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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송 Nov 26. 2020

그런 날

 이를테면 그런 날이 있다. 하루종일 무언가 안 풀리고, 온 우주가 내 편이 아닌 것 같은 날.  

오늘이 나에겐 '그런 날'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서, 푹 잤는데도 뭔가 불쾌한 느낌이 남아 있고, 자질구레하게 신경을 써야 하는 일들에 집중이 안되고, 오늘 따라 내가 신경을 덜 쓴 지점들만을 콕콕 찝어 잘못을 지적하는 누군가가 있고. 유난히 사람들이 예사롭게 하는 말들도 날카롭게 들리고, 오랫동안 공들여 준비해 왔던 계획이 하나 둘씩 뜻하지 않게 어그러져 가는 모습이 보이고. 하필 오랜만에 로그인한 어플과 사이트들에서 비밀번호 입력에 몇 번이나 실수를 한 탓에 두 군데나 계정이 잠겨 버렸다. 퇴근해서 집에 오니, 애들은 숙제를 잔뜩 쌓아둔 채 뒹굴고 있고, 남편은 술을 먹고 늦어진다고 연락이 왔다. 정말 한 순간도 내 뜻대로 되는 일이 없었던 하루.

 

 에라 모르겠다. 밥이나 먹자. 뭘 차려 먹을 의욕도 없어서 흰 밥과 시골에서 막 올라온 김장 김치만을 꺼내 식탁에 올려두었다.

아삭,

배춧잎을 한 잎 배어 문 순간, 눈물이 핑 돈다. 자식들 생각하며 하루에도 대여섯 번 밭에 드나들며 배추를  키워 오신 아버지의 정성 때문인지, 자식들 먹일 욕심에 온갖 수고로운 과정에도 며칠에 걸쳐, 좋다는 것은 다 넣어 김장을 하신 어머니의 솜씨 때문인지.

김장 김치는 달착지근한 배추에 붙어 있는 건 양념들이 입안 곳곳에 자리에 머물다 꿀꺽 삼켜진다. 밥을 다 먹고 아버지께 전화를 드렸다.

 "김장 김치 맛있게 잘 먹고 있어요."

 "그래, 내가 너희 좋은 거 먹이고 싶어서 약 하나도 안 하고 키운 건께. 몸에도 좋을 거여. 많이 먹어라. 이번에도 김치가 참 맛나게 담가졌더라."


 전화를 끊고 나니 비로소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다. 하루종일 내 뒤에 끈덕지게 붙어 다니던 여러 일들이 아삭, 소리와 함께 기억의 뒤편으로 밀려난 느낌이 들었다. 다시 잠이 들고 내일을 맞이할 힘이 생겼다.


 그래서 오늘을 기록해 둔다.

언젠가 내가 또 비슷한 일들을 겪을 때, 누군가가 이런 감정들을 겪고 있을 때

작지만 뜻밖의 것들이 따뜻하고 강한 위로가 되어 줄 수 있음을, 나도 누군가에게 사소한 위로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하고 되새기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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