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10.13. Day 10
12 Road or Lord
- 2017.10.13. Day 10
222km. 오늘까지 10일 동안 걸은 거리다.
어제 샤워를 하고 산티아고 순례길 온 이후 처음으로 손톱을 깎았다. 보통 출장을 가더라도 길어야 일주일이었는데 이번엔 길게 잡다 보니 손톱도 깎아야 되네. 벌써 걸은지 10일째다.
빨래를 돌리려 하는데 같은 숙소에 묶은 한 한국인 친구가 자기도 빨래하니 내 거까지 함께 해주겠단다. 복이다. 보통 세탁/건조에 5유로(6700원) 정도 드는데 하루치 빨래를 할 경우 양이 많지 않아 Share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감사 표시로 맥주 한잔 쏘기로 했다. 그리고 난 낮잠을 즐겼다. 쿨쿨.
꿀잠에서 깨어 아래로 내려가 편한 아쿠아슈즈 신발을 샀다. 쪼리를 끌고 시내 돌아다니기가 너무 힘들어서 좀 편하려고 산거다.
스페인 셰프 출신 순례자 Pau가 오후 4시부터 소고기 굽고 준비하더만 7:30분쯤 환상적인 소고기 스튜와 수프가 완성되었다. 5유로씩 낸 10명 조금 넘는 순례자들이 모여 즐거운 저녁 식사시간을 갖는다. 맥주에 와인까지 맛있는 음식 앞에서 다들 너무 좋아한다. 앞에 앉은 이태리에서 온 스물한살 안드레는 이미 술을 많이 먹어 눈이 풀렸다. 그래도 이 녀석은 항상 멋있는 척한다. 같이 다니는 한국 친구들은 이 애를 부를 때 ‘중2병’이라 부른다.
오늘은 6:41에 출발했다. 어제 추위에 떤 게 서러워서 오늘은 다소 두껍게 입었다. 사실 옷은 가볍기 때문에 통상 배낭의 제일 밑부분에 들어가게 되어 걷는 도중에 옷을 꺼내기가 상당히 불편하다. 그래서 얇게 입어 좀 춥더라도 해뜨기 전까지는 참는 편이다.
도시의 불빛은 별빛을 감춘다. 도시의 가로등을 벗어나면 그제야 별들이 드러난다. 오늘은 구름이 좀 있다. 덜 덥겠다.
간밤에 꿈을 꿨다. 회사 안 나간다고 와이프에게 구박받는 꿈을. 여기까지 와서 그런 꿈을 꾸다니, 씁쓸하다 ㅎㅎ
서쪽으로 좀 와서 그런가 며칠 전까진 달이 앞에 보이던 게 이젠 뒤에서 비춘다. 달에 비친 내 그림자를 보며 걷는다. 은은한 달그림자. 기분 좋다. 새벽의 신선한 공기도 은은하게 물들어 오는 먼동도.
7.24킬로를 와 8:13에 그라뇽에서 첫 휴식을 갖다. 직접 짠 오렌지주스로 갈증을 가시다. 하몽도 하나 구입했다. 오늘 아침에 바게트에 하몽을 끼워먹으니 의외로 괜찮았다. 내일도 다시 시도해 볼 거다. 이제 해도 뜨기 시작해 One-hour cold도 끝났다. 두꺼운 겉옷을 벗어 배낭에 묶고 반팔로 가볍게 걸을 거다.
순례길. 스페인어로 Camino. 우린 길에서 길(道, 종교적으로 깊이 깨친 이치)을 찾기도 한다. 구도(求道)라는 것 자체가 도를 구하는 거다. 도 자체가 길이다. 우리가 걸어가야 할, 우리가 찾아야 하는 것. 때론 이치를 구하고 길을 찾고. 영어로도 비슷한가 보다. Road에서 Lord를 찾는다. 걸으며 신을 찾는다. 이건 동서양이 비슷하다. 우연의 일치인가? 이후 난 ‘I met the Lord on the road’라는 말을 자주 하고 다녔다.
Road에서 Lord를 찾으려면 짐을 많이 Load하고 다녀야 한다. ㅎㅎ 산통 깼나? 죄송하다.
오늘도 넓게 펼쳐진 들판. 아무도 없고 나 혼자. 고요와 고독. 뒤에 떠오른 태양. 이젠 달이 아니라 태양에 비친 내 그림자를 보며 걷는다.
여기서 잠깐 곁다리로 새자. 스페인도 메인 요리를 시키면 프렌치 프라이가 사이드로 많이 나온다. 내가 감자를 거의 다 남기자 한 한국인 순례자가 물어왔다. 그래서 내가 그랬다.
“내가 투자일을 하는데 감자(減資)라는 것은 자본감소(Decrease of Capital)를 말하는데 주로 회사가 잘 안되어 망할 때 많이 하는 금융행위야. 즉, 감자 한다면 투자해서 망하는 경우가 많으니 내가 안 좋아할 수밖에”
가다가 부자가 함께 걷는 것을 보았다. 건장한 아들은 늙으신 아버지 앞에서 천천히 걷고 그 뒤에 허리 구부정 아버지가 양손에 지팡이를 땅에 딛으며 따라간다. 자기는 아주 큰 배낭, 아버지는 아주 작은 배낭. 분명 아버지 속도 때문에 새벽 일찍 출발했을 것이다. 아버지 속도가 느려 속도 탔을 텐데. 아름다운 풍경이다.
11:07에 벤치에서 잠깐 휴식을 취했다. 벌써 18.71킬로 왔다. 이제 얼마 안 남았다. 어제 한 친구가 그러는데 목적지가 1킬로 남았다는 표지판 밑에 어느 순례자가 ‘FUCK’이라고 크게 써넣었고 다른 순례자는 ‘Liar’라고 썼다고 한다. 사실 마을 초입까지 1킬로는 분명 맞을 것이다. 근데 마을부터 좀 더 들어가야(최소 1킬로) 숙소가 나타나니 1킬로 표지판에 열도 나고 거짓말처럼 느껴지기도 했을 거다. 나도 격하게 공감되었다.
왠지 그날 정한 목적지에 다 와가면 이상하게 긴장이 풀리면서 다리가 더 아파온다. 그리고 남은 거리가 더 길게 느껴진다. 다들 비슷한가 보다.
벨로라도를 4킬로 남기고 지루한 자갈길을 걷는다. 오늘은 태양이 많이 뜨겁다. 난 자갈길 옆 풀밭 길을 걷는다. 여기가 푹신푹신 발이 덜 아프다.
10월 중순 28도의 뙤양빛 아래 그 열기에 지쳐간다.
오후 12:10분 34,118걸음으로 23.69킬로를 오다.
오늘까지 코스 상 222킬로, 실제 249킬로를 걷다. 맙소사! 249킬로는 서울에서 내 고향 강원도 삼척까지 가는 거리다.
2017.10.13. 오후 5:27분 스페인 벨로라도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