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아는 아침 7시부터 저녁 7시까지 하루 12시간 동안 디저트 카페 알라메종에서 일한다. 하루 종일 서서 일을 하는 탓에 퇴근할 무렵이면 발과 다리가 퉁퉁 부어 아침에 신고 온 신발이 맞지 않는다. 지친 몸을 이끌고 퇴근한 서아가 문을 열자 집안에서 제인의 플루트 연주 소리가 들린다.
귀에 인이 박히듯 들은 타파넬(taffanel)의 미뇽 판타지(mignon’s fantasy)다. 서아는 가끔 꿈속에서도 타파넬의 연습 곡을 들을 정도다. 플롯을 연주해보지 않은 서아도 음계를 외울 것만 같은데 몇 년째 연습한 제인은 어째서 매번 대학에 떨어지는 건지 알 수 없다.
“다녀왔습니다.”
서아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어머니 윤희가 손가락으로 입술을 가리키며 소리 내지 말라고 주의를 준다. 서아가 조심스럽게 거실로 들어서자 아무렇게나 던져놓은 옷가지와 과자 부스러기, 먹다 남은 치킨 조각이 눈에 들어왔다.
어머니와 제인은 서아가 들어올 때까지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어지르기만 한다. 심지어 밥도 해 먹지 않고 시켜 먹다 서아가 들어오면 그제야 배고프다고 난리다. 언제부터 그렇게 된 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머니가 갱년기 증세 때문에 온몸이 아파서 꼼짝할 수 없다고 했던 몇 년 전부터 더 심해지기는 했지만 대부분의 집안일은 서아 차지였다. 서아는 퉁퉁 부어 움직이기도 힘겨운 다리에 힘을 주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옷도 갈아입기 전에 밥부터 안쳐 놓아야 한다. 수험생 노릇을 삼 년째하고 있는 제인은 미리 해놓은 밥을 싫어해서 늦더라도 서아가 들어와 새로 갓 지은 밥을 해먹여야 한다.
플루트 연주 소리가 끝나자마자 제인이 주방으로 달려와 숟가락을 들고 식탁을 탁탁 친다.
“연습을 오래 했더니 배가 너무 고파. 언니 빨리 밥 줘.”
“알았어. 좀 기다려. 네가 좋아하는 차돌 짜글이 하는 중이야.”
“앗싸. 언니 최고!”
제인이 어깨를 들썩이며 좋아한다. 그런 제인이 못마땅한지 어머니가 혀를 차며 이맛살을 찡그린다. 서아는 친엄마 얼굴도 모른다. 윤희가 직접 말하지만 않았어도 서아는 그녀를 친엄마로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 윤희는 서아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대놓고 말해버렸다.
‘난 네 친엄마 아니고 새엄마다. 제인은 내 딸이지만 너는 아니야. 그러니까 네가 나한테 제인하고 같은 대접을 받을 생각일랑 하지 마라.’
어린 나이였지만 어머니의 그 말이 전혀 당황스럽지 않았다. 그저 궁금증이 풀렸을 뿐이었다. 그래서 엄마는 나를 그렇게 미워하고 제인만 예뻐했구나. 이제 알았으니 되었다 싶은 마음이었다.
금방 밥을 먹을 건데 그 사이를 못 참은 제인이 식탁에 있는 빵에 손을 댔다. 그걸 본 윤희가 재빨리 제인의 손을 낚아챈다.
“너 다이어트해야 하는 거 알면서 또 빵을 먹으려고 해?”
“아, 그렇지. 참을게. 참아야지.”
제인이 넉살 좋게 웃으며 손을 내린다. 덩치 크고 뚱뚱한 제인은 식탐이 많아 매번 어머니에게 혼이 나지만 성격이 좋아서 신경질을 내지 않는다. 이 집에서 서아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그래도 낙천적인 제인이 언니인 그녀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제인과 함께 서아를 왕따 시키고 싶어 했지만 제인은 항상 서아를 챙기며 같이 있으려 했다. 아빠는 돌아가시면서 그런 제인을 서아에게 부탁했다. 서아도 어리고 보살핌이 필요했는데 아빠는 도리어 서아에게 제인을 보살펴달라고 했다.
“자자, 우리 제인이가 좋아하는 차돌 짜글이가 완성되었습니다. 연습하느라 고생했어.”
제인이 숟가락으로 허겁지겁 찌개를 뜨며 고개를 끄덕인다. 서아가 같이 식사하시라는 의미로 윤희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윤희는 밥보다 급한 게 있다는 듯 턱짓을 하며 거실로 향했다. 서아는 윤희가 자신을 이런 식으로 부를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또 돈이 필요하구나. 이번 달에는 진짜 돈이 없는데 어쩌면 좋지.’
돈 생각을 하자 가슴이 벌렁거려 자기도 모르게 주먹으로 명치 부근을 두드렸다.
“이번에 한국대 교수 특별 레슨이 있다고 하는데 레슨비가 예상보다 세구나. 네가 보태야겠다.”
“어머니, 지난달에도…….”
윤희의 눈초리가 사납게 올라간다. 서아가 제대로 말을 꺼내지도 않았건만 윤희의 얼굴이 벌써 벌겋게 달아오른다.
“너, 지금 그래서 싫다는 거야? 너라면 저렇게 사족을 쓰지 못하고 좋아하는 동생 레슨비가 아까워? 그런 거야?”
윤희가 테이블을 손바닥으로 탁탁 치며 언성을 높였다. 언제나 이런 식이다. 제인이를 볼모로 서아의 통장을 닥닥 긁어 댄다. 심지어 카드 대출까지 받아 달라고 하는 달도 있다.
악착같이 아껴서 돈을 조금이라도 모았다 싶으면 꼭 무슨 일이 생기고 그럴 때마다 르 꼬르동 블루에서 제과를 배우고 싶은 서아의 꿈은 멀어진다.
“어머니, 이번 달에는 돈 들어갈 데가 너무 많았어요. 아직 제인이 새로 산 플루트 값 할부도 끝나지 않았고…….”
“됐다. 됐어. 하나밖에 없는 동생이 대학도 못 가고 저러다 말아야 네 직성이 풀리지. 나쁜 년. 내가 천애 고아가 된 걸 거두어줬더니 이런 식으로 은혜를 원수로 갚아? 나가, 당장 나가!”
서아가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제인이 엄마의 목소리에 놀라서 고개를 내밀고 눈치를 본다.
“엄마, 나 그 레슨 안 받아도 되니까 언니한테 뭐라고 하지 마.”
“어이구, 저 착해빠진 건 제 언니가 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모르고 잘한다.”
윤희가 복장이 터진다며 소리를 내지르고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언니, 미안해.”
제인이 손등으로 눈을 문지르며 훌쩍인다. 차라리 제인이 어머니처럼 못되게 굴면 서아가 빠져나가기가 쉬웠을 텐데. 서아는 팔을 벌려 제인을 안고 등을 토닥였다. 가녀린 서아가 안기에 제인의 덩치가 너무 커서 엉거
주춤하다.
“괜찮아. 언니가 어떻게 해서든지 너 레슨 받게 해 줄게. 너는 신경 쓰지 말고 연습이나 해.”
제인이 계속 어깨를 흐느끼며 코를 훌쩍인다. 아무리 생각해도 돈 나올 구멍이 없는데 어떻게 돈을 마련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는다. 친구들은 이런 서아를 보고 신데렐라 병이라며 답답해하지만 그녀는 어쩔 수 없었다.
아빠와의 약속이 있는데 제인이 자신처럼 대학도 가지 못하면 너무 가슴 아픈 일이었다. 고졸은 이 집에서 서아 하나로 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