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의 실현이란 얼마나 어려운가
코로나19가 다시 유행하면서 2차 재난지원금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1차 지원금 때도 그랬는데 역시나 이번에도 국민 모두에게 지급할 것인가, 선별적으로 지급할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 심각하다. 만약 선별적으로 지급한다면 나는 지원금을 받지 못하는 쪽일테니 나로서는 당연히 전 국민 지급에 찬성하는 쪽이다. 그러나 내가 전 국민 지급에 찬성하는 것은 단순히 이런 개인의 이익뿐만 아니라, 가치의 측면도 있다. '공정'은 현 정부 들어서 전 국민에게 가장 관심 받는 가치로 거듭나고 있다. 오죽하면 대통령도 말했을까. "기회는 공정할 것입니다." 그러나 가치란 구호 한 번으로 실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현 정부와 여당이 아마추어 소리를 듣는 것이다. 재난지원금을 지급한다면, 아니 그뿐만 아니라 우리 생활에서도 공정이란 얼마나 실현하기 어려운 가치인지 이야기해 보자.
우선,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재난지원금을 전 국민에게 지급하는 것과 선별적으로 지급하는 것은 당연히 예산의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선별적으로 지급하자는 사람도 대부분 '모두에게 지급하면 좋겠지만' 예산상 제약이 있으니 어쩔 수 없이 부분적으로 지급하자는 쪽일 거다. 전 국민에게 지급하게 되면 더 많은 예산이 필요하다는 것을 나도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내 경우에는 선별적으로 지급함으로써 잃게 되는 '공정'이라는 가치의 손실이 예산상 손해를 뛰어넘는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나뿐만 아니라 전 국민에게 지급하는 것이 좋다고 여기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싶다.
가장 공정한 방법은 5천만 국민 개개인의 자산과 소득을 일일이 구별하고 따져서 지원 금액도 1등부터 5천만 등까지 차등화하여 지급하는 것이다. 이때 자산과 소득에는 현 시점의 자산과 소득말고도 코로나19로 인하여 손실을 본 자산과 소득, 그리고 앞으로 벌게 될 자산과 소득 등이 모두 고려되어야 한다. 가장 공정한 방법, 가장 이상적인 방법인 만큼 이런 해결방안은 현실적으로 실현이 불가능하다. 아마 앞으로 100년 동안 이것만 계산한다고 해도 어려울 것이다.(100년이라면 미래 소득과 자산도 계산이 가능하니, 할 수 있을 수도...)
선별적 지급을 주장하는 많은 경우, 일괄적인 어떤 기준이 제시된다. 소득 상위 50%, 자산 상위 50%, 건강보험료 납부 상위 50% 등등. 지난 2011년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주장했던 무상급식의 마지노선도 하위 50%까지였다. 유치하지만, 이런 질문을 할 수밖에 없다. 그럼 하위 50%에 있는 사람과 하위 50.0000001%에 있는 사람 사이의 소득 역전은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이런 구별을 하위 50.0000001%에 있는 사람이 과연 납득을 할까? 당연한 말이지만 소득 상위 50%와 자산 상위 50%에 드는 사람들은 많은 사람이 일치할 수도 있겠지만, 모두가 동일하진 않다. 정부에서는 나름 해법을 내놓는다고 이 모든 것을 복합하여 책정하는 건강보험료를 기준으로 삼으려고 하는가 보던데 자산이 많아도 직장에 다니면 건강보험료는 소득 기준으로만 납부한다. 이런 맹점은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이미 언급한 경계선에 있는 사람들 사이의 애매함이다.
선별적 지급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런 부분을 아주 쉽게 생각한다. "너가 못 받아도 그래도 상위 50%에 든 거잖아." 내가 일부 급여를 반납하고 하위 49.0000099%가 되는 대신에 받겠다고 하면 어쩌겠는가. 가치의 실현은 구호로 되는 것이 아니다. 5천만 국민이 생각하는 공정이라는 가치와 기준이 동일할 수는 없겠지만 최대한 모든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고 납득할 수 있는 기준이어야 한다. 그걸 기준을 세운 사람이 정해서는 안 된다. 본인도 그 기준을 적용받는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더 많은 사람은 그 기준에 반대할 수도 있다. 정직, 정의, 공정, 평등, 자유, 애국, 사랑 등등의 가치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찬동하고 박수를 보낸다. 아마 다들 나름대로는 그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생각하는 그 가치의 기준이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나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그런데 지금 그 기준이 과연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기준인가? 당신이 편의상 임의로 정한 기준이 아닌가? 친일파들 가운데 일부는 나름대로 자신들도 민족을 위해서 그 길을 택했다.
여기 두 사람이 있다. 부유하게 태어나서 노름과 도박으로 전 재산을 탕진하고 아무런 소득 없이 남아 있는 재산이 4999만 원뿐인 사람과, 가난한 집에 맏이로 태어나 건강을 해쳐 가며 성공한 끝에 이제는 한 달에 500만 원 정도의 소득을 벌고 재산도 5000만 원 모은 사람. 소득을 기준으로 해도, 자산을 기준으로 해도, 이 모든 것을 합친 기준으로 해도, 심지어 앞날의 소득과 자산까지 고려한다고 해도 우리는 앞쪽의 사람에게 재난지원금을 줄 확률이 더 높다. 이걸 과연 공정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공정이라는 구호 자체는 좋고 옳다. 나도 매우 좋아한다. 그리고 우리가 그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애써야 한다는 데도 동의하는 편이고. 그러나 그 가치를 외치는 것과 실현하는 것은 아주 다른 차원의 문제다. 가치의 정의는 물론이고 가치를 실현하는 방법도 사람마다 각기 다르다. 그런데 공정이라는 가치를 내세우면서 내가 생각한 기준이 옳으니, 당신들은 무조건 여기에 따라야 한다고? 그것은 또 공정한 것인가?
2년 전 회사에서 워크숍을 갔을 때의 일이다. 콘도에서 숙박하는데 어떤 사람은 바닷가방을 배정받고 어떤 사람은 아무런 뷰도 없는 그냥 마당쪽 방을 배정받았다. 나는 마당쪽 방이었지만 큰 불만은 없었다. 1/2의 확률이고 보면 언젠가는 나도 바닷가방을 배정받지 않겠는가. 그러나 나처럼 느긋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 반면에, 왜 나는 바닷가방이 아니라 마당쪽 방이냐고 따지는 사람도 있었다. 생각해 보면 나도 이 회사를 다닌지 오래되지 않아서 그랬을 수도 있다. 만약 내가 매해 바닷가방이 아니라 마당쪽 방에서 잤다면 내가 그것을 공정하다고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이런 사소한 일에서조차 그리고 우리 회사처럼 작은 집단에서조차 공정이라는 가치의 실현은 이렇게 어려운 것이다. 당신이 구호 한 번 외친다고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래서 나는 전 국민에게 지급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가 모든 사람이 동의할 수 있는 원칙을 세우고, 그 원칙에 모두가 동의하도록 할 수 있을 만큼 엄청나게 충분한 시간과 자원을 가지고 있는가. 그렇다면 모르겠지만 아마 그렇지 않을 것이다. 물론 예산상 제약이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공동체 사이의 신뢰와 믿음이다. 과연 사람들은 선별적 지급을 했을 때 그 기준을 믿고 따를까? 그리고 그걸 공정하다고 받아들일까? 정부가 그 정도로 일을 할 수 있다면 나는 아까 말했듯이 1등부터 5천만 등 사이에 정확하게 5천만 가지로 차등 지급할 수 있다면 많은 사람이 이것을 받아들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처럼 일률적인 기준을 세웠을 때, 그 기준 언저리에 있는 사람들의 불만은 어떻게 할 것인가.
차라리 나는 선별적으로 지급한다면 구체적으로는 생각해 보지 않았지만, 소상공인에게, 파트타이머들에게 지급하는 식으로 직역과 업종을 한정하여 전액 지급하는 방법이 더 낫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파트타이머로 기준을 세운다면 시간제 공무원은? 소상공인과 대상공인의 기준은 어디에 세울 것인가. 삼성도 처음에는 삼성상회라는 작은 구멍가게에서 출발했다. 주식회사면 안 되고, 유한회사면 될 것인가? 그러면 애플코리아는 지원을 받아야 하고, 하나투어는 망해도 되나. 공정이란 가치의 실현은 이렇게 어렵다.
잘못해서 혼나고 있는 아이가 있다. 아이도 자신이 잘못했다는 것을 안다. 그런데 그 아이는 왜 반발심을 가질까. 내가 잘못한 것에 비해 지나치게 혼나고 있다고 생각해서가 아닐까. 아이가 생각한 공정함의 수준을 벗어난 것이다. 그런데 그 아이로부터 피해를 입은 아이는 어떻게 생각할까. 과연 지금 저 아이가 혼나는 정도로 충분하다고 받아들일까. 태초에 함무라비 법전에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원칙이 있었다. 근대법이 생기기 전 훨씬 오랫동안 우리는 그렇게 '당한 대로 갚는다'는 원칙 아래 살았다. 왜 그랬을까. 그것이 훨씬 납득하기 쉬운 공정함의 방법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물론 역사가 발전한 지금에 와서 우리가 그때의 원시시대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공정이라는 가치의 실현은 그렇게 어려운 것이라는 것이다. 공정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가치도 아마 비슷하겠지. 우리는 아주 작은 것에서부터 신뢰를 쌓고, 아주 천천히 한 걸음씩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싶다. 가치는 결코 당신의 구호 한 번으로 완성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