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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nest Nov 07. 2021

생각의 차이

동네에 사는 후배가 교통사고가 났다며 연락을 해 왔다. (노파심에서 말하자면 나는 교통사고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업계에서 일하고 있다. 왜 내게 연락을 했는지는 나도 의문이다. 아마도 돈 안 되는 모든 정보는 내가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닐런지.) 운전 도중 앞쪽에서 갑작스런 정체가 생겼나 본데 후배는 사고를 내지 않고 잘 섰지만 뒤차는 그렇지 못했다. 그 바람에 후배는 뒤차에게 받혔고, 오래된 차의 뒷부분이 상당히 파손된 것은 물론이고, 후배 본인도 무척 놀라 있는 듯했다. 아마도 외상은 없을테지만 심리적인 충격과 몸의 경직이 조금 온 상태가 아닐까 싶다.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 이것저것 이야기해 주는 와중이었다. 큰일을 겪고 나면 사람의 인성이 드러난다고 하던데, 후배는 정말 훌륭한 성품을 보여 주었고, 나는 연신 그 점을 칭찬했다. '이만하기가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그래도 사람 안 다친 게 어디에요'(실은 본인은 몸과 마음을 다쳤으면서), '정말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왔어요'. 실로 놀라웠다. 원래부터 착하고 훌륭한 후배인 줄은 알고 있었다.(그래서 나와 선후배로 지낸다고 생각한다. 인성이 안 좋다면 내 친구가 될 수 없지. 내 인성이 안 좋기 때문에.) 그러나 그렇게 막연하게 생각했던 때와는 또 다르게 이렇게 후배의 훌륭한 성품과 생각을 직접 겪고 나니 더욱 놀라웠다. 실은 감탄의 연속이었다.


지난해 나도 교통사고를 겪었다. 그것도 무려 두 번이나. 태어나서 처음 겪은 사고가 바로 후배가 이번에 겪은 사고와 아예 같았다. 다만 다른 점은 후배는 피해자였고, 나는 가해자였던 것. 딴 생각을 했다거나 졸았다거나 한 것은 아니다. 그저 흔하게 발생하는 유령정체인 줄 알고 앞차들이 속도를 줄이다가 금방 다시 내겠거니 하는 마음에 브레이크를 천천히 밟았다. 그런데 이게 웬걸. 종국에는 갑작스럽게 다들 그냥 서는 것 아닌가. 결국 여유 부리던 나는 앞차를 들이받고 말았다. 원래 내가 과속하는 스타일은 아니기도 하고 브레이크를 세게 밟지 않았다뿐, 밟고는 있었기 때문에 그리 충격이 심하진 않았다. 그래도 사고는 사고였다.


물론 나는 후배와는 다르게 사고를 낸 입장이긴 했지만 어쨌든 똑같이 사람이 많이 다치지 않았고, 자동차도 아주 심하게 파손된 정도는 아니어서 후배처럼 '그래도 이만하길 얼마나 다행인가' 하고 생각할 여지가 없지 않았다. 그런데 같은 경험에서 나는 어떠했던가를 돌이켜 보면 후배와는 정말 하늘과 땅 차이였다. 그날 나는 친구 덕분에 회의비를 받으러 먼곳을 다녀오던 길이었고 생각지도 않은 공돈에 아주 기뻐하고 있었다. 그런데 올라오던 도중에 예기치 못한 사고를 겪은 것이었다. '아, 이렇게 될 것 같았으면 차라리 회의비를 받으러 가지 않은 것만도 못하지 않은가', '이렇게 사고 날 것 같았으면 아까 고민하던 빵집에 들리는 건데. 그 빵집에 들렀다면 저 일시 정체를 피할 수 있었을테니 사고가 나지 않았을 것 아닌가', '이제 이 사고로 앞으로 보험료 손해 볼 것 생각하면 회의비보다도 더 손해네' 등등. 스스로 '그래도 사람이 다치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이냐'라고 합리화하려는 생각을 아예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서도 대체로 내 머릿속을 지배하던 것은 저런 부정적인 후회와 감정들이었다. 후배가 연신 '그래도 이만해서 감사한 마음이에요'라고 이야기하는데, 작년의 내 모습이 떠오르면서 무척 비교가 되었다.




당연히 가장 좋은 것은 사고를 겪지 않고 무사한 것이다. 아무일도 없었던 것보다 더 나은 것은 없다. 사고가 나지 않았다면 그것이 최선이었겠지만 이미 사고가 생긴 이상 어쩌겠는가. 하물며 그 사고를 일부러 내거나 겪은 것도 아닌데.


나는 부정적인 상황임에도 일부러 그것을 합리화하며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려고 하는 것에 매우 회의적인 사람이다. 긍정적인 일은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나쁜 일은 나쁜 일로 받아들이면 된다. 물론 굳이 긍정적인 일까지 나쁜 일로 환원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나쁜 일을 나쁜 일로 받아들인다고 했을 때, 굳이 그것을 부정적인 생각으로 뒤덮고 계속해서 곱씹고 후회할 필요가 있을까. 그렇게 하면 그 상황이 바뀌나. 사고를 겪은 후배가 반복해서 '(이만하길) 감사하다'고 이야기하는 모습이 내 경우와 대비되면서 정말 많은 생각이 들었다. 물론 사고가 난 것까지 감사할 필요는 없다. 감사해 할 일도 아니고. 그러나 사고는 이미 난 것 아닌가. 어쩌겠는가. 이것을 부정적인 일로 받아들인다고 해서 과거로 돌아가서 사고를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미 주어진 것을 주어진 것 그대로 수용하는 자세, 그리고 그 과정에서 현재 나에게 주어진 것에 감사하는 모습은 아주 좋아 보였다.


'물이 반컵이나 남았네', '물이 반밖에 없구나'. 흔히 긍정적인 사고와 부정적인 사고를 이야기할 때 드는 예시다. 굳이 억지로 어느 쪽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냥 '물이 절반 찼구나' 하고 생각하면 충분한 것 아닌가. 다만 이번 일을 겪으면서 생각한 것은 내가 목이 마를 때, 굳이 저 상황에서 '아 목이 마른데 물이 반밖에 없네'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는 것 아닌가. 내게 지금 간절히 물이 필요하다면 절반이라도 남아 있는 것이 다행스럽다. 아예 없거나 바닥만 찬 것보단 낫지 않은가. 거기서 늘 예전의 나처럼 '아, 이럴 줄 알았으면 물을 채워 뒀어야 하는데', '왜 물이 반밖에 없지' 하고 곱씹을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요즘 내게 딱히 좋은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뭔가 긍정적인 변화의 계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런데 차츰 이렇게 마음을 바꾸어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걸 보니 나도 이제 늙는가 보다. 어쩔 수 없는 현실을 이렇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마흔을 '불혹'이라고 표현한 데에는 역시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지 싶다. 한동안 '불혹'이 우리 나이로 마흔인가, 만으로 마흔인가 궁금했었는데, 요즘 내 변화를 보니 우리 나이로 마흔이 맞는가 보다. 쓸데없는 사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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