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 당신의 롤모델이 있습니까

by honest

아직도 기억이 난다. 서무 여직원 두 명과 창고를 정리하는데, 같은 팀 사람들 이야기가 나왔다.


honest 씨는 어떻게 버텼어? 나라면 진짜 금방 짐 싸서 갔을 거야.


여전히 첫 회사의 사수와 연락하고 지내지만, 내 생각에 우리는 지금도 어색한 사이다. 처음 그 회사에 입사했을 때부터 그랬다. 아마 사수에게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 면이 많이 있었을 것이다. 특히 나는 상한 기분을 표정에서 숨길 수 있는 사람이 못된다. 그리고 처음 회사에 들어갔을 때 몇 차례 핀트가 맞지 않을 일이 있었다. 나는 팀에서 처음으로 공채 신입으로 들어온 직원이었다. 그래서 다른 직원분들도 이야기를 해 주셨었는데, 예를 들면 신입 공채 정규 교육이 있다거나 할 때, 우리 팀에서는 "거기를 꼭 가야 돼?"라고 말하는 것처럼 이해가 부족했다. 이해한다. 그런 적이 없었으니까. 반면 나는 여전히 동기는 친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가끔씩 모여서 상사도, 회사도 흉볼 수 있는 동기에 대한 갈망이 있었는데, 그런 점이 꽤나 서운했다. 회사에 입사하고 첫 한 달이 지나고 나서부터는 사수의 엄청난 지도가 있었다. 나는 군대에서 전역하기도 전에 입사한 셈이라, 그렇다고 스트레스가 없진 않았지만 도저히 못 버틸 정도의 갈굼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는데 저렇게 이야기한 것을 보면 다른 직원들의 생각은 달랐던 것 같다. 나중에 얘기를 들어보면 팀장님과 파트장님도 조금은 걱정하셨던 듯하다. 특히 내 자리에 몇 달 버틴 직원이 없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내 바로 앞에 다닌 직원은 3개월만에 나갔다.) 그런데 그렇게 한 3개월 정도가 지나자 사수도 나의 영역을 인정해 주는 듯했다. 그때부터는 훨씬 회사 생활이 할 만했다. (할 만할 때 계속 다녔어야 했는데. ㅠ)


나는 사수를 좋아하지 않았고, 사수 때문에 힘들었지만 사수를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우리 팀에 나는 없어도 그는 꼭 있어야 했다. 15명 정도 있는 팀에서 사업계획 짜는 것부터 시작해서 업무능숙도, 일의 진행 등등 내가 그보다 나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는 팀의 모든 업무를 파악하고 있었다. 물론 사수도 완벽한 인간은 아니었다. '내가 사수라면 이건 이렇게 할텐데' 생각하는 것도 적지 않았고, 내가 가장 크게 꼽은 단점은 자신과 다른 방식은 아예 틀리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내가 사수보다 나은 것도 있을텐데 그런 부분은 아예 제거되어야 한다는 것이 나는 좀 서운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능력의 사람이었다. 지금도 그는 그 팀에 있다. 물론 한때 그가 없었을 때도 팀은 돌아갔지만, 만약 내가 그가 없는 팀에 있다면 나는 무척 곤란해 했을 것이다. 그는 나의 롤모델은 아니었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다.




회사가 대기업이고 직원이 2천 명쯤 있으면 개중에는 싹이 떡잎부터 다르다고, 아직 젊고 어린데도 일찍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직원이 있다. 그때 한 과장이 있었는데 업무능력과 관련해서는 사람들로부터 확실하게 인정받았고, 결국 몇 년 전 기획팀장으로 영전했다. 조기승진도 여러 번 한 상태였다. 지금 임원까지 일찍 달았는지 어땠는지는 모르겠다. 50개가 넘는 팀이 있다 보면 회사에서도 보여 주기 식으로 일찍 승진시키고, 발탁하는 사람이 반드시 나온다. 이제는 승진과 인사 적체가 있어서 50이 되어도 팀장을 달기 쉽지 않다고 하는 회사지만, 개중에는 40대 초반에 바로 인정받아 팀장이 되는 사람이 있다. 물론 그 사람의 직급이나 직책이 능력을 보증하고 보여 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동네 구멍가게가 아닌 다음에, 그렇게 발탁된 사람이 몇 개월이나 1, 2년이 아니라 계속해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경우에는 능력이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런 사람을 보면 '아, 저 사람 존경스럽다. 저 사람처럼 되어야지.'까지는 아니더라도, '저 사람 만큼은 해야겠다.'는 생각은 들 것이다. 누군가 내 인생의 롤모델은 아니더라도 회사에서 나에게 자극을 주는 존재 정도는 있었다고 보면 옳겠다.


"삼인행이면 필유아사"라고 했다. 셋만 있어도 나에게 선생될 사람이 있다는 뜻인데, 우리 회사가 작긴 해도 직원이 35명은 된다. 그런데 삼인행이면 필유아사에서 나에게 선생될 사람이 있다는 것은 반면교사의 뜻도 된다. 이제는 중소기업에 다니는 나는 35명의 직원 중에서 '내가 저 사람을 본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들 만한 직원을 안타깝게도 지금까지 단 한 명도 보지 못했다. 도리어 이 회사에서는, 2천 명씩 있는 회사라면 아마 보이지 않았을 '아, 저 사람이 우리 회사에 없다면 훨씬 더 큰 도움이 될텐데' 하는 것을 많이 느끼게 한다. 큰 회사라면 그런 직원은 이미 짤렸거나, 아니면 계속 다니고 있더라도 벌써 다른 한직으로 밀려났을텐데, 작은 회사다 보니 그런 직원들과도 매일 얼굴을 마주보며 생활해야 하고, 그렇다 보면 '내가 여기 계속 있어야 하나' 하는 자괴감이 더욱 심해진다. 그래서 내가 매일같이 하는 생각이 바로 '나는 절대 저렇게는 되지 말아야지.'이다. '저렇게는 되어야지.'와 '저렇게는 되지 말아야지.'는 한끗 차이지만 엄청나게 다르다. 늘상 이렇게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사람들을 만나고 대하고 회사에 가는 것이 내 삶에 얼마나 좋겠는가.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들까. 당연히 대기업에 다니면 학벌도 더 좋고, 어학능력도 더 뛰어나고, 학점도 더 좋은 소위 말해서 스펙이 더 좋은 사람이 들어온다. 나는 여기에서 학벌이나 학점 같은 지표가 그 사람의 삶의 태도를 보여 준다는 교과서적인 이야기는 아예 꺼내지도 않겠다. 학벌이 떨어지고, 학점이 안 좋고, 스펙이 안 좋은 사람이 인성도 더 좋고 일도 더 잘하는 경우도 당연히 있겠지. 그 평균에 대해서조차 이야기하지 않을 작정이다.


내가 첫 회사에 들어갈 때 경쟁률은 세 자릿수였다. 큰 회사이니 많은 사람이 들어오려고 하는 것은 당연하다. 한때 회장 조카가 우리 팀에 다닌 적도 있었던 것처럼 알음알음으로 회사에 입사하는 사람도 없진 않았지만 무척 드물었다. 그 정도가 되려면 사람들에게 두루 엄청나게 인정을 받아야 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일단 중소기업은 입사하려는 사람 자체도 훨씬 적다. 들어오려는 사람들의 이력서의 수준이나 질을 따지지 않더라도 당장 양에서부터 차이가 난다. 그리고 직원 수는 적은데 알음알음으로 사람을 뽑는 경우는 훨씬 많다. 당장 35명의 직원 가운데에도 그런 직원이 꽤 된다. 내 경우에는 그 직원들의 채용을 거의 모두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너 회사도 아닌데 뭘 그렇게까지 하냐?' 고 하면 할 말이 없는데, 나는 그들과 몇 달을, 몇 년을 일해 본 결과 새로운 사람을 뽑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런 조직은 고만고만한 '적당히'의 문화가 있다.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써야겠다.) 새로운 사람을 뽑아서 가르치려면 힘들고 번거로우니 그냥 이렇게 사람을 뽑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직원들이 나이가 들고, 지금 내가 회사에서 생각하는 '절대 저렇게 되지는 않아야 할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닐까.


결정적으로 능력에서도 층위가 진다. '스펙을 보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 아니냐?'고 할 지도 모르겠다. 아니, 결과물을 보라고 이야기하겠다. 예를 들면 같은 디자인을 전공한 사람이 있다고 쳤을 때, 보는 것도, 디자인하는 것도, 심지어 디자이너로서 하고 다니는 옷차림의 세련됨마저도 차이가 난다. 그럴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처럼 서열이 진 사회에서 본인이 더 능력이 있고 인정받는다면 이런 중소기업에 다닐 일이 없다. 당연히 더 크고 좋은 회사로 옮겨가지 않았을까. 아주 극소수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이렇게 쓰고 보니 내 얼굴에 침 뱉기다.)




당신이 정말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친구가 한 사람만 있어도 그 인생은 성공한 인생이라고 했다. 마찬가지로 매일 회사에서 만나고 이야기하는 사람들 가운데 내가 롤모델로 삼을 만한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다면 나의 회사 생활도, 심지어는 내 인생도 엄청나게 달라지지 않을까. 내가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이 옆에 한 명 있다는 것, 나의 멘토 같은 사람이 한 사람 존재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인생에 정말 많은 영향을 끼친다. 그래서 내가 힘들고 어려움이 있더라도, '그렇다면 저 사람은 어떻게 할까?'라고 생각할 만한 사람이 한 명은 있는 회사에 다녀야 한다. 혹시 회사에서 잘 나가는, 유명한 사람을 내가 아예 모른다고 하더라도, '아, 나도 저 사람 만큼은 하고 싶다.'고 자극을 주는, 생각을 하게 하는 사람이 있는 회사에 다녀라.


나의 경우에는 비록 이 회사에 내가 존경할 만한 사람도, 멘토로 삼을 만한 사람도 아예 없지만, 나는 나보다 어린 후배들에게 그렇게 되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한다. 그런데 그렇게 되려고 하면 부닥치는 또 다른 문제가 있다. (다음 편에)

매거진의 이전글시작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