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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송 Nov 27. 2020

원격의 거리

 어제는 줌에서 일본 분들을 대상으로 한국어 수업을 했다. 지난 겨울, 일본에 여행차 갔을 때 길에서 우연히 만나 이야기를 나누던 할머니와 연이 닿아 연락을 주고 받다가, 그 할머니가 참여하고 계신 온라인 요가 클래스에 나를 초대해 주셔서 함께 수업을 받았고, 참여한 사람들끼리 자기 소개를 하다 내가 한국에서 국어를 가르친다고 하니까 한국어를 배우고 싶다며 수업을 한 번 해주면 안되겠냐는 분들이 계셔서 시도해 보았다. 서툰 일본어로 한국어를 가르친다는 게 부담스러워 교재를 사들이고, 몇 시간동안 자료도 만들고, 일본어로 수업 대본까지 쓴 후, 수업 전날에는 혼자 리허설도 해 보았다. 

 그리고 대망의 수업일. 

 참가한 분들은 70살 할머니부터, 두 살 난 딸아이를 안고 등장한 삼십 대 애 엄마까지 다양했다. 기대했던 것보다 기초 실력들이 탄탄했고, 다들 한 글자 한 글자 받아 적어가며 열성적으로 수업에 참여하셨다. 무엇보다 미리 준비한 대본에 없는 이야기를 해야 할 때는 단어 사용도 문법도 엉망진창이었는데, 한 마디도 놓치지 않으려고 귀기울이는 모습들을 보니 긴장이 되면서도, 짜릿했다. 

 수업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서니 나도 모르는 새에 얼굴은 상기되어 있고 엉덩이에도 땀이 나 있다. 

 

이렇게 수업 다운 수업을 해 본 게 얼마만이냐. 


 올 한 해 학교의 아이들과는 이런 느낌을 받은 적이 전혀 없다. 급박히 시작했던 원격 수업에서는, 서로 적응이 안 된 상태에서 내가 강의를 녹화해서 올리면 아이들이 그것을 보는 수준이었다. 이미 그런 수업에 익숙해진 아이들이 학교에 나타났을 때에는 다시 한번 서로가 오프라인 상에서의 만남에 적응이 되지 않아 무엇을 이야기해도 반응이 없어, 수업을 마치고 나면 우스갯 소리로 교탁하고 수업하고 온 기분이라고 얘기하곤 했다. 

 수업이라는 것은 역동적인 과정이다. 제아무리 주입식, 강의식 수업을 한다고 할지라도 한 교실 안에서 교사와 아이들, 아이들과 아이들이 서로 주고 받는, 현장에서만 느껴지는 에너지가 있다. 그 속에서 서로만이 알 수 있는 긴밀한 유대감도 생겨난다. 그렇게 수업은 교사와 학생이 함께 만들어 간다.  그러나 역동적 에너지가 사라진 교실에서는 허공을 떠도는 말잔치만 줄을 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와 가장 가까이 있었던 아이들과는 이런 수업을 해 본 적이 없는데, 만나 본 적도 없고, 국적도 다르고, 참가한 분들마저도 일본에서도 열도의 이쪽 저쪽에 흩어져 살고 있는데도 가상의 회의실에서 소통하는 수업을 만들어냈다. 

 물리적으로 거리가 가까웠던 이들과는 심리적인 원격 상태가 되고, 거리가 먼 이들과는 가까워진 이 이유는 무엇일까? 나도 그들도 줌이라는 화면 안으로 불러낸 것이 다른 이들이 아닌, 자기 자신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비로소 올해 학교에서 아마 가장 많이 사용됐을 '원격'이란 단어의 '원(遠)'은 상대적인 의미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올해가 막바지로 치달으며, 내년에 대한 걱정이 앞선다. 올해는 예상치 못한 돌발상황에서 힘든 점도 있었지만, 그것이 어수선한 상황의 핑계가 되기도 했다. 아이들에게 신경을 좀 덜 써도, 수업이 엉망이어도 '코로나'라는 든든한(?) 방어막이 있었다. 내년도 올해와 비슷한 상황이 이어지리라 누구라도 예상하는 시점에, 아이들과 교사의 관계에서 올해와 같은 거리감이 유지되는 일도 없어야 한다. 무엇을 가지고 어떻게 나를, 아이들을 더 가깝게 만들어야 할지, 컴퓨터 화면 속과 교실 안에서의 모습들이 서로 어떻게 이어져나가야 할지 고민해야 하는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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