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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필름 Jul 30. 2024

알약 두 봉지가 이거구나

마침내 정신과 상담을 받은 30대 후반 어느 여성의 기록


- 약을 먹는 것에 대해서는 어떠신가요?


나는 아까부터 울고 있었으면서 이것만큼은 울지 않고 말하고 싶어서 휴지로 눈물을 찍어내고 대답했다.


- 안심 돼요.


선생님은 왜 그러냐고 물었고 나는 이제 확실히 괜찮아질 거니까, 도움을 받을 수 있으니까 좋다고 했다. 선생님은 나의 대답을 잠시 가만히 두고, 해야 하는 말을 했다.


- 약을 먹는 것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세요. 내가 약까지 먹어야 하나, 하면서 끝까지 왔다는 생각이 드시는 경우가 있어요. 그런데 약을 먹는 건 그렇게 심각한 일이 아니에요.


선생님이 어떤 걱정을 하고 있는지 너무 잘 알았지만, 그래도 나의 대답은 진짜였다. 나는 약을 먹고 싶었다. 아프고 불편한 상태가 싫었고 그것이 약을 먹어서 없어지는 거라면 어서 빨리 먹고 싶었다. 선생님은 부작용에 대해 길고 자세하게 설명해 주셨고 나는 그 모든 부작용이 전부 발생하더라도 일단은 먹고 싶었다. 약이 정말 필요했다.


나는 어릴 때부터 감정기복이 심한 사람이었고 가정의 불행이 남들보다 두둑했으며 위험한 순간마다 도움을 받지 못해도 가만히 견뎠다. 누구나 그렇게 사니까 나도 그렇게 살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하는 낌새를 느낄 새도 없이 갑자기 이상한 일이 생겼다. 아무렇지 않은 일에 격하게 눈물이 났다. 너무 피곤해서 한 발자국도 걷지 못하겠는 순간들이 자꾸 생겼고 그럴 때마다 마구 울었다. 남자친구가 당황하며 사과하는 일, 별 거 아닌데 울어서 미안하다고 내가 사과하는 날이 반복됐다. 그러고 다음 날이면 피곤해 죽겠다고 또 울었다. 슬프거나 화나서 우는 것과는 달랐다. 나는 터질 것 같아서 울었다. 머릿속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정신과에 갈 때가 되었구나.


- 얼마나 아플 때 가야 되는 거야?

- 그런 건 따로 없어. 사람마다 다르니까.

- 그래도 어느 정도라는 게 있지 않아?

- 병원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


공황장애가 있어 약을 먹는 친구가 나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나는 기다렸다. 회사 일로 스트레스받아 반차를 쓰고 병원에 가서 2시간 동안 링거를 맞았을 때도, 갑자기 화가 미친 듯이 솟구쳐서 이러다 큰일 날까 봐 근처 정신과를 검색만 해봤을 때도, 매일 소화제와 타이레놀을 먹었을 때도 기다렸다. 그러다 새로 이직한 회사에서 나의 업무 성과에 대해 이야기하다 눈물이 나서, 울지 않으려고 꾸역꾸역 염소 소리를 내다가 깨달았다.


지금이구나.


회사에서 일 얘기를 하다 눈물이 날 것 같은 건 처음이었다. 나는 회사에서 화를 내는 사람이었지 우는 사람이 아니었다. 너무 약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완전히 고장 난 기분. 병원에 전화를 걸었다.


선생님이 정말 좋다는 리뷰가 많은 곳이었다. 예약이 꽉 차 당장은 어렵다고 해서 다음 주 월요일 저녁으로 예약을 잡았는데 주말과 당일까지 문자가 왔다. 예약 취소하지 않고 올 거냐는 내용이었다. 이미 해놓은 예약인데 유선상으로 가겠다는 답변을 하지 않으면 예약이 취소된다는 연락이 왔다. 이상한 병원이었다.


선생님은 단정하게 머리를 하나로 묶고 흰색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앞에는 의자가 꽤 여러 개 놓여 있었다. 내가 병원을 찾은 이유와 최근에 생긴 변화들, 주거 환경, 친구, 애인, 직장, 부모님, 유년시절 등 선생님은 적절한 질문들을 던져 내 이야기들을 담백하게 꺼냈다. 나는 울지 않으려고 덜덜 떨었다. 어디까지 솔직하게 이야기해야 하나 불안해하며 열심히 대답했다. 범죄자가 형사 앞에서 취조를 받는 게 아닌데도 나는 너무 다 말하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 남자친구랑 놀다가 아주 사소한 아무것도 아닌 일에도 눈물이 나고 화가 났어요. 이 일이 서운해할 만한 게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는데도 눈물이 계속 나서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새로 이직한 회사가 출근 시간이 빨라서 이전보다 1시간 더 일찍 일어나야 하거든요. 그래서 잠을 못 자니까 피곤해서 그렇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게 두 달이 넘어가니까 문제가 있는 것 같았어요. 그러다 이제는 회사에서까지 울 뻔했어요. 이건 진짜 아닌 것 같아서 병원에 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 남자친구에게 서운했던 건 어떤 것 때문이었나요?

- 어..... 그냥 진짜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어요. 그냥 대화하다가요.

- 남자친구가 정확히 무슨 말을 했나요? 어떤 말 때문이었는지 기억해 보시겠어요?

- 어..... 모르겠어요. 진짜 그냥... 기분 나쁠만한 게 아니었어요.


선생님은 남자친구가 한 말이 정확하게 무엇이었냐고 여러 번 물었다. 남자친구는 내가 병원을 예약하던 순간부터 자신이 같이 가면 어떻겠냐고 물었던 사람이고, 내가 됐다, 됐다 하는데도 너무 걱정을 해서 알겠다고 같이 가달라고 하자 쏜살같이 달려와 대기실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남자친구는 '지구는 평평한데 왜 동그랗다고 하는 거야? 사과해!'라고 하면 '이해는 안 되지만 기분이 나빴다면 미안해'라고 할 사람이었다. 순하고 착하고 차분해서 평생 느껴본 적 없는 편안함과 안정감을 주는 훌륭한 사람인데, 순간 범죄자로 만든 것 같아 괜히 미안했다.


남자친구는 평소에 발음이 뭉개지는 일이 종종 있다. 예를 들면 '팝업'을 [파법]이 아닌 [파겁]으로 발음하는 것이다. 난 이게 너무 사랑스럽고 재밌고 귀여워서 그때마다 놀린다. 남자친구는 그러면 (-_-) 이런 표정을 하고 있다가 [팝. 업.]이라고 다시 고쳐 말한다.


(-_-) 내가 언제 파겁이라고 했어 자기야...

(-0-) 팝

(-_-)

(-0-) 업

(-_-)


이 과정은 탕후루급 즐거움이다. 그러다 슬쩍, 혹시 내가 이렇게 놀리면 싫어? 하고 죄지은 표정으로 물으면 남자친구는, (0_0) 아니? 하며 놀란다. 좋은 사람이다.


남자친구가 나를 울게 만든 말도 이런 거였다. 같이 밥을 먹으며 얘기하다가 발음이 뭉개져서 놀렸는데 똑바로 발음했다고 정색하며 말해서 화내는 줄 알고 나도 화를 냈다. 남자친구는 내가 놀리니까 그거에 맞춰서 반응한 거였는데 화를 내는 것처럼 보였나 봐, 그런데 화내지 않았어 자기야... 라며 뚝뚝 우는 나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이걸 정신과 선생님에게 말할 수는 없었다. 창피했다.


- 그러면 이후에 남자친구와 감정이 잘 풀리나요?

- 네. 제가 이래서 울었다고 설명하면 남자친구가 사과해요. 저도 사과하고요. 그러면 다시 괜찮아져요.


선생님은 가까스로 남자친구에 대한 의심을 거뒀다.


만약 반대로 남자친구가 정신과 상담을 받으러 갔다가 여자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했을 때, 그쪽 선생님도 나에 대한 의심을 과연 거둘 수 있을까. 어느 스릴러 영화 오프닝이 이랬던가.


1시간이 조금 넘게 내 인생의 전반을 슥슥 훑은 후 첫 상담이 끝났다. 시간이 늦어 병원 문을 닫아야 해서 본격적인 검사는 주말에 잠깐 와서 받기로 했다. 다음 예약은 2주 후였다. 처음 일주일은 괜찮게 지냈고 다음 일주일은 병원에 가기 전처럼 처참하게 보냈다. 드디어 병원에 도착해서도 울었다. 깃털 같은 스트레스가 송곳처럼 느껴졌다. 온 피부가 빨갛게 까져있어서 누군가 나에게 휴지를 비벼도 사포로 문대는 것 같아 화가 났다. 소리치고 싶은 것을 어떻게든 삼켰고 그래서 계속 울었다. 나는 스스로가 이상했고 어서 약을 먹어 고치고 싶었다. 이건 내가 아니었다. 나라고 하고 싶지 않았다.


검사 결과, 나는 중간 정도의 우울증이라고 했다. 여기에 사회적 불안이 강하게 있고, 분노에 대한 예민도가 높다고 했다. 선생님이 우울증 약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해 주셨다. 예민도를 줄여줄 것이다. 식욕, 성욕이 같이 줄어들 것이다. 약을 먹으면 각성 상태가 되니 만약 아침에 약 먹는 것을 까먹고 오후가 됐다면 그날은 약을 드시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저녁에는 수면제를 드시면 된다. 취침에 도움이 될 것이다.


알약, 두 봉지.

아침식후 30분 하나, 취침 전 하나.


두 권의 정식 출판과 한 권의 독립출판으로 내 이름이 적힌 책 세 권을 만든 후, 나는 생각했다. 다음엔 인터뷰집을 쓰고 싶다고. 그 책의 제목은 '왜 MZ들은 정신병자가 되는가'였다. 언젠가 나도 정신과에 가게 될 거라고 막연하게 확신했다. 그래서 우울증과 공황장애를 앓고 있는 주변 친구들을 한 명씩 자세히 인터뷰해서 책을 쓰고 싶었다.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내가 써야 할 다음 글이라고 생각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시간이 더 많이 지났다. 안 쓰게 될 책이었구나,라는 생각을 어렴풋하게 했다.


그러다 결국 다음 글을 이렇게 쓰게 됐다. 내가 정신병자 MZ가 되어 나의 글을 썼다.


내가 써야 할 글이 이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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