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너 밥 좀 할 줄 아니

by 은예진


“누구라면 네가 알아? 신경 쓰지 말고 들어가!”


어디서 나타났는지 강우혁이 갑자기 끼어들었다. 서아는 텔레비전에서나 보던 인물들이 현실에서 움직이는 것을 보려니 뭔가 실감이 나지 않아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


“아니, 나는 웬 여자가 장 대표 차를 타고 오빠네 집으로 들어가기에 궁금해서 그러지.”


윤채영이 다디단 생크림 케이크를 한입 베어 문 것만 같은 표정으로 우혁을 바라보았다.


‘윤채영이 강우혁 따라서 이 동네로 이사 왔다고 하더니 사실인가 보네.’


서아는 윤채영의 몸이 자꾸만 강우혁 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보며 피식 웃었다. 윤채영이 좀 금사빠라 드라마 상대와 매번 스캔들이 나는 편이지만 우혁과 서 있는 걸 보니 그림이 좋기는 했다. 집에 가서 제인에게 강우혁과 윤채영을 본 이야기를 할 생각을 하자 벌써부터 흥분되었다.


“됐으니까. 못 본 걸로 해라.”


우혁은 단호한 표정으로 윤채영을 밀어내고 서아가 탄 조수석 문을 열었다.


“빨리 내리지 않고 뭐 하니?”

“아. 네.”


우혁의 채근에 허겁지겁 내리다 생각하니 자기가 그렇게까지 주눅 들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눈이 부신 스타들 사이에서 당당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서아는 허리를 펴고 턱을 당기며 어떻게든 주눅 들지 않으려 애썼다.


서아가 내리고 장 대표가 탄 차는 주차장을 향해 들어갔다. 윤채영이 못내 수상한 눈빛으로 우혁과 서아를 바라보았다. 우혁은 그런 윤채영의 시선을 무시한 채 서아의 팔을 잡아끌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이거 놔요. 내가 책을 찾으러 오기는 했지만 강우혁 씨가 이렇게 함부로 해도 되는 사람은 아니에요.”


서아가 신경질적으로 우혁의 팔을 뿌리쳤다. 윤채영 보란 듯이 팔을 잡고 들어오는 게 영 불쾌했다.


“내가 안 이러면 윤채영이 너를 아주 밟아 버리려고 대들걸.”

“왜요? 내가 뭘 잘못했다고요?”

“쟤는 우리 집에 오는 여자나 내 옆에 서 있는 여자는 다 적이야.”

“둘이 사귀어요?”


“사귀기라도 하면 덜 억울하지. 그냥 쟤 혼자 야단이야. 그러거나 말거나 무시하지만 아무 죄 없는 네가 윤채영한테 밟히면 곤란하잖아.”


“흥, 누가 누구한테 밟혀요. 나 그렇게 만만한 사람 아닌데.”


서아의 말에 우혁이 어련하시겠냐는 듯 무시하는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왜 그런 눈으로 사람을 봐요? 내가 만만한 사람이었으면 책을 포기하고 말았겠지요.”


우혁은 센척하는 서아가 가소롭다는 입가를 실룩거렸다.


“알았으니 앉아라.”


서아는 엉거주춤 소파에 앉아 집을 두리번거렸다. 집안에서는 지난번 우혁의 품에서 맡았던 블랙베리 향수 냄새가 은은하게 났다.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털이 길은 러그가 깔려있고 아이보리색 가죽 소파는 앉는 순간 눕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푹신하고 편안했다.


우혁이 등지고 앉은 창문 밖으로 초록이 우거진 마당이 보였다. 잘 정돈된 마당에는 야외 카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원목 파고라가 있었다. 우혁은 눈을 지그시 뜨고 서아를 바라보기만 할 뿐 입을 열지 않았다. 넋을 놓고 집을 구경하던 서아가 정신을 차리고 허리를 곧추세웠다.


“대표님께 연락하고 오면 책 주신다고 했잖아요.”


우혁이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창문 옆쪽에 있는 책꽂이 앞에 섰다. 서아는 책꽂이에 꽂힌 책들이 자기가 모아 놓은 아빠 책과 똑같아서 신기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손가락으로 책꽂이를 훑어 내려간 우혁이 마지막 칸에서 책을 뽑아 들었다.


“그래, 이거 너 가져가라.”


서아는 반가운 마음에 우혁이 내민 책을 받기 위해 손을 뻗었다. 순간 우혁이 책을 낚아채며 뒤로 물러섰다. 책은 서아의 손끝에 닿을 듯 멈춰있다 날아가 버렸다. 순식간에 책을 놓친 서아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가져가라면서요?”

“주긴 줄 거야. 대신 조건이 있어.”

“뭔데요?”


“내가 지금 엄청 배가 고프거든. 그런데 나가서 사 먹기는 귀찮고 집밥이 먹고 싶어. 너 밥 좀 할 줄 아니?”

“난 또 뭐라고. 정말 밥 한번 해주면 책 줄 거예요?”

“뭐 하는 거 봐서.”

“이봐요? 강우혁 씨. 진짜 이럴 거예요? 사람이 왜 이렇게 지질해요?”

“뭐? 찌찔? 야, 내가 태어나서 삼십오 년 동안 나보고 지질하다는 사람은 처음 본다.”


“아니, 그깟 책 한 권 주면서 무슨 조건이 그렇게 많아요. 밥 해주면 주겠다고 딱 부러지게 말을 안 하고 또 하는 거 봐서라니. 그게 지질하지 뭐가 지질해요?”


우혁의 얼굴이 갑자기 딱딱하게 굳었다. 얼굴 표정이 다채로운 연기자라서 그런지 표정이 굳자 전혀 다른 사람 같아서 겁이 났다.


“그깟 책 한 권?”


순간 서아는 자신이 잘못했음을 알고 손으로 입을 가렸다. 아빠 책을 어떻게 ‘그깟’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단 말인가.


“밥 할게요. 주방이 어디 있나요? 해드릴게요. 저 음식 잘하거든요.”


서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 두리번거리며 주방을 찾았다. 우혁은 소파에 드러누우며 손가락으로 안쪽을 가리켰다.


“장 대표도 먹게 넉넉하게 해.”


‘일을 시켜 먹으려면 최소한 주방에 데려가서 뭐가 어디 있으니 어떤 식으로 쓰라고 가르쳐는 줘야 하는 거 아냐.’


서아는 입을 비죽거리며 주방으로 향했다.


‘세상에나. 이거야말로 시에프 속 주방이구나.’


주방 한가운데 강우혁이 서 있으면 그대로 가전제품 광고가 될 만큼 잘 꾸며 놓은 주방이었다. 그러고 보니 작년에 강우혁이 외국 가전회사의 광고 모델을 했었던 게 기억났다. 자기가 광고한 제품들을 실제로도 착실하게 쓰는 모양이었다. 물론 이 가전들은 강우혁이 직접 쓰지는 않을 테지만 말이다.


주방이 너무 반짝거리는 게 사용한다기보다는 인테리어 개념의 주방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냉장고를 열어보자 의외로 식재료가 풍부해서 더 놀라웠다.


“헐, 뭐야. 이거 쓰는 주방이었어? 누가 이렇게 깨끗하게 관리하는 거지. 후들후들인데.”


혼잣말을 잘하는 서아는 계속 중얼거리며 냉동실과 냉장실을 스캔했다. 냉동실에 해물이 풍부하게 들어 있고 냉장실에는 순두부가 있었다. 김치냉장고에는 묵은지도 있고, 싱싱한 부추와 신선실에 한치도 한 마리 있었다.


서아는 앞치마를 찾아서 매고 팔짱을 낀 채 잠시 머릿속을 정리했다.


“오케이!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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