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운 소식을 하나 접했다. 이번에 어느 대형 상장사에서 이사진을 대거 교체하는데, 대표이사로 동아리 선배가, 사외이사로는 지인 한 분이 동시에 선임된 것이다. 우리나라 주식회사들의 이사진이라고 해 봐야 인원수가 그렇게 많지 않다. 그 회사 사정을 정확히는 알지 못하지만, 이번에 동시 선임된 이사 규모가 채 10명도 안 될텐데 그중 2명이 내 지인이라니. 정말 놀라웠다. 아마 두 사람은 일면식도 없을 것이다. 아침에 축하 인사를 전했더니 아직 만난 적은 없다며 honest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하는 걸 보면.
내게는 엄청난 재주가 하나 있는데 사람을 인지하는 능력이 매우 뛰어나다는 것이 그 하나고, 또 하나는 그렇게 인지한 사람의 관계성을 무척 빨리 찾는다는 게 또 하나다. 순천에 한 달 살이를 다녀와서 놀라운 일이 하나 있었는데, 함께 지냈던 남자 동생이 알고 보니 성가대 동생과 대학 동기였다. 당연히 두 사람은 대학을 졸업하고는 아마 한 번도 연락도 안 하고 지냈을 터이고. 성가대 동생에게 들으니 순천에서 알게 된 동생(성가대 동생에게는 형뻘이다.)이 과는 달랐는데, (다른) 그 과에서 자신이 유일하게 좋아했던 형이라고 한다. 어떻게 알고 지냈냐며 신기해했고,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또 하나의 이야기가 있다. 아마 브런치에도 적었던 것 같다. 첫 회사에서 다른 회사를 인수합병하게 되었는데, 공식 합병 전이라 공식적으로 만남을 가지진 못하고 조심하던 그때에, 나는 첫 회사의 ㅎ팀에 소속되었던 적이 있고, 인수합병되게 된 다른 회사의 ㅎ팀에서는 내 대학 동기가 일하고 있었다. 당연히 그들 사이엔 어떤 연관도 없어서 만나고 싶어도 만나지 못하고 있던 와중이었는데, 중간에서 내가 다리를 놔준 덕분에 그들은 자리를 가질 수 있었다. 그때 나는 당시 유행하던 한식 뷔페를 한 끼 얻어먹었을 뿐이다.
사람이 나이를 들어가면 주위 사람들 사이에 층이 진다. 경제적으로도 크게 성공하는 친구가 나오는 한편(나는 정말 스스로 돈을 벌어 압구정에 아파트를 산 친구가 있다.) 사회적으로도 마찬가지다. 반드시 동갑내기와만 교류하지는 않는 법이니 이렇게 상장사의 대표이사가 나오기도 한다. 1년에 서너 번씩 공부모임에서 얼굴을 뵙던 한 분은 지난해 장관급 직책에 발탁되었다. (올해가 아닌) 작년 연초 신년회에서도 만났었고, 봄에 있었던 공부모임에서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던 것 같은데 그렇게 장관급 자리에 발탁되어 갈 줄은 전혀 예상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 조심한다고 하는 바람에 올해에는 신년회가 없었다. 아마 나는 덜 친해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대표이사가 되는 사람도 있고, 장관 직책에 발탁되는 사람도 있다. 그러고 보니 첫 회사 팀장님과 대화할 때면 늘상 거론되시던 분도 이번에 대표이사에 올랐다. 그쪽은 10대 그룹 안에 드는 자리라서 그냥 상장사 정도로 언급하기엔 아깝다. 항상 팀장님이 그분에게 내 자리를 잘 부탁하겠다고 말씀하셨었는데, 그동안엔 조심해야 했지만 이제는 정말 본인이 대표가 되었다. (물론 오너는 아니다.)
어쩌면 대표가 된 사람에게 취업 청탁 한 자리 정도는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공기업이 아니다.) 그리고 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문제는 이제 내 나이가 그렇게 적지 않다는 데 있다. 마흔줄 중반에 접어들었는데 겨우 부탁해서 그 회사에 사원, 대리급으로 입사할 것도 아니지 않는가. 어디를 가나 마흔줄 중반이면 중간관리자 역할을 해야 하고, 또 영입된 사람은 그만큼의 성과와 능력을 보일 수 있어야 한다. 나는 항상 자신한다. (어디에서 나온 자신감인지 모르지만) 그만큼의 성과와 능력은 보일 수 있다고. 그러나 무슨 근거로 그걸 증명할 수 있나. 낙하산으로 내려 꽂는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을 만한 자료가 있어야 한다. 내게 그런 것이 있나. 그래서 나는 늘 사람들에게 편하게 취업을 청탁하고는 하지만 스스로 잘 알고 있다.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것을. 내 지인이 어느 기업체의 오너여서 정말 편하게 자기 친구에게 한 자리를 그냥 내어줄 정도의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그 정도의 지인인 있지 않다. 결국 나도 다른 사람들에게 뭔가를 증명할 수 있어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난 그런 스펙을 쌓지 못했다.
3년쯤 되었을까. 나는 내가 일하는 회사의 모회사와 이번에 사외이사에 발탁된 분이 당시 기관장으로 있던 어떤 기관과의 양해각서 체결을 주선했다. 내가 모회사의 관리자는커녕 사원도 아니고, 고작 자회사의 직원이었는데 한 공공기관의 기관장과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여서 모회사와 그 기관의 MOU 체결을 주선했으니 정말 엄청난 일을 한 것이다. 이런 말을 하면 웃기지만 내가 아니었다면 그 MOU는 결코 체결되지 못했다. (물론 그 MOU가 양 기관에 어떤 이익을 가져다줬냐고 하면 내가 또 할 말이 없지만서도) 양해각서가 체결되는 자리에 당연히 나도 갔다. 내가 주선해서 만들어진 자리인데 구경이라도 가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 어디에도 내 자리는 없었다. 나는 모회사의 관리자는커녕 직원도 아니었고, 그 공공기관과도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었다. 체결식에서 그냥 인사치레로 몇 마디 들은 게 다였을 뿐이다. (뭐 엄청난 걸 기대하고 한 건 아니었지만)
어쩌면 내게는 그런 역량이 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어느 큰 회사와 다른 공공기관과의 양해각서 체결을 주선할 수 있는. 얼굴도 모르는 새로 선임된 대표이사와 그 회사의 사외이사에게 인사를 나누게 할 수 있는.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정도로는 내게 떡고물의 가루 하나조차 떨어지지 않는다. 왜냐고. 그 사람들이 굳이 나를 챙겨야 할 이유도, 그리고 이익도 없기 때문이다. 내가 어느 정도의 자리를 가지고 있거나 스펙이 있다면 다르겠지만.
실은 나는 속물이라 항상 내게 뭔가 혜택이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을 쉽게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조금씩 깨달아간다. 속물에도 자격이 있다는 걸. 떨어지는 떡고물이라도 주워 먹으려면 나도 뭔가 그럴듯해 보여야 한다는 걸. 다행히(?) 나는 완전히 속물이기만은 하지 않아서 그래도 내 주위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으면, 내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해도 저렇게 양해각서 체결도 주선하고, 서로 필요가 있는 사람들끼리의 자리도 만들어 주고 하고는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늘 아쉽다. 나도 그렇게 어딘가에서 끼어 함께 인사를 나눌 수 있을 정도의 사람이 된다면 좋으련만.
그래도 다행히 내 주위에는 기재(奇才)가 많다. 내가 그 자리를 차지할 수 있다면 제일 좋겠지만,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라도 그렇게 한자리 한자리를 맡을 수 있는 게 어딘가. 아쉽고 안타까운 대로 나는 그렇게 오늘도 사람들에게 쓸데없는 오지랖을 부린다. 그래. 내가 잘 안 되어도 너라도 잘 되면 좋지 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