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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nest Aug 25. 2020

차라리 깐깐한 사람이 나아요

어떤 사람과 같이 일하는 것이 좋은가

결국 염려했는데, 사고가 나고 말았다. 유명한 분을 모시고 하는 작업이라서 상당히 신경도 많이 썼고 무엇보다 잘하고 싶었는데 이상하게도 두 차례나 사고가 났다. 하나는 어떻게 잘 수습한 셈이지만(사고도 아닌 셈이지만), 다른 하나는 겉으로 드러나는 결과물 자체가 이상해 보여서 도저히 수습을 할 수가 없다. 기일을 미루고 비용을 더 치르면 괜찮아질 수도 있겠지만, 이미 (잘 수습했다는) 한 차례의 사고로 기한이 늦어진 터라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심지어 비용 문제도 있다.


이렇게 될 줄 몰랐던 것인가. 아니다. 분명히 나는 중간에 한 번 확인을 했다. 오늘 작업자가 나와의 통화에서도 인정했듯이.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내가 보았을 땐 너무 이상해 보였다. 이건 분명히 잘못된 것 같았다. 그런데 작업자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괜찮다'고 하는 바람에 그냥 넘어가고 말았다. 내가 한 차례 더 확인할 수도 있었지만 나도 그렇게까지 하기에는 귀찮았다. 그리고 이런 사고가 흔한 사고가 아니다. 작업자는 자신도 처음 겪는 일이라고 했다. (하필 그런 일을 내 작업에...) 결국 그렇게 설마설마하다가 사람 잡은 것이다.




대학원에서 나는 인정받는 조교였다. 조교라는 일이 업무능력을 인정받아야 할 정도로 어렵거나 힘든 일은 아님은 물론이고, 인정받았다고 해서 딱히 좋은 메리트도 없기 때문에 그다지 자랑할 일도 아니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내가 곰곰이 선생님들의 시간표를 보다 보니, 어떤 선생님은 1교시와 7교시, 어떤 선생님은 2교시와 6교시, 이런 식으로 수업이 배정되어 있었다. 처음엔 수업이 하나였는데 나중에 한 개의 수업을 더 배정받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이었다. '선생님들께 양해를 구하고 수업을 바꾸어 드리면 모두가 좋아하지 않을까?' 그런데 이런 생각은 나만 하고 있었다. '우리가 왜?' 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대부분, 아니 전부였다. 수업을 바꾸어드리겠다고 선생님들께 전화를 드리자 대부분 고마워하고 좋아하셨지만, '이런 전화는 난생 처음'이라는 반응이 많았다. 왜냐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나는 대학을 다니는 동안 절반이 넘는 시간을 학내 부서에서 거의 '준'직원처럼 일했는데 아마 그랬기 때문에 저렇게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런 친절을 베푼다고 해도, 조교의 일은 정말 한갓졌다. 그래서 나는 나중에 같은 사무실로 오는 후배에게 그렇게 말했다. '네가 신경 쓰는 것의 5%만 여기에 쓴다면 완벽한 조교가 될 수 있다'고.


쓸데없는 이야기가 길었는데 우리 사무실엔 8명이 같이 일했다. 개중에는 나 같은 사람은 (당연히) 없었고, 그래도 주어진 일과 시킨 일은 잘하는 사람, 그것조차도 안 하는 사람, 하려고는 하는데 잘못해서 사고 치는 사람 등등 다양한 사람이 있었다. 한 번은 일하는 사람과 관련해서 선배와 이야기를 나누는데, "저는 그래도 못하더라도 착해서 열심히 하려는 사람이 좋아요."라고 이야기했더니, 선배가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 "아직 일을 많이 안 해 봐서 그래. 착한 애한테는 뭐라고 하기에도 마음이 불편하고 나는 그런 애가 더 싫어."라는 어린 시절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대답이 돌아왔다. 조교가 끝난 뒤 나는 군대에 갔고, 선배의 대답을 이해하는 데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사회생활에 필요한 것은 능력이지, 노력이 아니었다.




나의 일하는 철학은 '일은 일이고, 사람은 사람이다'이기 때문에 '갑'으로서 오늘처럼 '을'에게 일을 의뢰할 때에는 조금 깐깐하고 피곤하더라도 정확하게 하는 것이 좋다는 쪽이다.(참고로 저는 갑을이라는 용어 자체를 매우 싫어합니다. 여기에서는 편의상 사용합니다.) 서로 아무리 좋게 좋게 일을 진행한다고 해도 결과물이 좋지 않으면 상대에 대한 기억과 인상이 좋게 남을 리 없다. 그렇게 되면 다음 번에 '을'에게 일을 부탁하지도 않게 되고 '을'도 손해 아닌가. 내가 조금 깐깐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그건 일에 한정되어서 그럴 뿐, 가능하면 인간적으로는 원만하게 지내려고 한다. 물론 상대는 이런 나의 마음을 모르는 경우가 더 많겠지만. (인간적으로 만나고 연락할 일이 몇 번이나 있겠는가. 친구도 아닌데.) 지난 겨울 사무실에 같이 근무하는 어떤 분의 장인어른께서 돌아가셨는데 나는 직접 다녀왔다. 회사 직원들 모두가 나의 문상이 의외인 듯했다. 이게 나의 철학이다. 나는 업무적으로, 회사 차원에서 그 팀을, 그 사람을 싫어하지만 그건 업무와 회사 차원일 뿐, 개인적으로도 그 사람이 미운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런 구분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지만.(;;;)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내가 태어났을 때부터 남을 부리던 사람이 아닌데 남에게 일을 부탁하고 의뢰하는 것이 말처럼 쉬울 리가 없다. 결국 이번 일도 그렇게 해서 문제가 된 셈이다. 분명 나는 문제가 있는 것 같다고 확신했다. 물론 내가 그 일을 직접 하는 사람이 아니니 나로서는 확인 요청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간접적으로 확인하는 방법도 있었겠지만. 그래서 이야기를 했는데 이상이 없다고 하니 그냥 넘어가고 말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이상했는데. 한 번 더 확인했어야 했다. 그게 일을 똑바로 하는 방법이었는데. 결국 오늘의 경험으로 나는 이번 일을 함께한 그 '을'에게 아주 안 좋은 인상을 가질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도리어 나는 이 사람이 이번 일로 다음 번엔 더 대오각성해서 잘할 것이라고 기대한다. 만약 다음에도 또 이렇다면, 다시는 일을 같이하지 않는 게 좋겠지.)


결과적으로 상대방이 '아, 내가 확실하다고 했는데 왜 자꾸 이러지?'라고 하더라도 한 번 더 확인했어야 했다. 그래야 의뢰받은 일을 마친 그 사람도, 일을 의뢰한 나도 모두 만족하는 결과물이 나왔을 것이다. 이게 뭔가. 일은 일대로 하고 서로 기분만 상하고 만 셈이다. 아마 그 사람은 분명 '본인이 꼼꼼하게 확인하지 않고 말이야'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스스로도 내가 확인을 해 달라고 해서 몇 번 더 확인했다고 말하고 있음에도.


조교 일을 했을 때처럼 나는 분명 나의 일은 잘하는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분업사회에서 내가 모든 일을 다 할 수가 없고 특히 이렇게 작은 회사에 다니는 이상 결국 다른 사람에게 내 일을 맡기고 시키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이게 군대에 있을 때 같지 않아서 그 사람들은 나와 함께 일을 하는 사람이지, 내 밑에 사람이라거나 내 지시를 받는 사람은 아니다. 더군다나 우리가 있는 곳이 군대가 아니기도 하고. 비용을 지불하고 일을 의뢰하는 것인데, 한국사회가 그렇듯 대부분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한의 일을 시키려고 한다. 중소기업은 파이 자체가 작기 때문에 더 그렇다. 그래서 일을 시킬 때도 큰소리를 내기가 영 어렵다. '돈도 얼마 안 주면서 깐깐하기는' 이런 소리를 듣기 싫은 것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학생이 아니다. 이곳은 자본주의사회고, '나'와 '당신'은 혹시 프로가 아닐 지라도, 이젠 더 이상 아마추어는 아니다. 결과물에 책임을 져야 한다면 내가 상대에게 호인(好人)이라는 평가를 받지 못할지라도 깐깐하고 빡빡하게 확인할 것은 확인하고 압박할 것은 압박해야 한다. 인간적인 것은 일과는 별개다.


이것과는 별개로 나에겐 이번 경험이 더욱 안 좋다. 결국 나는 내가 일을 의뢰하는 사람들보다 눈이 더 좋다는 쓸데없는 결론(?)에 이르렀다. 아마 앞으로 다른 사람의 말을 더 잘 안 듣게 될 것이다. 그것이 이번 경험이 내게 가져다준 가장 안 좋은 영향이다. 앞으로는 내가 비록 일을 직접 하는 사람이 아니어서 혹시 잘 모를지라도 한 번 더 확인하고, 두 번 더 확인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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