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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nest May 08. 2024

민원에 대처하는 자세

구두를 사다가

다섯 가지의 "할까 말까" 시리즈 가운데 하나가 "살까 말까 할 때는 사지 마라"이다. 그런데 이건 내 경우에는 해당하지 않는데, 무언가를 사고 싶어하는 경우가 너무 적기 때문이다. 한때는 정말 나도 그 조언처럼 "살까 말까 하다가 사지 않은" 적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때를 놓쳐 사지 못한 것이었다. 그게 그렇게 아쉬울 수 없었다. 내가 무슨 과소비하는 사람도 아니고, 욕구가 많은 사람도 아닌데 내가 뭔갈 가지고 싶어하는 경우는 정말 드문 일인데. 그 이후로 나는 대개의 경우에는 그 "할까 말까" 시리즈의 조언을 받아들이고 있지만, "살까 말까" 할 때만은 웬만하면 사는 편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고민이 남아서 사지 못하다가 때를 놓치는 경우가 여전히 있다. 물론 많이 적어졌다.)




우리 회사는 콜센터를 따로 두고 있다. 그리고 사무실 전화번호는 공개하지 않고 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귀신같이 내 자리로 전화를 거는 사람도 꽤 있다. 팀을 옮긴 뒤로는 상당히 많이 줄어들었지만. 나는 콜센터와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일하고 있는 셈인데 콜센터에서 근무하시는 분들의 노고에는 비할 바가 못 되겠지만 나도 몇 차례 어처구니없는 전화를 받아 봤다. 욕설을 퍼붓는 민원인에게 "거친 말을 하지 마시구요" 하고 말했더니, "거친 게 뭔지 보여 줘" 하면서 수많은 쌍욕을 내뱉던 사람. 아침부터 우리 회사 때문에 기분을 망쳤다며 보상을 해 달라고 하는 분께는 도대체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할까 싶었다. 심심해서 자주 전화하시는 분도 계셨다. 어느 날부터인가는 그분 전화번호를 대강은 기억하게 되었고 오는 전화를 일부러 받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이제는 부서를 옮긴 덕분에 민원 전화가 많이 줄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민원 전화에는 최선을 다해 응대하는 편이다. 가끔씩 자기 업무가 아니라고 그냥 전화를 돌려버리거나 담당자의 전화번호를 알려 주거나, 아니라고 모른다고 하고 끊는 사람들도 있다. 대부분의 우리 회사 직원들에게 불친절한 의 모습을 보면 깜짝 놀랄텐데 의외로 난 민원 전화에는 최선을 다해 응대한다. 그들은 고객이고, 이 회사의 주인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내 업무가 아니더라도 내 선에서 알아볼 수 있는 건 최대한 알아보고 답변해 주고, 담당자의 경우도 꽤 정확하게 안내한다. 그게 민원에 대처하는 나의 자세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이렇게 할 수 있는 건 실은 내가 받는 민원 전화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한 통화 한 통화 쳐내기 바쁘다면 이렇게 할 수 없겠지. 내 자리 전화번호를 알아내어 전화할 정도의 사람이면 보통은 아닐 것이고, 그런 사람은 또 흔치 않다. 물론 콜센터에서 내게 전화를 넘기는 경우도 종종 있지만 아주 많지는 않기 때문에 이런 응대가 가능한 것일 거다. 그러고 보면 (다른 방향으로 해석한 것이지만) "곳간에서 인심 난다"는 속담은 틀린 것이 하나 없다.




독립을 하면서 옷도 조금 버리고, 신발도 몇 켤레 버렸다. 여전히 내 신발장에는 10년이 넘은 구두가 있긴 하지만, 저렴한 가격에 사서 편하게 신다가 이제는 망가진 구두도 버려지는 옷 봉투에 들어갔다. 운동화 한 켤레와 구두 한 켤레를 그렇게 버렸던 것 같다. 아내에게 "집에 남자 신발 하나 있는 게 좋지 않아? 한 켤레는 네가 그냥 가져갈래?"하고 물었더니 아버님이나 처남의 신발 한 켤레를 가져다 두면 된다며 싫다고 한다. 그렇게 신발 두 켤레가 버려졌다. 그리고 얼마전 웹서핑을 하던 도중에 신발 행사가 있는 것을 보았다. 할인율도 높았고 신발 디자인도 나름대로 마음에 들었다. 보니까 쇼핑몰에 가입하면 추가로 신규회원 할인쿠폰도 준다고 해서 재고도 확인하지 않고 얼른 개인정보부터 넘겨 버렸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막상 주문하려고 보니 사이즈가 없었다. 헐. 세 가지 색상 중에 내가 주문하려는 색상만 사이즈가 없었다. 다른 색상으로 주문하면 되었지만 그렇게까지 마음에 들지도 않는 것을 사고 싶진 않았다. 결국 바로 그 쇼핑몰에서는 회원탈퇴 버튼을 눌러 버리고 말았다.


그렇지만 하루이틀 동안 영 아까웠다. 4만 원 정도면 살 수 있는 싼 가격이었다. 새로 이사한 집은 신발장이 엄청 넓다. 예전 집보다 집은 좁아졌는데 신발장은 두 배다. 신발장이 이렇게 넓을 필요가 있나 싶을 정도다. 그런데 이젠 나 혼자 사니까 그 넓은 신발장이 텅 비어 있다. 가장 최근에 산 구두는 아내와 함께 백화점에 가서 세일할 때 샀던 구두로 그것도 이미 산지가 1년 반이 넘었다. 실은 그것도 정말 오랜만에 산 구두였고. 그렇다 보니 영 아쉬움이 남았다. 회사에서 남는 시간에 한 번 다른 쇼핑몰들을 돌아보았다. 우와.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한 홈쇼핑에서 내가 원하는 색상의 내가 원하는 사이즈를 팔고 있었다. 마침 재고수량까지 옆에 다 나와 있었다. 역시 큰 회사라 그런가. 본인들이 직접 품을 사다가 파는 것인가. 그 홈쇼핑은 처음에 그 구두를 보았던 다른 쇼핑몰보다 몇 천 원이 더 비쌌다. 몇 천 원이 대수냐. 내가 뭘 사고 싶어하는 일 자체가 흔하지 않은데. 몇 천 원 정도야 더 낼 수 있지. 그렇게 신발을 주문했다. 주문하는 날로부터 (주말을 포함해서) 5일 이내에 배송할 예정이라는 문구가 떠 있었다. 기분이 좋았다.


닷새의 시간이 흘러 배송 예정일의 마지막날이 되었는 데도 여전히 제품은 출발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래서 짧은 문의글을 남겼다. 나는 5일 이내에 배송이 완료되는 줄 알았는데 일괄 출고하는 것인지, 닷새가 지난 오늘 일괄 발송하는 것이냐고. 그런데 내가 문의글을 남기고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재고가 없다며 취소 처리한다는 문자가 도착했다. 헐. 상담원은 이 문제에서 아무 잘못도 없었겠지만 어쩔 수 없이 나는 고객센터에 전화를 걸어서 상담원에게 따질 수밖에 없었다. 마일리지를 일부 주고 지불한 돈은 취소 처리한다고 했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이 신발을 사려고 회원가입까지 했는데? 그리고 본인들이 실시간 재고까지 띄워 놓고는 이게 무슨 일이람. 더 납득할 수 없는 건 취소에 닷새나 걸렸단 사실이다. 실은 이 부분을 가장 납득할 수 없었다. 재고가 없다면 하루이틀 새에 취소하는 게 가능했다. 그런데 내가 확인했을 때 내가 주문한 다음 날부터는 품절이라고 떴다. 실시간으로 재고가 줄어들고 있었던 셈이다. 그래서 '휴, 다행이다' 하면서 가슴을 쓸어내렸는데 닷새나 지나서 이게 무슨 일이람. 심지어 동네 구멍가게도 아니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다는 쇼핑몰에서.


다행히 상담원이 말이 잘 통해서 다른 부서의 팀장에게 직접 전화를 하게 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팀장은 어떤 어떤 절차를 거쳐서 이런 일이 발생하게 되었는지 내게 설명을 해 주었고, 다시 한번 재고를 확인해 보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당연히... 재고는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난 기성품이기 때문에 재고를 구하는 문제는 성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구하려고 했으면 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뭐 어쩌겠는가. 내가 다른 사람에게 그 정도 성의까지 요구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팀장은 다른 색상은 내가 원하는 사이즈가 있고, 내가 원하는 색상은 한 사이즈 큰 치수는 있다고 했다.(나도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러면서 내가 괜찮다면 그렇게 제품을 보내어 보고, 만약 실제 사이즈가 너무 크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무료로 반품할 수 있도록 자신이 챙기겠다고 했다. 나는 한 사이즈 큰 구두를 택했고, 주문하고 일주일이 지나서야 그 구두를 받아볼 수 있었다.


받아본 구두를 신고 나니 웃음이 나왔다. 역시 한 사이즈가 컸다. 딱 한 사이즈만 작았다면 아주 만족스러웠을텐데. 어린아이가 아빠 신발을 신은 것처럼 큰 건 아니었다. 이 신발을 신을 때마다 스포츠양말을 신어야 할 정도로 큰 것도 아니었다. 정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5mm 차이였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별것도 아닌 문제에 그때부터 오만 가지 생각을 다했던 것 같다. 일단 신발을 신지 못할 정도는 아니라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그리고 신발이 그렇게 고가도 아니었다. 웬만하면 뭘 사고 싶어하는 경우가 없는 내게 이 정도 마음에 들면 그냥 신어도 되지 않을까. 그런데 막상 그냥 신으려고 하니 그렇게 생각하면 처음에 가입했던 쇼핑몰에서 한 치수 더 큰 신발로 주문하면 되었다. 그랬다면 몇 천 원은 더 아꼈을 것이다. 몇 천 원이 인생을 좌우할 정도의 큰돈이 아님은 틀림없지만 기분 문제다. 그리고 4만 원짜리 신발에서 몇 천 원이면 생각보다 비중이 크다. 어제는 신발을 보낸 쇼핑몰의 팀장에게 전화가 왔다. 받아보시니 어땠느냐고. 나는 우선 시스템의 문제를 지적했다. 품절은 당연히 있을 수 있고 나도 받아들일 수 있지만 닷새나 걸리는 부분은 이해하기가 어렵다. 쇼핑몰의 이름값과 규모를 감안했을 때. 그리고 주문이 들어가면 실시간으로 재고가 줄어들고 있지 않았냐. 또 닷새가 지나서 내가 문의글을 올리니 그제서야 품절 처리를 한 것도 납득하기 힘들다고 했다. 할까 말까 고민했던 말이지만 그 이야기도 했다. 쇼핑몰이 여기 하나뿐인 게 아니지 않느냐고. 그냥 한 치수 큰 신발을 신을 것 같았다면 처음부터 다른 최저가 쇼핑몰을 이용할 걸 그랬다고. 내게 가장 이익이 되는 선택지는 이 신발을 반품하고 다른 쇼핑몰에서 다시 최저가로 받아보는 것이었을 거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에너지 낭비가 얼마나 심한가. 나의 노동력과 시간이야 상관없지만 누군가는 이걸 또 가지러 와야 하고, 또 새로 포장하고 가져다주는 사람도 있어야 하고. 결국 난 그냥 그 신발을 신기로 했다. 아무런 다른 보상도 받지 못한 채. 그리고 오늘 그 신발을 신고 처음으로 외출을 했다. 확실히 컸지만... 의식이 될 정도로 크게 불편한 건 아니었다.




한때 나는 휴대전화 KT의 10년도 넘는 장기고객이었다. 나도 알고 있었다. 번호이동을 하면 전화기도 훨씬 싸게 살 수 있고 각종 혜택이 많다는 것을. 그러나 나는 처음 만든 전화번호를 지키고 싶었다.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참 쓸데없는 고집이다. 그런 10년도 넘게 이용한 KT를 등 돌리게 한 단 한 번의 순간이 있었다. KT는 이동통신 3사 중에 2G 서비스를 가장 먼저 종료했다. 모두가 010으로 시작하는 11자리 전화번호를 쓰고 있을 때 016으로 시작하는 나의 열 자리 전화번호는 사람들에게 확실히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요소였(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당시 홍보팀에서 일하다가 모 일간지의 부장을 만난 자리에서 내 명함을 받더니 그 부장이 전화번호에 상당한 호기심을 보이며, 이렇게 스토리가 있어 보이는 애들이 홍보를 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덧붙였던 게 기억이 난다.(그 사람 잘 있으려나. 부서를 옮겨서 나중에 최순실을 보도했다가 큰 곤욕을 치렀을텐데.)


KT가 2세대 통신을 료하는 건 내가 어쩔 수가 없는 부분이었다. 일개 소비자인 내가 그것까지 뭐 어쩌겠는가. 소송을 하고 그랬던 사람들도 있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난 그 정도로 열혈 소비자는 아니다. 다만 법적으로 KT에서 2세대 통신 서비스를 제공하는 2013년 12월 31일까지는 나의 016 번호를 지키고 싶었다. 그건 그렇게 큰 욕심도 아니라고 생각했고. 그때 처음으로 2세대 통신을 종료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신문에서 여러 안내 보도도 많이 있었다. 그런데 중간에 KT에서 임의로 나의 016 번호 서비스 종료일을 통지해 왔다. 그 날짜는 분명히 변경이 가능했고(12월 31일까지는) 하필 통지해 온 그 날짜는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장기 여행(터키로 갔었다.)을 떠난 기간 중에 있었다. 난 여러 기사를 통해서 그 내용을 충분히 숙지하고 공부했기 때문에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서 31일까지는 미룰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상담원에게 충분히 설명했지만 상담원은 요지부동이었다. 더 높은 책임자와 이야기하고 싶다고, 내가 그 사실을 명확히 알고 있다고 이야기해도 소용이 없었다. KT는 자신이 책임자와 이야기하고 나서 나에게 전화를 주겠다고 했고, 결국 끝내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지금도 나는 알고 있다. 나는 016 번호를 12월 31일까지 사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KT는 그냥 귀찮았나 보지.


지금 젊은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KT는 원래 민영기업이 아니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는 한국전기통신공사였고, 그 이후에 세련되게 이름을 바꾼다는 게 한국통신이었으며 그 이후에 한국통신의 영어명인 KT가 되었다. 내가 저 민원을 제기할 때만 해도 아마 KT는 한국통신 같은 분위기가 많이 남아 있었을 것이다.(라고 추측한다.) 그래서 나의 민원에 그렇게 심드렁하게 대처했던 게 아니었을지. 내가 KT를 쓴다고 해 봤자 1년에 올려 줄 수 있는 매출이 2, 30만 원밖에는 안 되어서 큰 도움은 안 되겠지만(그래서 그랬나.) 이후로 나는 절대 KT 통신은 쓰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소비자가 대접받아야 하는데, 왜 공급자에 의해 제약을 받아야 한단 말인가.




솔직히 말하면 새 구두를 그냥 신기로 한 것은 나의 귀차니즘이 가장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몇 천 원은 아낄 수 있겠지만 이걸 또 반품하고 기다리고. 안 그래도 주문하는 과정에서 에너지 소모가 심했는데 그걸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몇 천 원은 손해보게 되었지만. 그러나 그 과정에서 홈쇼핑의 친절한 최선을 다한 대응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렇게 선의를 가지고 최선을 다해서 일하는 사람을 다시 또 번거롭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아마 그분은 모르시겠지만, 그분의 업무 처리 과정에 대한 고마움에 반품하지 않고 그냥 신기로 한 것이다.(4만 원짜리 신발을 몇 천 원이나 더 비싸게 팔게 해 주었으니 나는 영업이익률에는 큰 기여를 해 준 셈이다.) 의외로 세상은 이성과 현실에 의해서만 좌우되지 않는다. 내 경우에는 상당히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편인데도 그렇다. 이성보다 감정에 사람이 더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말이 있듯이, 상대를 대하는 태도에 따라 우리는 정말 많이 달라진다.


겨우 4만 원짜리 구두 한 켤레 사면서 참 별의별 생각을 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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