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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송 Nov 28. 2020

평범함, 그 위대함

 어릴 적 즐겨 보던 만화 '영심이'가 장학 퀴즈에 나갔던 에피소드가 있다. 얼떨결에 퀴즈 대회에 나간 어리숙한 영심이가 똑똑하지만 성질 급한 경쟁자들이 성급하게 나서다 오답이어 감점을 당하고, 아무 것도 모르던 영심이는 가만히 있어서 기본 점수만으로 선두를 달리다 마지막에 시조의 작가를 묻는 문제에서 '작자 미상'인 작품의 작가를 '몰라요'라고 답했다가 우승까지 차지하는 이야기. 어찌나 깔깔대며 봤던지, 수십 년이 흐른 지금도 그 장면만큼은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우리 반 J는 말 수가 별로 없는 아이이다. 굳이 찾아 보지 않으면 있는지도, 없는지도 모르는 아이. 조회 시간엔 어김없이 자리에 앉아 있고, 단 한 번도 조퇴도 결석도 하지 않고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아이. 아이들에게 무언가를 전달하면, 제일 빨리 마치고 또 가만히 자리에 앉아 있는 아이.

 

  학생부에 기록할 때 이런 아이들의 난도가 제일 높다. 딱히, 칭찬할 만한 일도, 흠을 잡을 일도, 기억에 남는 일도 없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성실하게 학교 생활을 잘 '과 비슷한 문장들을 몇 개 주욱 나열하고 끝난다. 헤어지고 나서도 이런 아이들의 이름은 기억에서도 빨리 지워진다. 이름마저도 평범한 경우가 많아, 특징적인 모습이 머리에 남아있지 않는다.


 그러나 J는 올 한 해 우리 반에서 가장 빛이 났던 아이이다. 코로나로 학교 일정이 몇 번이나 바뀌고, 아이들이 수시로 들락거리는 와중에도 한결같이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입시 관련한 성적이 마무리 되고 난 후에는 교사인 내가 봐도, 학교에 딱히 오라고 할 명분이 없어서, 대부분의 아이들이 결석을 하고 서너 명만 교실에 남아 있었던 때도 J는 늘 같은 모습이었다.

 현재 입시 과정 전체는 아이들에게 '너의 합격을 위해 필요한 것과 필요하지 않은 것을 명확히 구분하고, 필요한 것만 택해서 집중할 것'을 끊임없이 강요한다. 이런 분위기에 눈치가 빠른 아이들은 고3이 되어 입시를 당면하면 자기에게 적당히 필요한 것만을 하는, 개인주의의 극단으로 치닫는 경우가 많다. 사회에서 1,2년 차이는 별 거 아닌 걸로 보이지만, 입시를 목표점에 두고 살아가는 아이들은 고등학교 1학년과 2학년, 2학년과 3학년, 3학년에서도 1학기와 2학의 모습이 확연히 달라질 때가 많다. 올해는 변화의 속도와 범위가 빠르고 컸다. 코로나로 뒤숭숭한 속에서, 다들 자기에 유리한 것들을 취하고, 필요없는 것들은 아예 신경쓰지 않는 모습들이 더 다수의 아이들에게, 더 심하게 나타났다. 불안하고 조급한 마음에 10대의 미성숙함까지 곁들여진 아이들의 모습에, 교사도 적응하지 못하고 '요즘 아이들은'으로 시작하는 두터운 벽을 쌓곤 했다.

 그 와중에 변하지 않는 J의 모습은 두드러졌다. 학기 초반, 고3이라는 긴장감에 가득 찬 아이들이 교실을 메우고 있었을 땐 보이지 않던 J가 옆에 있던 아이들이 하나, 둘 흔들리기 시작하자, 영심이가 기본 점수를 지켜나가다 1등을 차지한 것처럼, 자신의 모습을 지켜가던 J가 눈에 띄기  시작했다.  상황이 어떻건, 주변이 어떻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고, 늘 평온한 모습의 J는 교실이 붕괴되고 나니, 모두가 빠르게 변해버리고 우왕좌왕해 하는 속에서 드디어 진가를 발휘하였다. 만화 속에서는  영심이가, 뜻하지 않은 행운을 얻은 것처럼 그려져 어렸을 적 만화를 볼 때는 웃고 넘겼지만 나이가 들고 보니 그 속에서 영심이가 꿋꿋이 앉아 있으며 기본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는지를 새삼 절감한다. 


 위기 상황에 맞닥뜨리면 사람들이 그동안 숨겨왔던 약점들이 극명하게 노출되곤 한다. 반면, 위기 상황에서 유독 빛을 발하는 이들은 자신만의 리듬을 찾고 빠르게 안정감을 회복하는 사람들이다. 당장 내일이라도 어떻게 되어 버릴 것 같은 위태로운 소식들이 매일 들려도, 여전히 나와 우리가 일상을 살 수 있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자리를 묵묵히 지키는 J같은 이들이 사회의 곳곳에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드러나지 않는 평범한 사람들. 오늘도 변함없이 아침을 맞이하고, 하루를 보내게 해 주는, 우리의 영웅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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