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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필름 Sep 04. 2020

프랑스에서 한 달 살기, 아니 있기

살려고 갔는데 그냥 있다가 왔다



  

나는 서른한 살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여권을 만들었다. 수학여행을 일본이나 중국으로 가지도 않았고, 대학생 때 배낭을 메고 유럽으로 떠나지도 못했다. 부산으로 가는 기차 푯값보다 일본으로 가는 비행기 항공권의 값이 더 싸져서 20, 30대 여성이라면 누구나 갔다 왔다는 일본 여행도 못 해봤다. 나는 한국에 있었다. 해외로 여행을 떠날 만큼의 돈, 그러니까 백만 단위의 돈이 생긴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그냥 한국에 있었다. 두 개의 대학을 다니고, 세 명의 남자를 만나고, 여러 번 학자금 대출을 받았다. 친구를 새로 채우는 만큼 원래의 친구들을 흘렸다. 


나는 그냥 그렇게 사는 사람이었고 그렇게 살기만 할 줄 알았다. 


그러다 처음으로 천만 원이 생겼다. 보조 작가로 참여했던 드라마의 방영이 끝난 후, 너무 고생했다며 메인 작가님에게 수백만 원의 보너스를 받았다. 통장에 그렇게 많은 돈이 있어 본 게 처음이었다. 이 돈으로 뭘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일단 지금보다 조금 더 나은 곳으로 이사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당장은 집에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새로운 직장을 구한 것도 아니어서 굳이 이사를 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돈을 꿈꿔본 적이 없다. 돈이 생기면 이걸 해야지, 하고 벼려 둔 일이 없어서 막상 돈이 생기니 당황했다. 작가님을 따라 미국을 여행하고 돌아와서 조금 쉬고, 혼자서 일본을 여행하고 돌아와서 조금 쉬고, 어영부영 서너 달이 지나고 나니 남은 돈이 거의 없었다. 아직 아무것도 못 해본 것 같은데, 진짜로 하고 싶은 것에 대해 생각해보기도 전인데 벌써 돈이 떨어졌다. 나는 속이 탔다. 그래서 갔다. 정말로 뭔가를 해야 할 것 같아서, 내가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라는 걸 부정하고 싶어서, 내가 뭐라도 되는 사람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 것 같아서, 프랑스로 떠났다. 세계에서 하루 숙박비가 가장 비싼 도시라는 프랑스의 칸, 바로 옆에 있는 앙티베에서 한 달 동안 살기로 했다.     





프랑스에서 돌아온 후 2년이 지났다. 나는 그때 이사 가고 싶었던 그 집에서 아직도 살고 있다. 새로운 직장이 생기지도 않았고 집에 큰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아직도 이사 갈 이유가 없다. 외국에서 한 달을 산다는 건 내 인생을 바꾸지 않았다. 인생을 바꾸고 싶은 의지가 나부터 없었으니 프랑스의 잘못은 아니다. 쌍방과실이다. 나는 여전히 뚱뚱하고, 여전히 가난하고, 여전히 미래가 막막하다. 그런데 아주 가끔 친구들과 얘기를 하다가, 나 그때 황정민 배우 봤어, 프랑스 칸 영화제 가서 <공작> 상영 끝나고 나올 때, 라는 말을 하는 사람이 됐다.      


해외에서 한 달을 산다는 건 귀에 아주 작은 귀걸이 하나를 다는 것이다. 머리카락에 다 가려 평소엔 보이지도 않지만, 아주 가끔 사람들 앞에서 머리카락을 쓸어 귀 뒤로 넘길 때 갑자기 나타나 반짝거린다. 사람들은 놀라고 나는 조금 쑥스러워진다. 나는 초라해서 그런 게 필요했다. 나의 초라함은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다. 2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니 적어도 2년 후에도 그럴 것 같다.   

   

나는 프랑스에 있으면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제대로 여행을 하지도 못했고 제대로 살지도 못했다. 그냥 있었다. 돈이 아주 많이 들었고, 떠올리면 마냥 행복한 기억도 아니지만, 그래도 누군가 만약 나에게 떠날까 말까를 묻는다면 나는 확신을 담아 대답할 것이다. 당신도 어서 떠나라고. 무사히 돌아오면 당신의 귀에도 잘 보이지 않는 작은 귀걸이 하나가 달릴 것이다.     


나는 아직도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지금의 내가 문득 너무 허전해서, 2년 전 프랑스에서 살았던 기억을 꺼냈다. 그때 그곳에서 썼던 글을 읽었다. 그 안에 담겨있는 어린 내가 보고 싶어졌다. 이 책은 2년 전 프랑스에 있던 서른한 살의 나와 2년이 지난 지금, 한국에 있는 서른세 살의 나의 교환일기가 될 것이다. 아니, 2년 전의 나는 절대 읽을 수 없으니 일기가 아닌 일방적인 편지다. 그리고 2년 후 서른다섯이 된 내가 챙겨야 할 계산서이기도 하다.     





L'addition, s'il vous plaît

2년 전 프랑스에서 한달살기하던 나와

2년 후 지금 한국에서 살아가는 나의 교차 에세이



     

*라디시옹 실부플레(L'addition, s'il vous plaît): 계산서 주세요. 프랑스에서 한 달 동안 살았던 내가 유일하게 외워온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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