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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송 Dec 16. 2020

오디션

 첫째 아이가 학교 동아리 오디션에 응시했다. 아이가 도전한 것은 연극 동아리였는데, 욕심이 많고 꼼꼼한 첫째는 며칠 전부터 오디션 대본을 끼고 살더니 틈만 나면 동생을 꼬드겨 연습을 하곤 했다. 전날 밤도 늦게까지 협조를  안 해 주는 동생 대신 인형까지 동원해 한참을 연습하다, 다음날엔 새벽에 깨워달라고 하더니 나름 최종 리허설까지 하고 학교에 갔다. 아이의 모습을 보며 내심 나도 저 정도면 합격하겠지, 하고 별 의심을 하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 몰라서 오디션 전날, 오디션에서 얼마든지 떨어질 수 있다고 얘길 하니, 첫째는,

 "그럼, 나는 오디션에 도전했다는 것 자체만으로 좋아. 오디션에 붙고 안 붙고는 큰 상관없어."라며 의연하게 대답을 하는 모습에 더 믿음이 갔다.

 

 오디션을 본 당일에도 긴장해서 대사를 조금 빨리해서 망했다며 울상을 짓긴 했지만, 같이 오디션을 본 친구들은 아예 대사를 죄다 틀리더라며 나름 기대를 하는 모습이었다.  


 어젯밤, 침대에 누워 느긋하게 책을 보고 있는데 아이가 방에 뛰어 들어 왔다.

"엄마, 엄마! 학교에서 오디션 통과한 애들 문자로 알려줬다는데, 엄마 문자 받은 거 없나 봐봐!!"


부랴부랴 휴대폰을 들고 찾아 보는데 사방팔방에서 급증한 코로나 확진자 수를 알리는 알림 문자만 잔뜩 와 있을 뿐, 다른 소식은, 없다.


 "없는데. 문자로 보냈단 게 맞아?"

 "내 친구 H도, T도 엄마한테 문자가 다 갔대. 나 어떡해?"


 대성통곡의 시간이 찾아왔다. 떨어져도 괜찮다고 해놓고, 자기가 은근 속으로 무시했던 애들은 죄다 붙고 자긴 안되니 자존심도 상하고 속이 상했던 모양.

 아이를 달래면서도, 나도 사실 결과가 믿기지 않아 몇 번이나 문자 메시지 내역을 뒤지고 또 뒤져보았다.

 그때부터 시작된 갖가지 위로, 위안의 말들 대잔치.

 

 "우리 딸, 누구보다 열심히 준비하고 도전한 거 엄마가 아는데, 그렇게 했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최고야."

  "엄마 보기엔, 너무너무 잘 했는데, 네가 너무 앞 순서여서 불리했을 수도 있어. 엄마도 뭐 심사하라고 하면 먼저 한 애들은 비교 대상이 없으니까 점수를 낮게 줄 때가 있어."

 "남들 동아리에서 연극 연습하는 시간에,  너는 더 재밌고 알찬 걸 하면 되지."

  

 "엉엉엉, 너무 억울해. 엉엉엉. 나는 대사도 틀리지 않고 다 했는데. 엉엉엉. 기회도 이번 한 번 뿐이었는데. 엉엉엉."

 울음이 쉽사리 그치지 않는다. 이제 유명인들의 실패담이 등장할 시간.

 "아이유가 지금은 노래도 잘 하고 엄청 인기도 많지만, 아이유도 예전에 오디션 진짜 많이 떨어졌대."

 (재빨리 '아이유 오디션 탈락'이란 단어를 검색)

 "아이고, 아이유는 15번이나 떨어졌다네. 누구든 이렇게 실패를 겪기 마련이야. 아이유가 한 두 번 떨어졌을 때 억울해하고 실망하며 다시는 안 하겠다. 이랬음 지금과 같아졌겠니?"

 울음이 좀 잦아들며 내 말을 듣기 시작하는 아이, 음, 좀 더 달래보자.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에서도 유명한 배우들이 있거든?(머릿속에 송강호와 전도연이 스침.) 그 사람들도 연기 시작하자마자 잘 나가고 모든 오디션에 합격하고 그랬던 게 아니야. 첨엔 오디션 보고 정말 많이 떨어졌대. 다 그런 거야."


 감정을 좀 추스르는가 싶더니 '연기'란 단어에 다시 눈물을 터뜨리는 아이. 나도 당황스러워 앞뒤를 재지 않고 에라 모르겠다, 아무 말이나 내뱉고 보자.

 "네가 그렇게 연기를 하고 싶으면, 연기 학원 같은 데라도 다니면 되지?(나도 모르게 튀어 나온 마음에도 없는 소리) 적어도 오디션을 준비하고, 떨어졌을 때 이렇게 속상한 거 보니까 그래도 연기가 얼마나 재밌고 하고 싶었는지는 알았잖아. 그럼 우린 다른 데서 배우면 되지. 그리고 학교 동아리 선생님은, 사실 직업이 연기자가 아니니까 연기에 대해 잘 모를거야. 제대로 하고 싶으면 다른 데서 배우면 돼."


 연기 학원 이야기에 귀가 번쩍 뜨였는지, 울먹울먹하다 겨우 울음이 그쳤다.


 몇 시간 후, 다시 안방에 찾아 온 첫째.

 "엄마, 나 근데 너무 속상해. 훌쩍. 진짜 하고 싶었는데, 훌쩍."


 그땐, 나도 마음이 좀 가라앉아 있던 때라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너 얼마 전에 책에서 '새옹지마'란 이야기 봤지? 엄마는 그 말이 그렇게 좋더라. 힘든 순간 그 단어를 떠올리면 힘이 되더라고. 지금 오디션에서 떨어진 건 속상할 수밖에 없어. 누구보다 열심히 했으니, 당연한 마음이야. 그런데, 지금은 속상해도 그게 나중에 돌이켜 보면, 더 좋은 기회로 보답이 올 수도 있고. 오디션에 붙었음 당연히 좋았겠지만, 그러다 그것 때문에 안 좋은 일이 생길지도 모르는 일이고.  그리고 여기서 떨어졌으니, 너는 다음에도 다른 동아리에 지원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거잖아? 떨어졌다고 생각하지 말고 기회가 생겼다고 바꿔서 생각해 봐. 너는 아직 어린데, 앞으로 이런 실패나 실수의 경험들을 엄청 많이 하게 될 거야. 지금 성공했다고 하는 사람 중 실패의 경험이 없는 사람은 없어. 실패나 실수를 했는지 안 했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런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겪어내는지가 훨씬 중요해. 실패를 해놓고 남 탓을 하고, 억울해 하고, 실망하고, 좌절만 하고 있는 사람에겐 다음 기회가 오지 않지만, 실패를 하고서 뭐가 부족했는지, 다음에 무엇을 더 해야되는지를 알고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더 큰 기회들이 오기 마련이야. 이건, 네가 커 가면서 겪을 수밖에 없는 일이고, 커가는 과정이야. 이런 기분을 느끼고, 잘 이겨내고 나면 마음이 훨씬 커질거야. 오디션 떨어져서 속상했던 마음이 들 때마다, 오디션에서 떨어져서 좋은 점 세 가지씩 생각해 보는 걸로 할까?"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한참 이야기를 듣던 아이는 고개를 힘차에 끄덕였다. 사실, 아이에게 하는 당부같은 이야기였지만, 이것은 내 자신에게 하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정말 별 것 아닌 일인데도, 내 아이의 노력이나 실력이 누군가에게 인정 받지 못했다는 경험은 꽤 쓰리고 아프다. 내가 학교에서 진상 학부모라 생각하는 이들처럼, 심사 기준이 뭐였냐 따지고 싶은 충동이 불쑥 들기도 했다.  내가 어딘가에서 불합격 통보를 받았을 땐 툭툭 잘 털고 잊어버렸는데, 이게 내 자식의 일이 되니 생각보다 쉽지 않다. 그야말로 작은 도전이었고, 앞으로 아이가 해야 할, 수많은 도전 중 제일 사소한 것에 속할 텐데도 그렇다. 아이도, 나도, 어떻게 성공해야 할지보다, 실패를 어떻게 이겨내야 할지에 대한 각오와 준비가 필요하단 생각이 들었다.


방을 나서는 아이에게 한 마디 덧붙였다.

"너, 박태환 알아? 우리나라에서 수영 제일 잘 하는 사람이야. 올림픽에서 메달도 땄고. 그런데 그렇게 수영 잘 하는 사람도,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아? 큰 대회에 나가서 신호를 잘못 알아 듣는 바람에 부정 출발해서 경기에 참여해보기도 전에 실격을 당해서 돌아와야했어. 지금 네 마음보다 얼마나 더 억울하고 속상했겠니? 그런데 그사람은 그냥 화만 내고 있었던 게 아니라 더 열심히 준비해서 그 다음 더 큰 시합에서 좋은 성과를 냈어."


아이가, 환하게 웃더니 대꾸한다.

 "엄마, 그 얘기 예전에 다른 동아리 오디션에서 떨어진 우리반 애들한테 담임 선생님이 똑같이 해 주신 말이야. 히히히."


 그래, 위로를 건네는 교사의 마음이나 엄마의 마음이나 다 같은 거였구나. 내일은, 대입 결과들이 발표되어 가며 어딘가에서 잔뜩 풀이 죽은 채 '실패의 시간'을 겪어내고 있을 우리 반 아이들에게도 연락을 해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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