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아마도 이건 평화로운 삶이겠지요

by honest

좋은 일이라고 해야 하려나. 월요일이 두렵지 않은 삶을 산지 꽤 되었다. 일요일에 출근해서 월요병이 없는 삶이 아니다.(웃음) 그냥 내게는 월요병이 없다. 때로는 오히려 너무 지루한 주말을 보내다 보면 은근히 월요일 출근이 기다려지기까지 한다.


지난주 월요일은 휴가였다. 오랜만에 휴가를 내고 부모님댁에서 쉬고 있는데, 한낮에 문득 '이게 뭐하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누구고, 지금 여기서 무얼하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불현듯 '아, 그래도 내일은 회사에 가니깐'이라는 생각을 했지만, 그 생각에 미치니 또 우습기 짝이 없었다. 세상에 출근을 기다리는 직장인이라니.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일이나 회사에 엄청 애정이 많은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좋아하는 일도, 좋아하는 직장도, 좋아하는 사람들도 아닌데 나는 왜 출근을 기다리고 있는 것인가. 그건 아마도 지금의 내 삶이 너무도 지루하고, 무료하며, 심심하고, 재미없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아무리 바쁘고 삶에 열의가 넘치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살면서 지루함과 무료함을 한 번도 겪어 보지 않았을 리는 만무하다. 특히 우리는 어린이일 때, 무척이나 심심함을 자주 느낀다. 그 시절엔 정말 재미있는 일이 아니고서는 시간이 그렇게 빠르게 가지 않는다. 돌아보면 어떻게 그 오랜 시간을 견뎌냈는가 싶다.(한편으로는 지나고 나서 보니 그렇게 빠르게 흐른 시간을 왜 알차게 보내지 못했던가 하는 후회도 되고.)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지금의 나는, 아니 예전에도 나는 쓸데없이 소모하는 시간이 상당히 많은 사람이었는데, 한편으로는 시간을 효율적으로 써야 한다는 강박에 무척이나 시달렸다. 물론 난 좋아하는 것이 확실한 사람이어서 대학 때를 돌아보면 시간표에 내가 듣는 수업을 맞추는 사람까지는 되지 못했지만(가끔은 퐁당퐁당 시간표가 있었다.) 공강시간을 어떻게 활용할까에 대해서는 상당히 많은 고민을 했고, 개강하고 2~3주 뒤부터는 나름대로 규칙적인 공강시간 활용법을 만들어서 보냈다. 그렇게 아낀 시간을 어디에 썼는고 하면, 아마도 나는 쓸데없는 망상과 돌아다님(산책이라는 표현을 쓰기에는 아깝다.) 따위로 허송세월하고는 했다. 당연히 모든 시간을 다 허송세월한 것은 아니라서, 공강시간에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고, 미리미리 과제나 발표물을 준비해서 교수님과 사전에 상의를 하니 외계인 같은 면모를 보이기도 했었다.


한 서른예닐곱 살까지였을 거다. 그래도 나는 대체로 시간을 쓰는 목적이 있었고, 남는 시간을 때우는 계획이 있었다. 그때까지는. 한 서른까지는 삶에 목표가 있었고 목표가 사라진 뒤에도 나는 대학 학적을 거의 20년 가까이 유지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방학 때가 아니라면 학기 중에는 늘 무언가 할 게 있었다. 물론 할 게 있다고 해서 그 시간을 항상 알차게 썼는가 하면 당연히 그건 아니다. 강의를 들어야 하고, 미리 과제를 해야 하며, 진도를 나가야 했지만 그 사이에 내가 허송세월한 시간을 모두 더하면 아마 그 시간에 지구를 몇 바퀴 돌고도 남을 것이다. 그럼에도 '무언가 할 것이 있다'는 생각은 시간 활용에 좀 더 열의를 가지도록 했고, 좀 더 젊었던 그때에는 그 시간을 함께 보낼 지인들도 지금보다 훨씬 더 많았다. 남는 시간 때문에 고민할 일이 많지 않았던 셈이다.


특히 결혼은 나로 하여금 새로운 가족에 묶어둠으로써 비어 있는 시간이 없게끔 만들었다. 처가의 대소사도 챙겨야 함은 물론이고, 때때로 처조카와 놀아줘야 했고 '나의 가족'이 생김으로 인해 원가족과도 더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었던 것 같다. 결과적으로 나는 아내와 헤어지기 전까지는, 삶에 목표를 잃었다 할지라도 특별히 지루함을 느끼며 살 새는 없지 않았었나 싶다. 물론 거기에는 나의 게으름도 한몫한다. 어느 정도 열의를 가지고(?) 시간을 보내면 또 그만큼 늘어져서 재충전의 시간을 가져야 했기에.




아내와 헤어지고 혼자가 되고 나니 갑작스레 시간이 엄청 많아졌다. 우선 나이를 먹고 가족이 생기면서 지인들과 보내는 시간이 줄어들기도 한 것이 첫 번째 이유다. 거기에는 외곽 지역으로 이사한 데다 하필 그 시점에 코로나가 와서 약속이 더욱 줄어든 영향도 있다. 약속이 줄었어도 크게 외롭고 심심하지 않았다. 아내가 있었던 까닭이고, 처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처가는 우리집과는 문화가 많이 달라서 가족모임에 적극적인 편이었다. 보통 장인어른과 장모님은 평균 한 달에 한 번 이상은 뵙는 편이었고, 심지어 아내의 작은외할아버지 집들이에까지 초대되기도 했었고, 나는 아내와의 사이를 정확히 알지도 못하는 어느 어르신의 칠순잔치에도 다녀왔었다. 가끔씩은 처조카를 보러 처남집에도 가곤 했는데, 이 모든 시간이 이젠 내게 텅 비어 버렸다. 심지어 아내가 없음으로 해서 부모님댁에 가는 횟수도 줄었다. 아무래도 내가 처가에 가는 만큼까지는 아니어도, 어느 정도는 부모님댁을 방문했었는데 이젠 그래야 할 의무감이 사라진 탓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내겐 이제 '시간을 때우는 일'이 엄청 중요해졌다. 그렇게 독실하지도 않으면서(실은 신앙이 거의 없다시피 하면서) 성당을 매주 나가는 것도 시간을 때워야 하기 때문이다.(청년 여러분, 미안합니다.) 지인 한 분께 왜 성당을 나가냐며 강한 꾸중을 듣기도 했었다. 그건 시간 때우기 아니냐며 내게 좀 더 발전적으로 다른 알차게 시간 보낼 수 있는 법을 연구하라는 잔소리였다. PT 트레이너에게도 자주 혼난다. 혼자서 알차게 시간을 보내려고 해야지, 그렇게 다른 사람들과 같이 시간을 보내려는 게 좋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나는 이런 잔소리들을 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다. 그러나 '시간을 보내는 목적'이 아니라 무언가 '목적 있는 시간'을 가졌으면 하는 간절함이 없지 않다. 특히 지난 세월 내가 살아온 시간을 돌이켜 볼 때 더욱 그렇다.


월급쟁이가 아닌 교수(내 주위의 수많은 교수들은 자신들도 월급쟁이라고 말하지만. 참고로 나는 그들에게 너희들은 '월급쟁이'가 아니라 '월급장이'라고 말한다.)가 되고 싶었던 건 아주 예전부터 그렇게 '목적 있는 시간'을 보내는 삶을 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교수는 내 연구를 하고, 내 학생들을 가르치며, 그것은 내가 하고 싶은 공부고, 나의 연구이며, 그래서 은퇴도 없고, 은퇴한 뒤에도 지도학생들과의 인연이 끊이지 않는다는 점이 내게는 무척 매력적으로 보였고, 좋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나는 그 삶을 사는데 실패했고, 결국 남의 일을 해 주면서 내 시간을 보내는 대가로 월급을 받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요즘 의사선생님과 상담하면서 한 가지 느낀 점은(의사선생님이 지적한 것이 아니라 정말 내가 느낀) 나는 말하는 것과는 달리 실제로 일에 상당한 책임감과 애착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이 '남의 일'인 것은 변하지 않는다. 나는 남의 일을 대신해 주는 대가로 월급을 받으며 살고 있다.


하고 싶은 것도, 해야 할 일도, 만나는 사람도 많지 않은데, 심지어 나는 일도 많지 않고, 내 계획에 따라 일하며, 또 그 와중에 일을 빨리하는 편이고, 그렇다 보니 남는 시간이 넘쳐난다. 결국 나는 이제는 시간이 시속 43km의 속도로 느리지 않게 가는 데도 불구하고, 늘 시간이 많아서 항상 지루하고 무료하며 따분하고 나른한 삶을 사는 중이다.




그렇게 시간이 가기만 바라고 있는 월요일(그날은 휴가였으므로)이 너무 싫었고, 아무래도 그건 심심하고 재미없기 때문이었으므로 나는 내가 불행하고 재미없는 삶을 산다는 생각에 이를 즈음에 문득 그런 깨달음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이 한낮의 더위에 여유를 가지고 지루함과 무료함을 느낄 수 있는 이 삶이라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가. 한때는 이런 시간을 그토록 원했던 순간도 있지 않았던가. 다른 동물로 살아본 적이 없어서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대체로 지루함과 무료함은 사람과 사람 가까이 사는 동물들만 느끼는 감정이 아닐까 싶다. 초원에 사는 한 마리의 토끼는 언제 자신을 잡아먹으려 들지 모를 사자와 하이에나의 시선을 늘 의식해야 할 것이며, 음식을 저장해 두지 못하는 그들이기에 배고픈 치타는 언제 주린 배를 채울 수 있을지 항상 주위를 날카로운 눈으로 살펴야 한다. 동물과 비교하는 게 우습지만 나 또한 극한 상황에서 생존만을 의식하며 시간을 보냈던 경험이 없었던 사람이 아니다.(남성들은 모두 군대에 가니깐) 18년 전이지만 7, 8월 한낮의 땡볕 아래에서 땀으로 온몸을 샤워해 가며 전투교장을 뛰어다녔던 그때, 나는 혼자서 무료함을 느낄 수 있는 그 시간을 얼마나 갈구했던가.


솔직하게 말하면 나는 이제 시간이 너무 많아서 지금의 따분하고 무료한 내가 결코 행복하다거나 아니면 평안하다는 말은 하지 못하겠다. 요즘의 내게 행복은 지금보다 좀 더 요란하고 시끌벅적하며 뭔가 신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 돌아서서 생각하니 이걸 불행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까. 특히 나는 게으른 사람이라 바쁠 때 다음의 무언가를 계획할 수 있는 사람이 못된다. 얼마전에 아는 교수님과 이야기하다가 나의 생애 마지막 소망(버킷리스트) 중 하나인 산티아고 순례길 걷기에 대해, 교수님께서 두 달 쉬면 충분히 다녀올 수 있지 않느냐는 물음에 내가 반년 정도는 쉬어야 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고 답했더니 교수님께서 이상이 너무 높다고 하셨었는데 실은 그건 이상이 높기 때문이 아니다. 딱 두 달만 쉰다면 내가 그 여행을 미리 준비해서 다녀올 수 있는 정도의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은 반년도 부족하고 아마 일 년 정도는 쉬어야 나는 어느 정도 지루한 시간을 보낸 뒤에 '아, 이제 산티아고 순례길을 떠나볼까' 하는 사람일 것이다. 내게는 그런 나무늘보 같은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 생각에 미치고 나니 그래도 지금의 나는 행복하고 즐거운 삶까지는 아니더라도, 이건 좋게 말해 '평화로운 삶' 정도는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아내와 헤어지면서 한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처럼 느꼈었는데, 무언가 이렇게 심심하고 무료하다는 느낌을 받는다는 건 내가 다시금 뭔가를 하고 싶다는 뜻도 아닌가 하는 또다른 깨달음에 미쳤다. 삶에 의지를 찾기 위해 늘 무언가 좋아하는 것, 하고 싶은 일이 많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얼마전까지 나는 하고 싶은 일이 하나밖에 없어서 늘 그 점이 염려스러웠는데, 지루함을 깨달은 뒤에 한 가지를 더 찾을 수 있었다. 아마도, 평화롭지 못했다면 결코 깨닫지 못했을 일이다.


그래, 역시 내게는 눈코 뜰 새 없는 것보다는 이런 한갓짐이 어울리지. 행복하지는 않다. 그래도 평화롭다. 평화로워서 편안한 일상이다.(실은 조금은 더 바쁘고 신났으면 좋겠지만)

keyword
작가의 이전글나는 행복(하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