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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nest Feb 20. 2022

좋은 사람들에게 감사할 일들

지난 연말, 주위 사람들에게 정말 과도하다 싶을 정도의 관심과 친절을 베푼 적이 있다. 지나친 오지랖이라고 해야 맞겠으나 덕분에 한 사람은 회사에서 본부장으로부터 친분 인사를 받았고, 또 다른 사람은 일자리를 구했으니 내 경우엔 오지랖이라고 치더라도 그들에겐 반가운 관심이었을 것이다. 친절을 베푸는 한편으로는 조금 서운한 마음도 없지 않았다. 나는 항상 내 주변 사람들의 더 나은 삶을 위해 이렇게 24시간 일주일 내내 애쓰건만, 내 주위 사람들은 왜 아무도 나를 위해 이렇게 애써 주지 않는단 말인가. 한 친구에게는 서운함을 엄청 토로하기도 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살면서 나는 늘 '인복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살았고, 지금 잠시 그 인복이 쉬어 가는 타임인지는 몰라도 좋은 사람들에게 감사해 할 일이 셀 수 없이 많이 있었다. 그저 사람은 자신이 받은 것은 쉽게 잊어버렸을 뿐인지도 모른다.




조금은 지루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다.


모범생은 늘 선생님들로부터 사랑과 관심을 받는다. 내 경우에도 그랬다. 돌이켜 보면 초등학교 때부터 중학교 때까지 한 번도 내가 주인공이지 않았던 시절이 없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는 3학년 때 담임선생님의 대학 동기가 내 담임선생님을 맡게 되셨었는데, 동기에게 전화해서 내 얘기를 잘 해 주셨다고 했던 기억이 난다. 그뿐인가. 조그만 시골 동네에 있던 학교였기 때문에 온갖 표창이며 상장, 장학금 등등도 모두 선생님들께서 유독 잘 챙겨 주셨었다. 요즘 시대에 비추어 보면 공정이 아닌 특혜라고 비추어질 정도로. 초등학교 때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졸업식이나 졸업 행사에서 장학금을 받지 못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내가 몇 개 정도에서 대표가 될 수 있나 생각하곤 했었다. 어른이 된 이제 와서 돌아 보니 하나도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그때는 그게 당연한 줄 알았다.


손꼽히는 대학에 들어온 뒤에는 어쩌면 나도 평범한 학생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지만, 2학년 때는 한 교수님 덕분에 대학원 선배들 사이에 끼어 공부하는 호사를 누리기도 했었다. 나는 대학원을 갈 때 그 과로 진학하진 않았고, 다른 선배들에게 혹시 그 과 교수님이 직접 진학하라고 권유하신다면 다시 생각해 보겠다는 아주 거만한 말을 내뱉었었는데, 나중에 다시 생각해 보니 그 정도면 교수님께서는 상당한 관심을 이미 보여 주신 것이었다. 그때만 해도 그게 당연한 줄 알았다. 전공을 두 개 한 덕에 대학원으로 진학했던 다른 과 교수님들께서도 항상 어여삐 여겨 주셨고, 학생을 편애한다는 이유로 '고등학교 선생님'이라는 좋지 않을 별명이 있던 교수님께도 나는 A+를 받았었다. 실은 같이 수업을 들은 친구가 훨씬 더 열심히 했고, 아마 시험도 더 잘 보았을텐데. 그때 나는 우리 단과대학 건물 앞에서 3보에 한 명씩 아는 사람이 있다고 할 정도였다. 내게 20대가 그리움으로 남아 있는 건 바로 그런 행복한 경험 때문일 거다.


장교로 군대에 갔던 까닭에 20대의 1/3 이상을 나라를 위해 바쳤건만 나는 지금도 그때의 그 선택은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 복무기간은 훨씬 길었지만 대신 나에게 주어진 자율성이 훨씬 많았고, 그때 당시에는 갑갑하고 제약이 많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제 와서 돌이켜 보면 왜 그랬나 싶다. 더 즐겁고 신나게 그 시간을 보낼 수도 있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내가 그 시간이 엄청 힘들고 괴로웠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부대 내의 몇 안 되는 장교였고, 또 나는 그 부대에 들어가서 1년도 채 안 되어 왕중위(중소위 중 최고참)가 되었다. 두 명의 후배는 자기들은 전역할 때까지 왕중위가 못된다고 불만 아닌 투덜거림을 보이기도 했었는데, 지금도 연락하고 지내는 좋은 선후배와 함께 신나기...까지 하진 않았겠지만 나쁘지 않은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전역한 뒤 첫 직장에 들어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 팀에 처음으로 온 공채 출신 신입이었다. 그때도 지금처럼 비정규직이 만연했던 시절이었고, 정규직 남자 막내이면서 공채 출신이었던 까닭에 회사는 정말 즐겁게 다녔던 것 같다. 팀장님이나 파트장님 모두 나를 아들처럼 대해 주셨고, 같은 팀 바로 맞선임과의 사이도 좋았다. 생각지도 않게 우리 그 회사에는 우리 고향 향우회가 있어서 알게 모르게 음으로 양으로 챙겨 주는 선배분들도 계셨고, 기획본부 소속이었던 까닭에 임원들을 만날 일도 많았다. 사장님의 개인적인 부탁을 들어드리고 사장실에서 백화점상품권을 한 장 받았던 것도 생각난다. 지금도 기억하면 아쉬운 것은 그 회사를 그만둘 때다. 내가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했을 때 인사팀에서는 원하는 팀은 어디든지 보내줄 수 있다고 했었고, 팀장님은 대학원을 다녀야 해서 그만두는 거라면 수업 있는 날은 자기가 출근 처리를 해 놓을 테니 남은 3일만 출근해도 된다고 하셨다. 그때만 해도 순진하고 어려서 그런 조건을 받아들일 줄 몰랐다. 내가 이번 겨울 무리해서 팀장님 아들의 일자리를 알아본 것도 꼭 그때의 그런 호의를 보답해야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대학원으로 돌아온 뒤는 또 어땠나. 의외로 학업에 부진을 보이며 석사를 받지 못할 위기에 처했었고, 실은 나는 석사학위는 그냥 포기한 상태였다. 그러나 교수님들께서 'honest는 그래도 석사는 챙겨서 내보내자'는 합의를 해 주셨던 덕분에 졸업장은 받을 수 있었다. 석사를 졸업하면서 다시 응시했던 모든 회사의 공채에 다 떨어졌건만, 전 회사에 계셨던 과장님께서 내 선임자가 회사를 나갔다고 다시 불러주셨다. 어떻게 생각하면 특혜 채용이라고 할 만큼 별다른 채용 과정도 없이. 지금 회사로 옮길 때도 전에 있던 팀장님의 배려가 큰 역할을 했다. 이 회사로 옮길 때는 공채였기 때문에 모든 과정을 다 거치긴 해야 했지만, 그때 그 팀장님께서 신경 써 주지 않으셨다면 어려웠을 거다. 동종업계로의 이직이었던 까닭에 전 회사의 과장님께는 큰 폐가 되는 일이었고, 그분이 막았다면 옮기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분은 넉넉한 마음으로 보내주셨다.


그런데 과연 나에게 감사할 일과 감사할 사람이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한 번은 곰곰이 왜 나는 만족하지 못하고 감사해 하지 못하게 되었는가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이 있다. 그러고 보니 삼십대 초반까지의 나는 항상 주인공이었다. 학교에서야 공부 잘하는 아이가 주인공이 되기 십상이니 그렇다고 쳐도, 대학에 들어오고 나서도 그리고 군대에 가서도 회사에 입사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내가 그 조직들에 오랜 시간 있었을 경우 그때도 계속 주인공이었을 거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나는 첫 회사를 2년 남짓 다녔기 때문에 주인공이었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점점 나는 주인공의 자리에서 밀려나기 시작했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그렇다. 이제 나는 이 세상에서 주인공이 아니다. 심지어는 우리 가족 안에서도.


결혼할 때 왜 그렇게 신났었는지가 이해되었다. 몇 년만에 그렇게 내가 주인공이 되는 경험을 처음 해 보았던 것이다. 이 회사에 들어오기 직전 천주교 피정을 2박 3일 다녀온 적이 있는데 왜 그때도 그렇게 신나고 사람들과 잘 사귀었었나. 나는 피정 간 곳에서 몇 없는 비신자였다. 사람들의 그런 관심과 호의가 내게는 너무나 오랜만이었고 반가웠던 것이다. 비로소 이제와서야 이해가 된다.


이제 나는 우리 가족 안에서도 주인공이 아니다. 한때 고마우면서도 좀 의문이 들었다. 아내도 이상하게 생각했던 것인데 왜 나는 우리 가족에서도 처가 모임에 가서도 항상 내가 주인공 자리에 앉게 되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하나둘 조카가 태어나면서 나는 주인공의 자리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그렇지만 전혀 슬프지 않다. 자라나는 어린아이와 새로운 세대에게 자리를 양보해 주는 것은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할 일이고, 실은 나도 조연으로서 조카를 바라보고 함께 노는 것이 너무나도 즐겁다. 아이가 주인공이 되는 것이 나에게도 아주 신나는 일이다.


새해에 불혹이 되었다. 지난 수 년 간 나는 왜 내가 주인공이 되지 못하는지 받아들이지 못했고, 오랜 내 삶에서 감사해야 했던 일들은 다 잊어버리고 무언가 불평과 불만에 휩싸여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제는 내가 주인공이 아닌 게 당연한 나이가 되었고, 또 내가 주인공이 아닌 것에 불만이 있는가 했더니 그렇지도 않았다. 실은 나도 조카의 곁에서 조연으로 있는 것이 너무도 흡족하고 만족스럽다. 삼십대엔 내내 그렇게 불만 속에 있었는데 불혹이란 말의 의미를 이렇게 깨닫는다. 그때는 아직 젊어서 이런 변화를 미처 깨우치지 못했던 것이다. 감사해 할 사람들과 고마운 일들이 살면서 이토록 많았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복 받은 사람이지 싶다. 언제까지고 내가 세상의 주인공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리고 또 어떤가. (너무 교과서적인 말이지만) 그래도 나는 내 삶에서는 주인공이고, 여전히 친구들을 만나면 개중에서는 빅마우스로 살고 있다. 이만하면 주인공은 못 된다 해도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삶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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