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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nest Oct 25. 2021

어느 날 있었던 아주 작은 이야기

마음을 고쳐먹는 것도 이렇게 쉽지 않다면

금요일에 있었던 일이다.


어느 회사나 다 지금은 내년도 사업계획을 짤 때일 것 같다. 우리 회사도 그렇다. 열심히 일하고 있으면, 옆에서 팀장이 타닥타닥 계산기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다. 우리 부서의 1년 예산이라고 해 봤자 10억도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연일 그렇게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는 모습을 보다 보면, 우선은 화가 난다.


올해 대비 내년에 세운 목표가 있다면 올해의 사업계획을 바탕으로 해서 대략 몇 %를 더해서 곱하면 10억도 안 되는 부서의 사업계획은 한나절이면 끝나지 싶다. 그런데 그것을 세부항목별로 대강 지출이 얼마일지를 계속 계산하고 있다. 보고 있자면 천불이 난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 저렇게 정확성을 더 높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와중에 생기는 수많은 변수들은? 대략 몇 %를 곱해서 예산을 쉽게 짜라고 하는 것은 그런 변수를 고려함이다. 심지어 우리 부서가 이 회사 예산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도 않다. 도대체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한가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렇게 예산을 짜다가 의외의 수확을 올렸으니, 내가 올해 4월에 집행해야 했던 몇백만 원이 빠진 사실을 발견해 낸 것이었다. 여기에는 나도 사연이 있다. 그 예산을 내가 집행하는 것이 맞는지, 우리 옆 부서에서 집행하는 것이 맞았는지 애매했던 까닭이다.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옆 부서에서 집행했어야 했을 것 같지만, 집행하는 사람 입장에서 생각하면 우리 부서에서 집행하는 것이 맞다. 그래서 기어코 팀장이 사단을 내고 말았다.


팀장 : 이거 올해 내보내야 할 것 같은데...

나 : 내년에 내보내도 상관없잖아요?

팀장 : 그래도 올해에 내보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나 : 누가 돈 달래요? (팀장은 고개를 흔든다.) 아니 누가 돈 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 이걸 왜 굳이 올해 내보내요?

팀장 : 그래도 올해 내보내. 내년에 갑자기 목돈으로 받으면, 기타소득 신고도 해야 할 수 있고, 올해 내보내. 암튼 올해 내보내~


문제는 여기에서 그 돈을 내보내라는 팀장은 이 업무를 전혀 할 줄 모른다는 데 있다. 특히 이 돈은 옆 부서도 얽혀 있는 문제라서 나도 그냥 마음먹는다고 바로 내보낼 수 없다.(물론 나는 30분만 생각하면 내보낼 수 있지만서도.) 안 그래도 나는 다른 일도 많은데, 왜 굳이 지금 내보내라고 아우성일까.(팀장은 내가 한가하다고 생각하니까.) 그래서 나는 결국 저렇게 언성을 높이고 따지게 되고 말았다.




점심을 먹으러 가는데 너무나도 화가 났다. 1) 꼭 하지도 않아도 될 일을, 심지어 내 일인데 왜 팀장이 벌리고 있는 것인지. 지출 부서에서도 내년에 내보내도 아무 상관없다고 한 일이다. 2) 그런 데다가 업무를 명확하게 지시하지도 못하고, 자신도 업무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나 보고 알아서 내보내라고 하다니. 3) 실은 내보낼 돈을 정확히 확인하는 것은 다른 부서의 일인데, 지금 그 부서에서 팀장에게 찬바람을 풀풀 풍기니 나에게 그 확인을 미루고 있고, 또 거기에서 받은 짜증을 내게 풀고 있다는 것에서 매우 화가 났고. 4) 굳이 내게 지금 저 일을 하라고 하는 것은, 실은 팀장 마음속에 '너 지금 안 바쁘잖아'라는 냉소가 섞여 있음을 내가 아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 욕을 참고 살기가 이리도 어렵단 말인가. 군대에서 전역하고 거의 10년 넘게 욕을 하지 않고 살아왔던 것 같은데, 이 날 점심은 정말 팀장에 대한 욕을 끝없이 퍼부었다.(듣게 한 건 아니고...) (사업계획을 계산기로 두드릴 정도로 한가한 팀장이 일하는) 이런 회사를 다닌다는 것에 대한 자괴감에 밥을 먹을 때는 눈물도 고였다.(이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 편에)


(그런데 이게 웬일?) 그러다가 맑은 하늘을 쳐다보면서 생각을 고쳐먹었다. '지금의 이 일이 내게 1년 뒤에도 영향을 줄 정도로 큰일인가?' 생각해 보니 그렇지 않았다. 기분 상하고 화를 내어봤자 나만 손해였다. 나에게는 아직 오후 시간이 있었다. 이런 일 때문에 오전은 망쳤지만, 나의 오후 시간까지 망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더군다나 금요일 오후에 꼭 처리해야 월요일을 무사히 맞을 수 있었다. 지금 와서 돌이켜 보니 (이때까지는) 솔직히 내가 대견하다. 저렇게 생각하고 감정을 수습할 수 있다니. 그렇게 심호흡을 하고 밝은 마음으로 오후 시간을 다시 맞았다.




이제 막 하던 일을 정리하고 관계자에게 메일을 보내려고 마음먹은 순간. 내가 마음을 고쳐먹었다는 것을 눈치챈듯이 팀장이 귀신 같이 말을 걸어 왔다.


팀장 : 근데, 이거 다른 계정으로도 돈이 나갈 게 있잖아. 그것도 안 나갔죠?

나 : (심호흡을 크게 하고) 저는 안 내보냈죠. 근데 그건 옆 부서에서 내보냈을 수도 있어서, 그쪽을 먼저 확인해 보셔야 할 것 같은데.

팀장 : 아니야. 우리가 내보내는 걸 거야. 그것도 이번에 같이 내보내지?

나 : 일단 얼마 내보내야 하는지 확인해 볼께요. (확인 후) 이 계정에선 일정 금액 이상만 집행하기로 해서 다른 것도 한 군데밖에 돈을 안 내보냈어요. 이것도 그냥 내년에 내보낼께요.

팀장 : 그냥 이것도 올해 내보내~


(그래도 작년보단 많이 참았다.) 결국 거기에서 마우스를 던지고 사무실을 나왔다. 방화문을 걷어차고, 흡연실 앞에서 30분 정도 쉬었다가 들어간 것 같다. 사무실에 들어가서는 내내 이어폰을 꽂고 있었기 때문에 퇴근할 때까지 팀장과 한마디도 더하지 않았다.




군대에서 훈련을 받던 시절, 내 별명은 '자살honest'였다. 육체적으로 그렇게 힘들어 본 적이 살면서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자살한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기 때문에 그런 별명을 얻게 된 것이다. (그때 '자살토끼'라는 책이 유행하기도 했지만.) 정말 위험한 순간도 있었다. 그때 곁을 지켜주었던 동기 중에 한 명이 그런 말을 했다. "honest야, 처음엔 너가 너무 힘들고 하니까 그냥 장난같이 말한 것일 수도 있는데, 자꾸 그 말을 반복해서 하다 보면 그 말의 영이 너에게 정말로 오게 돼. 그래서 나는 너가 정말 걱정스럽다." (원래는 출입해서는 안 되는) 생활관 옥상에서 동기에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새삼 깨달아지는 바가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내 삶이 거의 부정적인 단어로만 가득 채워지고 있었다. '이번 생은 망했어', '내 인생이 가장 별로지', '되는 일이 없어', '이게 최악이야' 등등의 부정적인 말만 거듭하다 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부정적인 일이 계속 생겨서 내가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부정적인 단어만 쓰는 것인지, 아니면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부정적인 말을 하니 부정적인 일이 계속 생기는 것인지. 그래서 뭔가 이걸 바꾸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은 이럴 때 나는 '마음을 고쳐먹는다'는 류의 이야기를 가장 싫어한다. 정말 계기가 오려면 삶에 긍정적인 신호가 올 것이다. 그리고 긍정적인 일이 생기고. 그러면 당연히 부정적인 생각과 말을 하지 않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일은 생기지 않았다.


그래서 이 날 점심은 정말 내가 크게 마음먹고, 부정적인 생각을 긍정적인 마음으로 전환하기로 한 것이었다. 그런데. 들어가자마자 다시 또 그런 사단이 났다. 내가 가장 화가 났던 건, 팀장의 불합리한 업무지시 때문이 아니었다. 기껏 정말 (나는 원래 그렇게 할 수 없는 사람인데) 노력하고 노력해서 겨우 마음을 고쳐먹었는데, 고쳐먹은 마음이 채 1시간도 가지 못하도록 내 마음을 엉클어서 원래대로 만들었다는 것이 가장 화가 났다. 나는 아마도 (무능력한 팀장의) 불합리한 업무지시보다도 나의 내 감정을 바로잡으려는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다는 데서 내 감정이 가장 많이 상해 있었다.




며칠이 지나 다시 돌아보니 그런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또 긍정적인 생각을 하려고 노력했다면 어땠을지. 한 번의 노력으로 되지 않았지만, 두 번 시도했다면 어땠을지. 결국 나는 다시 또 부정적인 생각으로 귀결되는 것을 참지 못했던 것 아닌지. 그런 생각이 들어 후회가 된다.


한편으로는 내가 그렇게 마음을 바꿔 먹겠다고 생각한 것이 이번이 처음이었으니까. 다음에는 두 번 노력하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다시 해 본다. (장족의 발전이다.) 이번에는 비록 실패했지만, 다음에는 두 번 노력해 보면 또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요즘 들어 이제 나도 곧 불혹을 앞두고 있고, 지금의 내 삶을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한다.(이것은 다음 편에) 그렇다면 이제 좀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받아들이고, (내가 정말 싫어하는 것이긴 하지만 심지어는) 합리화하려는 노력을 해야 하지 않나 싶다. 어쩌겠는가. 그것이 내 인생인데. 그리고 나는 내가 꿈꾸었던 다음 생을 이번 생에서는 결코 살 수가 없는데.


이번 생은 망했다. 그렇지. 그래도 이럭저럭 괜찮은 생이었다는 생각은 하면서 죽고 싶다. (그리고 이번 생의 가장 큰 목표인, 장례는 꼭 성공한 사람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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