받으면서 과제로 제시받았던 '상실감'에 대한 에세이에 군대에서 선후임들과 헤어졌을 때의 아픔을 겪은 것을 보면 정말 내 삶이 얼마나 순탄했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물론 한때 사랑했던 사람과의 이별조차 겪어 보지 못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연애 경험이 많지도 않았을 뿐더러, 한때 사랑했던 사람이라고 해도 그들이 내 가족이 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지금의 이별은 아내와의 이별이기도 하지만 처가의 장인어른 장모님, 처남,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아끼는 처조카와의 이별이기도 하여 더 힘든 것 같다.


지난 사흘을 어떻게 보냈는지 떠올려 보면 너무나도 힘들어서 어떻게 시간을 보냈는지조차 모르겠다. 그래도 가까운 사람들의 도움과 상담으로 꾸역꾸역 하루하루를 버티긴 했다. 월요일엔 후배가 시간이 된다고 해서 갑작스레 시내에 나가서 같이 점심을 먹고는 자살예방센터에 전화해서 응급상담을 받았다. 그래도 한 시간 동안 상담받으며 눈물도 흘리고 이야기도 하고 나니 조금 나아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화요일엔 오후에 운동을 갔다가 와서 혼자 살 집을 구경하러 갔다. 이것이 문제였다. 화요일에 보러 간 집은 결혼 전에 동생과 함께 살았던 아파트였다. 그때 그 집을 구경하러 왔을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었는데, 결혼 전에 살았던 아파트에 이혼으로 실패해서 혼자 돌아온다고 생각하니 단지와 집을 돌아보는 내내 그렇게 울적할 수가 없었다. 어쩌다 나는 이렇게 된 것인가. 그날의 우울함은 정말 이루 말로 다할 수가 없었다. 사실 그 단지는 여러모로 장점이 있는 단지다. 회사에서도 가깝고 가격도 알아본 곳 중에 가장 착했다. 동생과 이사했을 때보다 10년 가까이 지났기 때문에 대체로 집들도 수리가 되어 있었고 동네도 익숙했다. 너무 번잡하지도, 너무 조용하지도 않아서 아마 혼자 살기 나쁘지 않을 것이었다. 그런데 기분이 너무 우울했다. 동생은 집은 그냥 집일 뿐인데 의미를 부여하지 말라고 하는데 나는 그게 되지 않는데 어쩌란 말인가. 그리고 나서 저녁에는 또 기다렸던 개인상담을 받았다. 어느덧 상담도 5회차에 접어들었다. 다음 주가 마지막이다. 혹시 회기를 연장할 수 있겠냐고 여쭤 보았는데 결과가 어찌될지는 모르겠다. 그래도 지금 상담을 받는 게 정말 큰 도움이 되고 있는데.


가장 힘들었던 건 어제였다. 실은 어제는 산뜻하게 출발했다. 동생이 사는 동네로 세 곳이나 집을 보러 가기로 했고 혼자 가면 너무 힘들 것 같아서 동행도 구했다. 대한민국 학문 발전에 애써야 할 서울대의 한 교수님이 어이없이 고작 내가 부동산 구경을 하는데 동행해 주기로 하셨다. 아침부터 오후까지 세 집을 보기로 한 데다 중간에 점심도 먹고 차도 마실 예정이었어서 이 날의 일정은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저녁에는 PT도 받기로 되어 있었고. 오랜만에 아침 일찍 산뜻한 기분으로 일어나서 외출 준비를 했고 운전하며 교수님을 모시러 가고 있는데 최근 자주 연락하고 지내던 카카오톡 친구분께 메시지가 왔다. 이제 더는 메시지를 주고받지 못할 것 같다고. 그 순간, 정말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살면서 느꼈던 가장 힘든 순간 가운데 한 번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사실 나는 그분의 이름도, 나이도, 어디 사는지도,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지도 하나도 모른다. 그냥 지금 나와 조금은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다는 것 정도만 알고 있다. 나를 위로하고 격려해 주는 많은 친구들이 있지만 그래도 비슷한 상황에서 그분이 전해 주는 위로와 조언이 정말 큰 힘이 되고 있었다. 덕분에 덜 쓸쓸하기도 했던 것 같고. 아무래도 이혼이라는 과정을 거치면서 이혼한 사람들에게 많은 이야기를 하게 되는데, 그러다 보면 가끔 그 사람들로부터 그 시절의 힘든 감정이 갑자기 훅 올라와서 힘들다는 말을 들을 때도 없지 않았다. 그렇게 되지 않도록 내가 조절을 했어야 하는데 내가 지금 정상이 아니다 보니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렇게 떨어져 나간 몇몇 친구의 자리를 대신해서 그분은 내게 성의껏 연락을 받아 주셨다. 그러나 나 또한 생각했다. 이 분도 혹시 힘들지 않으실지. 나로 인해 본인의 힘든 기억이 떠오르게 되면서. 충분히 그럴 법하다고 생각했고, 어찌 보면 결국 올 날이 온 것이다.


거의 실신할 정도의 충격이었고 그런 까닭에 운전하던 도중에 나가야 할 출구마저 지나쳐 버리고 말았다. 모시러 간 선배를 만나서는 차에서 내려 대성통곡을 하는 바람에 선배로부터 오늘 집을 보러 가도 되겠느냐는 걱정까지 샀다.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겠지만 그래도 이런 상황에서 혼자 있지 않고 옆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엄청난 지지가 된다. 덕분에 선배와 세 곳의 집을 돌아보고, 점심도 먹고, 차도 마시고 하면서 조금씩 차분함을 찾아갔던 것 같다. 특히 두 번째로 본 집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시야도 뻥 뚫려 있고, 집도 완전히 새 집이었다. 오피스텔에 대해 가지고 있었던 부정적인 인상이 있었는데 크게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가격이 비싸서 아마도 들어가지는 못할 것 같지만. 그래도 그렇게 마음이 트이는 집을 보았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조금 나아졌다.


나는 여전히 누군가와 함께하는 가정을 꿈꾼다. 서로 사랑을 주고받고, 대화를 나누고, 손을 잡고 길을 걷고, 애정을 주고받을 수 있는 상대가 있길 바란다. 그러나 현실은 이제 42살의 평범한 돌싱남이 되어 버렸다. 이 나이면 한 번도 결혼을 안 한 것보다 차라리 한 번 다녀온 게 낫다는 우스개도 있긴 하지만 그건 정말 우스개다. '돌싱'이라는 타이틀이 붙는 순간 사람이 위축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내가 그것을 극복할 수 있을 정도의 엄청난 매력남도 아닌 다음에야. 이런 현실을 깨우치고 나자 저녁에 PT를 받으면서는 이제 나는 남은 삶을 온전히 혼자 살아 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잘 지낼 수 있어야 하고, 혼자 시간을 잘 보낼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나 스스로와 친해져야 한다. 돌아보면 이 브런치의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통영일기]를 떠올려 보면 내가 꼭 혼자 잘 지내지 못하리란 법도 없다. 물론 그 시절엔 집에 아내가 있었기에 덕분에 거기에서 오는 편안한 마음도 없지 않았던 것 같지만, 만약 아내가 아예 없었다고 해도 그리 쓸쓸하진 않았을 것이다.


지난 며칠 사이에 약을 먹는 용량이 엄청 늘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약부터 먹는데 보름 전에 병원에 갔을 때는 호기롭게 용량을 줄여달라고 의사선생님께 말씀드렸었는데, 잘못된 판단이었다. 한때는 하루를 0.25mg, 혹은 0.5mg 정도로 버티는 날도 없지 않았는데 점점 늘어서 어느 순간부터는 지금 1.25mg을 먹고 있다. 어제 같은 경우에도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0.5mg을 먹었는데 카카오톡을 받고 나서부터는 전혀 마음의 진정이 안 되었다. 그래도 중독이나 과복용은 피하려고 해서 점심 때까지 기다렸다가 점심에 0.5mg을 다시 먹었다. 그리고 저녁 전에 0.25mg을 먹었고. 이제 좀 있으면 다시 병원에 간다. 지금 이야기한 신경안정제 외에 항우울제도 먹고 있는데, 처음엔 그것을 먹으면 약의 효과가 너무 세서 진정이 안 될 정도였는데 요즘엔 그것을 먹지 않으면 자고 일어났을 때의 불안이 너무 심해서 자기 전에 무조건 하나씩 먹고 있다. 약의 기전에 대해서도 여쭤 보고 농도도 조절해야 할 것 같다. 당장 내일부터 명절 연휴다. 아무것도 모르고 계시는 부모님 앞에서 태연한 척하는 것도 쉽지 않고, 만나는 사람 없이 집에서 시간 보내는 것도 만만치가 않을텐데 내가 잘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런 이야기까지 다 하고, 새로 약을 타야겠지.


병원을 다녀온 뒤에 운동을 한 다음에는 오늘도 새로운 집을 구경 가 보기로 했다. 마침 아예 새로 지은 오피스텔이라 내가 입주하면 첫 입주를 하게 되는 셈이다. 지금 집도 첫 입주였기 때문에 새 집이 주는 쾌적함이나 깔끔함이 선사해 주는 장점이 적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우울증을 극복하기 위해서 무조건 해가 잘 드는지를 보려고 한다. 그나마 지금 사는 집이 정남향이고 현재 내가 쓰고 있는 안방으로 해가 잘 들어서 1월 초중순에는 조금이나마 병증이 나아졌던 듯 싶다. 새로 집을 보러 갈 때도 이 점을 꼭 유념해야지. 실은 어제 보았던 오피스텔이 그래서 정말 마음에 들었었는데. 주위에 동생도 살고 있고. 그런데 동생은 내가 근처에 와서 사는 게 썩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ㅎ


이번 일을 겪고 보니 원가족과의 유대감, 거리 이런 것도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내는 원가족과의 유대감이 정말 깊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장인어른, 장모님의 말씀을 다 잘 듣는다는 것은 아니지만. 내 경우에는 부모님께 속 깊은 얘기를 하지 못한다. 아무래도 걱정하실까 봐 염려도 되고. 무엇보다 문제는 부모님이 가까이 사시지 않는다는 것. 물론 이 나이에 다시 부모님 댁으로 들어간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님을 알고 있지만, 지금 같은 비상사태(?)에는 그래도 가족과 한 집에 사는 게 조금 낫지 않을까 싶은데 결국 나는 가족에서 분리되어 혼자로 돌아가야 한다. 아마 앞으로 몇 번 반복해서 경험해야겠지만, 아내가 나가고 혼자 있는 집, 그리고 완전히 분리되어 내가 어느 집에서 홀로 맞게 될 첫날밤을 생각하면 너무나도 쓸쓸하고 공포감이 생긴다.


언젠가 더 좋은 날이 올 수도 있고, 가까운 교수님이 말씀해 주신 것처럼 그날 지금을 돌아보면 너무 부끄러워서 웃음이 나올지 어떨지 모르겠고, 더 나이가 들면 이보다 더 힘들고 어려운 일도 많이 겪으면서 살아야 할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정말 너무 힘들다. 무엇을 위해 내가 이 모든 힘들고 어려운 과정을 참고 견디며 살아야 하는 것일까. 정말 하루하루 버티다 보면 나아지기는 할런지, 친한 형은 6개월에서 1년만 버티면 된다고 하던데 정말 그때는 그렇게 괜찮아질 수 있을지 궁금하다. 근데, 1년이면 지나고 나서 생각하면 금방이지만 앞으로 버티기에는 정말 긴 시간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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