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운 사람들을 만나면 아무래도 주로 아쉽고 서럽고 슬픈 것들 위주로 이야기하게 된다. 내 말버릇 때문일 수도 있다. 10년도 더 전에 영어학원을 다닐 때였는데, 항상 선생님이 들어오면서 How are you?라고 물으면 나는 언제나 Not good이라고 대답했었다. 전 국민의 공식 대답인 Fine, thank you. And you?가 아니라. 실제로 난 뭐 그렇게 행복하지 않았고 그게 솔직한 대답이라 여겼는데, 다른 한국인들과는 사뭇 다른 내 대답이 선생님들에게는 무척 흥미로웠나 보다. 특히 어떤 선생님은 매우 관심을 보이며 나는 늘 웃고 있는데, 대답은 Not good이라고 한다고 말하기도 했었다.
'잘 지내?', '요즘 어때?'라는 지인들의 물음에도 대개 내 답변은 뭐 Not good 정도다. 그러다 보면 대화는 결국 아쉽고 서럽고 슬픈 이야기 위주로 흐를 수밖에 없다. '무슨 일 있어?', '왜 안 행복해?' 뭐 이런 질문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가끔, 아주 가끔 나도 정말 Great!라고 대답할 때가 없진 않겠지만 아주 드물다. 당장 떠올려 봐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예 없었던 것 같진 않지만, 아마 살면서 손가락에 꼽을 정도로 적었지 않나 싶다.
그런데 말이다. '좋지 않은' 것과 '나쁜' 것은 매우 다른 것이다. 대부분의 경우 사람들은 '좋지 않다'고 하면 '나쁘다'고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은 것 같은데, 나는 딱히 '좋지 않을' 뿐, 그렇다고 해서 뭐 엄청 나게 '나쁜'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물론 지난 1년 동안엔 그 시간이 매우 많았지만. 그래서 영어학원에서도 Not good이라고 대답했다. Not good과 Bad는 아예 다른 말이다. 난 영어를 잘하지 못하고 어쩌면 둘 사이의 어감에는 매우 큰 차이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Not good이면 그래도 So so 정도는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보단 더 부정적인 느낌이라는 건 틀림없지만.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나는 훨씬 잘 지내고 있다. 행복...이라는 말을 붙일 수 있을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난 회사에 불만이 많고 거의 만족하지 못하면서 다니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회사가 단점만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급여가 적고 동료도 별로지만 확실히 업무부하가 적다.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일을 적게 한다는 게 아니라 난이도 자체가 낮아서 남들만큼 일해도 부담이 안 간다. 이 정도로 업무시간을 여유롭게 활용할 수 있는 직장을 구하기란 쉽지 않을 거다. 그리고 또 생각해 보았다. 지금 회사 사람들과 나는 매우 관계가 좋지 않지만, 반면에 난 예전 직장 사람들과는 다 대체로 관계가 좋았다. 불과 2주 전에도 첫 회사 팀장님 딸의 결혼식이 있어서 다녀왔는데, 몇 년만에 만나는 과장님이나 상무님도 다 나를 반갑게 맞이해 주셨다. 나는 그 회사에 2년도 채 다니지 않았지만 여전히 그렇게 사람들과 관계를 이어 가고 있고, 내 동기들도 있다. 지난해 1월에 통영에 갔을 때도 동기의 방에 머문 덕에 숙박은 물론 매일 저녁도 얻어 먹을 수 있었다. 지금 회사 생활이 불행하다고 해서, 나의 모든 회사 생활이 불행했던 건 아니라는 뜻이다. 한때 나는 회사 생활이 너무 즐겁고 만족스러웠으며, 심지어 행복했다? 고까지 말할 정도였던 때도 있었다.
건강을 위해 동네 체육센터에서 개인지도(PT)를 받고 있는 나는 운동이 너무 싫어서 솔직히 매번 갈 때마다 도살장에 끌려 가는 기분이다. 추운 겨울의 어느 날, 퇴근길에 그런 생각을 했다. '만약 나는 개인지도를 등록하지 않았다면 이런 날 절대 운동에 가지 않았겠구나' 하는. 그렇다고 해서 내가 모든 운동을 싫어하는 건 아니다. 사람들이 권하는 생활형 운동, 개인지도라든지 달리기라든지 이런 것들을 나는 다 싫어하고 정말 하고 싶어 하지 않지만 대신 나는 산에 오르는 걸 좋아하며 산책도 좋아한다. 한라산 백록담에도 7번 이상 오른 것 같은데, 그중 한 번을 제외하고는 날씨가 다 좋았고 심지어 한 번은 아예 구름이 없었던 날도 있었다. 이제는 한여름이 와서 점심시간에 회사 뒷산을 오르는 일도 잠시 쉬게 되었지만, 한여름을 제외하고 봄가을과 심지어 한겨울조차 나는 뒷산에 오르는 걸 즐긴다. 힘들기도 하지만 더울 때만 아니면 확실히 시원하고 쾌적한 기분이 든다. 그래서 가끔은 '행복하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고.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동생들과 같이 성당 활동을 하는 것 또한 좋다. 휴일이 외롭지 않고 다들 정말 나와 잘 놀아준다. 진심으로 내게 아이들이 '형이 좋다'고 이야기해 줄 때, 정말 뿌듯하다는 생각이 든다. 대체로 나는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는 편인데, 몇 주 전에 저녁을 먹는데 열일곱 살이나 어린 동생이 내게 나이가 많은 사람들과도 잘 지내고,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동생들과도 잘 지내는 셈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어깨가 으쓱했다. 물론 한편으로는 사람들을 항상 속이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겁다. 모든 걸 다 솔직하게 터놓고 이야기하고 지내면서도 이렇게 사이가 좋다면 더 좋겠지만, 모자란 대로 지금의 이 관계에도 난 충분히 만족한다.
책을 보고 텔레비전을 보는 시간도 좋다. 사실 나는 시간이 너무 많아서 책과 텔레비전에 시간을 쓰고 있는 셈이라서 가끔은 그렇게 시간을 보내는 내가 너무 한심하다고 느껴질 때도 많지만, 또 가끔씩은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보다가 많은 것을 배울 때도 있다. '아, 나도 저랬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면 다른 사람을 반면교사 삼아 그렇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되고, 또 다른 때는 어떤 명대사를 듣기 위해 이 프로그램을 지금까지 본 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한다. 책을 엄청 공들여 읽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책이 주는 즐거움도 무시할 수가 없다. 특히 책을 읽을 때는 죄책감도 덜 들어서 좋고, 어쩌다 도서관에서 대출기록을 살필 때면 '이렇게나 많은 책을 읽는구나' 싶어서 스스로 뿌듯해지기도 한다.
나도 반포, 압구정, 방배, 잠실 같은 좋은 동네에 살고 싶다.(웃음) 지난번에 살았던 집도 그렇지만 결혼한 뒤로 나는 거의 서울 테두리에 있는 지역에만 사는 중이고 덕분에 출퇴근길이 꽤 멀고 힘들다. 그래도 번잡한 게 싫고 덕분에 서울이면서도 그렇게 복잡하지 않고 자연을 누리며 여유가 있는 지역에서 생활할 수 있어서 좋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집이 자가라면 더 좋겠지.(웃음) 나는 개천 옆의 산책로 같은 걸을 길이 있고, 도서관과 체육시설이 가까이 있는 동네를 선호하는데 대체로 매번 그 조건을 충족시키면서 살았다. 어머니께서는 '여기는 서울 안 같네'라고 하셨지만 이 정도의 동네에 살 수 있는 것도 충분히 좋다고 생각한다.
아내와의 결혼생활이 막판으로 달려갈 무렵, 나도 아내도 우리의 결혼생활에 대한 불만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내도 그렇다고 이야기하는 건, 어느 순간부터 나는 아내가 우리의 결혼생활에 대해 조금 감사한 마음을 가졌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정말 수시로 반복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아내에게 그렇게 이야기한 적도 있었다. 물론 결국엔 아내도 나도 그렇게 하지 못했고 결과는 브런치에 털어 둔 바와 같다. 늘 외롭고 쓸쓸한 건 아니었다. 돌이켜 보면 매번 아내에게 표현하진 못했지만, 아내가 나와의 결혼생활에 만족과 행복을 표할 때도 종종 있었는데 그럴 때면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행복감을 느꼈다. 어느 순간부터 그 행복감이 사라졌고 그래서 나는 어쩌면 외로움과 공허함을 더 크게 느꼈는지도 모른다. 사람은 그렇게 평생 신혼처럼 살 수는 없는 것인데. 모든 것이 완벽했고,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때도 그렇게 나는 행복(하기도)했다.
'너무 행복하면 귀신도 질투한다'는 말이 있다. 실제로 뭐 그렇게 '너무 행복하다'고 느껴 본 적이 몇 번이나 될까 싶고 대체로 사람은 자신이 이미 가지고 있는 것보다 결여된 것에 주목하게 마련이라서 주로 늘 힘들고 아쉽고 서운한 것 위주로 이야기하게 되는 게 아닌가 싶다. 그리고 옛말처럼 너무 좋은 감정은 숨기는 게 나은 법이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친구를 만났는데 갑자기 내가 '나 회사생활 너무 즐겁고 만족하고 행복해'라고 하면 친구는 무슨 반응을 보이겠는가. 그리고 또 세상에 그렇게 완벽한 직장이 있기는 할지도 미지수이고.(그래도 나는 한 곳 정도는 있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내게 맞는 한 곳 정도는. 그러나 내가 그곳을 찾아서 다닐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다시 또 회의적이다.)
나는 늘 100점짜리 인생, 완벽한 인생을 꿈꾼다. 물론 이미 어렵고,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내 인생이 0점이고 최악이라고까지 생각하진 않는다. 모르긴 몰라도 뭐 한 7, 80점은 되겠지. 병원에서 상담하다가 의사선생님이 내게 지금 직장에 점수를 매긴다면 10점 만점에 몇 점을 주겠냐고 물었던 적이 있다. 아마 상당히 낮은 점수를 줄 줄 알고 물어보신 것일텐데 그때 나는 7, 8점 정도는 주겠다고 했고 의사선생님이 무척 놀라셨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이미 가지고 있는 7, 8점에 누가 주목하겠는가. 여기서 2, 3점을 더 올려서 10점이 되면 좋겠다는 마음에 좀 더 눈길이 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게 행복도는 좀 떨어질 수도 있지만 틀린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좀 더 감사한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긴 한다. 그러나 내 인생이 완벽한 건 아니기에 늘 아쉽고 서운하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여러분.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제 인생이 '좋지 않다'고 해서 최악인 건 아닙니다. 제게는 여러분이 있잖아요. 나에겐 좋은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것만큼은 100점 만점에 100점이라고 할 수 있고, 그래서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Not good이라고 해서 그게 반드시 Bad를 의미하는 건 아니니, 그들이 나를 너무 걱정하진 않았으면 좋겠다. 물론 나도 Fine, thank you.면 더 좋겠다. 그런 날이 오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