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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nest Mar 23. 2024

괜찮아진 줄로만 알았습니다

이혼도 쉽지 않습니다 19

오전엔 무려 세 시간짜리 심리검사를 했다. 나중에 내가 누리고 있는 복지혜택에 대해 한 번 정리하는 글을 올릴 생각인데 무료로 심리상담을 받을 수 있는 센터가 있다. 그런데 전화했더니, 몰랐는데 심리검사를 먼저 받아야 한다고 한다. 아마 심리검사 결과를 기초로 좀 더 밀도 있는 심리상담을 진행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전화한지는 벌써 3주쯤 되었는데 심리검사에 소요되는 시간이 3시간이라고 해서 평일에는 휴가를 쓰고 와야 했기에 가까운 주말로 날짜를 잡다 보니 오늘이 되었다. 마침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심리검사가 끝나고는 이사할 집에 가서 보일러를 좀 틀어 놓고 베이크 아웃을 한 뒤에 귀가할 작정이었기 때문이다.


주말에는 일이 없어서 평일보다 더 힘들다. 아침부터 마음이 힘들었는데 새로 이사 갈 집에 보일러를 틀고 집을 돌아보다 보니, 새로운 출발에 대한 기대라거나 새로운 환경에 대한 신선함 이런 것보다 이제 정말 부인과 떨어지게 될 날이 채 한 주도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하루하루가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너무 힘들었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그래서 집에 꼭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생각했다. 보고 싶었다. 안을 수도, 손을 잡을 수도 없는 아내이지만 그래도 아직 아내이니까. 다행히 아내는 아직 외출 전이었고 점심을 안 먹었으면 막 부쳐 놓은 전을 먹겠냐고 내게 물어봐 주었다. 항우울제를 먹고 나서 아내와 한 시간 정도 오랜만에 이야기를 나눴다.




회사를 다니면서 확실히 많이 좋아졌다. 집중할 일이 있다는 건 좋은 일이다. 물론 그 바람에 브런치에는 소홀해지고 있긴 하지만. 회사를 두 달 넘게 쉬었기 때문에 그간 지연된 일을 3월까지 마무리하느라 이번 주에는 야근도 이틀이나 했다. 만약 목요일에 협력업체에서 금요일 오전에 11시까지 일한다고 말을 해 주지 않았다면 목요일엔 몇 시에 퇴근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금요일 오전 11시까지 일한다는 그 소식이 어찌나 반갑던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8시 반을 넘어서 퇴근했다. 심지어 수요일에도 야근을 했었는데. 이렇게 말하면 남들은 웃겠지만 나는 이 회사에서 야근하는 일이 정말 드물다. 업무강도가 낮기도 하고, 내가 일을 빨리 처리하는 편이기도 하다. 그런 내가 그렇게까지 일을 할 수밖에 없었을 정도로 일이 많이 있었다. 그리고 3월엔 지출도 해야 하는데, 작년에 이어 올해에 겨우 두 번째로 해 보는 일이 있어서 조금 긴장되었다. 다행히 작년보다도 오히려 일찍 일을 모두 마감한 상태다. 물론 내일도 출근해야 하긴 하지만.


한동안 점심시간과 저녁시간이 되면 일을 하는 동안 잊고 있던 힘듦이 몰려와서 너무 힘들었는데 약 먹는 시간을 점심과 저녁 전으로 당기면서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듯 괜찮아졌었다. 얼마나 괜찮아졌는지 한때는 집으로 돌아오면서 그런 생각도 했다. '아내가 떠나긴 하지만 그냥 이 동네 계속 살았어도 괜찮았던 거 아니야?' 그런데 그런 나의 느낌은 엄청난 착각이었다. 사실 내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멀쩡하게 지내는 것은 모두 약기운 덕분이었다.


지난주 토요일은 3주일만에 병원에 가는 날이었다. 의사선생님을 만나고 상담을 받으니 약은 좀 천천히 먹어도 되지 않을까 싶었고, 진료받으며 상담을 하느라 그리고 점심을 먹느라 평소보다 약 먹는 시간이 두 시간 넘게 지체되었다. 그리고 지난주에는 오랜만에 고향집에 다녀왔다. 부모님께서 내가 걱정되는지 집에 와서 집밥 좀 먹으라고 하도 성화셨기 때문이다. 마침 어차피 이사를 해야 해서 집에 있는 짐을 좀 덜어야 하기도 했다. 아내와 찍은 결혼사진 액자와 앨범을 내가 챙기기로 했는데 이번 기회에 집에 가져다 놓아야지 싶었다.


집에 아내가 없기를 천만다행이었다. 살면서 그렇게 오열해 본 적이 몇 번이나 더 있을까 싶다. 아무도 없는 집에서 아내의 이름을 불러가며, '미안해', '내가 잘못했다'를 연신 연발하면서 결혼사진 액자와 앨범 그리고 혼인서약서와 방명록 등을 챙겼다. 바로 신경안정제를 먹었지만 괜찮아지지 않았고 눈물도 멈추지 않았다. 겨우 항우울제까지 먹고 나서야 좀 진정이 되었다. 의사선생님께서 내가 신경안정제에 대한 의존성과 내성을 염려하는 이야기를 꺼내자 3주 전에 처방하시면서 약을 항우울제로 바꾸어 주셨었다. 그러면서 신경안정제도 끼니 때만큼 챙겨 주셨었는데, 끼니 때마다 먹으라는 말이 아니라 필요하면 먹으라는 뜻이었다. '이렇게까지 약을 많이 먹을 필요가 있나' 하고 생각했는데, 역시 괜히 전문가가 아니다. 의사선생님은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서 처방을 해 주셨던 거다. 그렇게 신경안정제와 항우울제까지 모두 먹고 나니 조금 진정이 되었다. 모르겠다. 어쩌면 울 만큼 울었기 때문에 괜찮아진 것일 수도 있고.


그리고 지난주 화요일을 마지막으로 가족센터 상담이 끝나서 어제는 다른 곳에서 첫 상담을 받았다. 이번에도 역시 나는 상담을 받는다는 것을 믿고 점심 약을 거른 상태였다. 그 바람에 상담을 받으면서 다시 또 폭풍 같은 눈물을 쏟아낼 수밖에 없었다. 그랬다. 나는 회사를 다니면서 일상으로 복귀하고 괜찮아진 줄 알았었는데 모든 것은 다 착각이었다. 실은 나는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그저 약효과 덕분에 나아진 것처럼 비쳤을 뿐이었다. 두 번을 경험하고 나니 비로소 깨닫게 된다.


요즘은 약을 하루에 무려 네 번이나 먹는다. 아침약은 보통 새벽에 자다가 깼을 때 먹고(그걸 먹지 않으면 다시 잠들 수가 없다) 점심약은 점심 산책 30분쯤 전에 먹으며 퇴근 전엔 저녁약을 먹고 퇴근한다. 그리고 자기 전에 먹는 약이 있다. 불과 두 달 전까지만 해도 하루에 약을 한 번 먹었고 그조차도 안 먹고 참고 버티기도 했었다. 그런데 어느새 약을 하루에 네 번 먹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물론 덕분에 나는 겉보기엔 남들이 '얼굴 좋아 보인다', '잘 지내는 것 같아 보이네' 하는 이야기까지 들을 수 있게 되었지만. 이게 정말 잘 지내는 것일까.




좋은 생각을 긍정적인 생각을 많이 하려고 한다. 아는 형이 명상 어플 쿠폰도 선물해 주어서 요즘은 아침마다 10분 정도씩 명상도 하고 있다. 템플스테이를 다녀오면서도 느꼈지만 솔직히 명상은 큰 도움은 되지 않는다. 계속 잡념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일을 하듯 몸을 부지런히 움직이는 것이 차라리 낫다. 겨울이 아니라 도리어 지금 회사를 쉬었다면 아는 분이 운영하는 대학교 학생식당에서 하루종일 설거지를 하며 머릿속 잡념들을 지워낼 수 있었을텐데. 그런데 알고 보니 내가 겉보기에 멀쩡해 보였던 것은 모두 약 덕분이었다. 그 덕분에라도 멀쩡해 보일 수 있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싶기도 하지만서도.


한때는 1초가 10만 년 같이 느껴지던 시간이 있었다. 그런데 회사로 돌아가고 나서 일이 시간에 쫓기고, 그리고 아내와의 이별이 정말 눈앞으로 다가오자 요즘은 시간이 참 빠르게 흐르는 것을 느낀다. 시간이란 참 상대적이다. 이제 아내가 목요일에 떠나고 나면 아마도 앞으로 이혼 서류를 접수할 때, 그리고 확인받을 때 단 두 번을 제외하고는 아내를 만날 수 있는 일이 없겠지. 그런 생각을 하면 숨이 턱 막힌다.


얼굴이 좋아 보인다고요? 다행이네요. 잘 지내는 것 같아 보인다고요? 그 또한 다행입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할 수 있다는 게요. 그런데 아세요? 실은 제 속은 완전히 썩어 문드러져 있답니다. 괜찮아진 줄로만 알았는데 알고 보니 모두 착각이었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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