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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nest Apr 25. 2024

잠시 모른 척하셔도 좋습니다

벌써 26년 전의 일이다. 한 통신회사에서 "잠시 꺼두셔도 좋습니다"란 광고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 적이 있었다. 당시로서는 최고의 톱스타였던 한석규 배우가 한 스님과 함께 출연해서 대나무숲을 걸었던 풍경이 기억이 난다.


그렇게 우리 삶에는 잠시 꺼두는 것이 좋은 것처럼, 잠시 모른 척해도 좋은 일도 있지 않을까. 우리는 왜 그렇게 남의 일에 관심을 가질까. 정말 그게 애정 어린 관심일지, 나는 진심으로 궁금하다.




사람은 모두 자기가 뿌린 대로 거둔다고 부끄러운 고백부터 해야겠다. 5년쯤 전이었을까. 모(母)회사의 직원분과 대화하던 도중에 그 직원분이 갑자기 내게 '그런데 왜 honest 씨는 제가 혼자 산다고 생각하세요?' 라고 날카롭게 지적하셨다. 그 직원분은 2016년에 결혼했기 때문에 명목상으로는 아직도 신혼일 터였다. '아, 죄송합니다. 제가 잘 모르고 주제를 넘었네요' 하고 바로 식은땀을 흘리며 사과했는데 그분이 이어서 말씀하셨다. '가만 보면 늘 항상 제가 혼자 산다고 생각하고 말씀하시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궁금했어요', '아닙니다, 제가 잘 모르고 말을 함부로 했네요. 죄송합니다'


그분은 혼자 살았던 게 맞았다. 자신은 늘 내가 자신이 혼자 산다고 생각하고 이야기하는 모습에 모회사의 다른 직원으로부터 이야기를 전해 들은 건가, 생각했었다고 한다. 그분이 혼자 사는 건 모회사의 직원들에겐 비밀도 아니었다. 그날로부터 며칠 동안 그분은 혼자 살게 된 자신의 상황을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이야기해댔는지 내게 많은 뒷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심지어 어떤 직원분은 본인이 이야기하기 곤란할테니 본인이 앞장서서 소문을 내 주었다고 한다. 덕분에 모회사에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많이 없었고, 나도 그렇게 전해 들은 건가 지레짐작하고 물어보았다고 했다.


그래도 명색이 다른 회사이기도 하고 나는 그렇게 남의 사생활을 캐고 다니는 스타일도 아니라서 단언컨대 다른 사람으로부터 그분이 혼자 살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은 없었고, 또 나도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분과는 나름 가까운 사이였기 때문에 결혼 이후 몇 년의 세월을 거치면서 이런저런 대화를 하는 와중에 나름대로 그분이 혼자 산다고 판단할 만한 계기가 셀 수 없이 있었다. 나도 조심성이 없는 사람이 아닌데 단순한 추측만으로 그렇게 이야기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수십 번의 대화 속에 오가는 상황을 판단하면서 어느 정도의 확신이 쌓인 뒤에야 그렇게 말할 수 있었다.


나만의 짐작이지만 크게 기분 나빠하진 않았던 것 같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자신의 이혼 소식을 전해 들었을 거라고 판단하고 있었던 듯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곤란한 상황은 그다음에 있었다. 우리 회사의 다른 직원이 2년 조금 넘게 휴직을 하고 돌아와서 그분을 만났는데, 결혼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며 축하 인사를 전했다는 것이다. 그때는 이미 나와의 에피소드가 있고도 한참 뒤이니 이혼을 하고는 더 오랜 시간이 지난 뒤였을텐데. 내게 '그 회사 직원들은 잘 모르나 봐요' 하고 이야기하는데, 잠시 '내가 얘길해야 하는 건가?' 하는 고민을 했던 기억이 난다.(결과적으로 나는 그냥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는 쪽을 택해서 우리 회사 직원들은 그분이 아직도 결혼한 줄 알고 있다.)




얼마 전에 친한 선배가 대뜸 전화를 해 와서는 '너 이혼하냐?'는 이야기를 던졌다. 불과 한두 시간 전에 통화할 때까지도 별말 없었는데 어디에서 무슨 눈치를 챘나 싶었다. 내가 이혼하게 된 사정을 아는 전 회사의 팀장님께서 'honest는 요즘 많이 힘들어' 이런 이야기를 들은 데서 내가 이혼하게 되었다고 짐작했나 보다. 팀장님께 전화해서 뭔 얘기를 하셨냐고 추궁했더니, 자기는 그냥 네가 요즘 힘들다는 얘기밖에 안 했다고 궁색한 변명을 하셨다. 팀장님이 무슨 잘못이 있으시겠나. 세상에 비밀은 없다. 비밀이라고 이야기를 꺼낸 사람이 잘못이지. 그리고 힘들다는 이야기에서 이혼을 추론하는 것도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선배가 눈치가 빠른 것이지.


실은 나는 예전부터 선배가 눈치를 챈 것 같다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어느 날엔 갑자기 나에게 연락을 해서는 이사하는 데 얼마나 드냐고 물어보는 것 아닌가. 이번에 아내와 이혼하면서 살림을 모두 아내가 가지고 갔고, 나는 이사하는데 비용은 한 푼도 들이지 않았다. 아마 선배도 뭔가 촉이 있었을텐데 대놓고 물어볼 수는 없으니 그렇게 돌려서 물어본 거였을 거다. 나는 지지 않고 답했다. '135만 원 정도 들었어요'. 아내가 받은 이사견적이 그 가격이었다. 지금 집으로 이사올 때는 144만 원 정도 들었던 것 같은데 뭐 크게 다른 범위에 있는 게 아니니 적당히 잘 눙쳤다고 여겼다. 이사 계획도 없는 선배가 이사 비용을 묻는 데서 뭔가 싸한- 느낌이 있었고 조심해야지, 생각하고 있었다.


어떤 경로를 통해서 선배가 내가 이혼하게 되었을 거라는 결론에 이르렀는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나름대로 조심한다고 했지만 아무래도 자주 연락하는 사이다 보니 이런저런 정보에서 눈치를 챘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내 경우에는 선배가 확신했다기보다는 조금 넘겨 짚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아니면 정말 눈치가 빠른 사람이거나. 그런데... 정말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면 상대가 오히려 그 사실을 말해 줄 때까지 기다렸어야 하는 것 아닐까. 내가 이혼하게 되었다고 해서 특별히 엄청난 도움을 줄 것도 아니라면.(그러고 보니 위에 적은 내 이야기를 다시 돌아보게 된다. 그래도 그때 나는 그분께 유능한 변호사는 소개해 드릴 계획은 가지고 있었는데.)




나는 내 이야기를 여기저기 흘리고 다니는 편이고, 힘든 걸 하소연하면서 푸는 편이어서 사실 내 이혼 이야기는 비밀이라고 할 것은 못 된다.(당장 이 브런치를 봐라. 물론 나는 지인들에게는 그 누구에게도 이 브런치를 오픈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내 기준에서 말을 해도 될 사람과 하지 말아야 할 사람을 가려서 하고 있고, 내 딴에는 상당히 치밀하게 막는다고 막고 있다. 이사 간 동네만 해도 그렇다. 회사에서도 먼 생뚱맞은 동네로 이사했는데 그 선배에게도 이야기했었고, 회사 동료들에게도 이야기했지만 지금 이사 간 동네는 아내의 직장과 내가 다니는 회사의 중간 정도가 된다. 나름대로 아내의 직장까지의 시간과 거리를 고려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고 처음부터 집을 보러 다닐 때도 그게 하나의 고려 요소였다.(물론 그때는 아내가 마지막까지 마음을 돌릴 지도 모른다는 희망도 있었기 때문에 그랬다.)


엄청나게 치밀하게 행동하고 있다. 우리 회사는 가족수당이 있다. 큰 액수는 아니지만. 이혼을 했으면서도 가족수당을 계속 받는 건 어찌 보면 급여 도둑질이나 마찬가지라서 해고 사유에도 들지 모른다. 그래서 아내와 이혼 이야기가 나왔을 때부터 아내가 다른 회사로 이직할 수도 있고, 그쪽에서 가족수당을 받게 되면 나는 아마도 가족수당을 받지 않아야 할 것 같다고 급여 담당자에게 미리 귀띰을 해 두었다. 한 번만 이야기한 건 아니라서 졸지에 급여 담당자로부터 아내가 좋은 데로 이직한다고 축하까지 받고 있다. 실제로 아내와 서류상으로도 이혼을 하게 되면 그때 회사에다가는 아내가 이직했다고 하고 가족수당을 지급하지 말아 달라고 이야기할 작정이다.(이렇게까지 치밀하게 하고 있는데...)


나처럼 좋소기업에 다니고 있는 아내 또한 회사 직원 그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앞으로도 이야기하지 않을 거라고 하고. 아무래도 다녀온 사람에 대한 편견이 남자보다는 여자에게 더 심한 한국사회의 특성상, 그리고 그 회사 사장(남성이다.)이 직원을 대하는 태도를 고려할 때 아내도 끝까지 비밀을 지키는 쪽이 더 나을 것이다. 이혼할 때 아내에게 이야기할 작정이다. 혹시 회사에서 꼭 남편을 데려 와야 하는 일이 있다면 연락하라고. 남편이 없다면 사장에게 어떤 봉변을 당할지 모르니. 한때 아내와 사이가 좋을 때는 아내가 그런 이야기도 했었다. 사장이 그래도 자신에게 그렇게 막 대하지 않는 건 남편이 있어서인 것 같다고.




선배와는 그 후로 연락이 많이 줄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내게 전화해서 이런저런 하소연하고 뭔가를 묻던 사람이었는데 본인도 뭔가 아차 싶었던 건지. 나도 남에게 대뜸 '너 이혼하냐'는 이야기를 들은 게 썩 기분 좋은 경험은 아니기 때문에 예전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뻔질나게 농담을 던지진 못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연락을 끊었다거나 관계를 정리했다거나 한 건 아니다. 팀장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왜 그런 쓸데없는 이야기를 해서 나를 곤란하게 하셨나, 하는 생각이 안 들면 거짓말이지만 팀장님을 붙잡고 하루종일 하소연했던 기억은 또 어디로 가겠나. 그리고 팀장님께서는 가끔씩 괜찮냐며, 잘 지내냐며 내 안부를 걱정해 주셨고. 정말 비밀이고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말아야 할 일이라면 아예 이야길하지 않는 게 맞다. 내가 내 입으로 이야길해 놓고 다른 사람을 원망할 일은 못 된다.(물론 그럼에도 사람이기 때문에 다소 서운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예전에 우리 회사의 어떤 직원에게 비밀이랍시고 이야기를 털어놓았더니 쪼르르 다른 사람들에게 다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나는 그 직원이 나에게 무슨 말을 하건 간에 항상 비밀엄수를 너무 강조해서 단 한 번도 그 사람에게 들은 얘기를 다른 직원에게 한 적이 없었는데.(심지어 내게 한 얘기는 잘못하면 그 직원이 해고될 정도의 큰일이기도 해서.) 그런데 내가 입이 가볍다고 나무라자 그 직원은 조금 억울해 하면서 '어차피 결국엔 남들도 다 알게 될 일 아니냐'고 내게 말한 적이 있었다. 그 뒤로 나는 절대 그 직원에게는 비밀의 '비' 자가 들어갈 이야기도 하지 않는다. 또 비밀이라고 당부하면서 상대에게 말을 하는 것 자체가 큰 의미가 없는 일이기도 하고 말이다.


누구에게나 하나쯤은 아픔이 있고, 숨겨 두고 싶은 비밀이 있다. 그 이야기를 하지 않는 건 다 그 사정이 있어서인 것이고 정말 엄청난 도움을 줄 수 있다거나 위안을 줄 게 아니라면 모른 체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적어도 내 경우에는 그 전화를 받고 나서 그렇게 느꼈다. '너 이혼하냐?'는 전화의 첫마디는, 나를 걱정한다기보다 그래도 자신은 이혼은 하지 않게 되었다는 안도? 혹은 하나의 가십 정도로밖에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모르겠다. 선배는 진심으로 나를 걱정해서 한 전화였는데 내가 마음이 비뚤어져서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인지도.


전화기만 잠시 꺼두어야 하는 게 아니다. 때로는 눈치도 잘 숨겨 두어서 상대의 상처와 비밀을 적당히 모른 체해 줄 줄 아는 그런 지혜도 필요하다. 누굴 탓하겠는가. 다, 내가 살면서 뿌린 대로 거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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