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붉은색 시트

by 은예진

“걱정하지 마. 민석이는 세상에 모든 진상을 다룰 줄 아는 매뉴얼을 가진 기획사 대표니까. 특히 나 같은 진상도 상대하는 데 저런 한심한 여자는 껌이지.”

“네에?”

“왜?”


우혁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지금 우혁 씨 스스로 자기가 진상이라고 고백하시는 거예요?”


“민석이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들이 있는 법인데 나는 그런 민석이 사정 따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일만 하거든. 그러니 민석이한테 최대 진상은 나라고 할 수 있지.”


“와, 강우혁 씨는 자신에 대해 정말 잘 아네요.”


우혁이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손으로 이마를 가리고 말했다.


“알지, 너무 잘 알아서 때때로 피곤해.”


잠시 뜸을 들인 우혁이 고개를 들며 히죽 웃었다.


“그러니까 내가 내 입으로 월드 스타라고 자칭하면 그럴만해서 하는 말이니까 토 달지 마라.”

“헐.”

“뭐가 헐이야!”


우혁이 소파에 있는 작은 하트 쿠션을 집어 들어 서아에게 던졌다. 서아는 용케도 허리를 굽혀 쿠션을 피했다.


“월드 스타라는 말은 진짜 아무리 들어도 오그라들어요.”

“싫으면 관둬. 내가 이래 봬도 중국 영화 세 편, 할리우드 영화 두 편을 찍은 사람이야.”

“알기는 알지요…….”


손익분기점을 못 넘긴 것으로 소문난 할리우드 영화는 지금도 강우혁의 흑역사로 꼽힌다는 게 문제지만 말이다.


“남들은 비웃어도 나는 그걸 찍고 배운 게 많아서 절대 흑역사라고 생각 안 한다.”


우혁이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할리우드 영화의 댓글을 보면 정말 처참할 정도로 강우혁을 까 내리는데 그걸 보고도 저런 소리를 할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역시 스타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싶었다.


“월드 스타 맞네.”


서아의 입에서 자기도 모르게 월드 스타라는 말이 나왔다. 다행히도 우혁은 자리를 뜬 뒤였다.




제과실에서 일을 하면서도 하루 종일 신경이 곤두섰다. 혹시라도 새어머니가 매장에 들이닥치는 것은 아닐까 싶어 조금만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도 귀가 쫑긋 섰다. 다행히도 오늘은 무사히 넘어간 모양이었다.


예전에는 마카롱 꼬끄만 만들었지만 이제 파트타임 근무로 바꾸면서 기본 반죽이나 크림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쿠키 반죽인 파트 사블레, 소보로 반죽인 스트뢰젤, 스펀지 시트인 제누아즈, 얇은 케이크 시트인 바스퀴 조콩드 등을 만드느라 하루 종일 밀가루를 하얗게 뒤집어쓰고 있다.


마카롱 꼬끄 만드는 일을 이어받은 은지는 매일 서아를 찾아와 살려 달라고 애원하며 그녀를 끌고 간다. 서아는 그런 은지를 도와주느라 꼬끄에서도 쉽게 해방되지 못하고 있다.


화장실도 가지 않고 보낸 다섯 시간의 근무 시간이 끝났다. 서아가 반죽 테이블을 정리하며 마무리를 짓자 우혁의 문자가 들어왔다.


<오늘 장 보러 가자.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음.>


서아는 핸드폰 화면을 보고 입가를 슬쩍 올리며 웃었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걷는 서아의 뒤로 은지가 따라붙었다. 작업복을 벗어서 쇼핑백에 넣고 돌아서는데 앞을 가로막고 있는 은지와 부딪치고 말았다.


“은지야! 왜 길을 막고 있어?”


서아가 놀란 듯 묻자 은지가 팔짱을 끼고 서아를 이리저리 훑어보았다.


“너, 아무래도 수상해. 아주 많이 수상해. 요즘 연애하냐?”

“여언애?”


당황한 서아가 말을 길게 늘이며 머뭇거렸다.


“근무시간 줄이고 나서부터 뭔가 달라졌어. 전과 다른 느낌이 생겼는데 그게 정확하게 뭔지 모르겠단 말이야.”


“오해야. 달라진 건 근무 시간밖에 없어. 연애는 무슨! 남자 만날 시간도 없는데.”


“아니, 내 촉은 못 속여. 네가 아니라고 한다면 사랑이 옆에 있는데도 너만 모르고 있을 확률이 높아.”


“야, 너 그러다 아주 돗자리 깔고 나서겠다.”


주먹을 움켜쥐고 눈을 지그시 감은 은지가 자기감정에 도취돼서 계속 중얼거렸다.


“사실 나도 내 감에 놀랄 때가 많거든. 느낌이 온다. 온다. 우리 은서아가 사랑에 빠지겠구나. 아주 화려한 사랑에 빠지겠구나.”


서아는 그런 은지의 옆을 살짝 비켜서서 조심스럽게 도망갔다. 서아가 도망간 줄도 모르는 은지는 아직도 눈을 감은 채 연애도사 흉내를 내고 있었다.


은지를 피해 알라메종 밖으로 나온 서아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주변을 흘깃거렸다. 은지가 넘겨짚었다고 하지만 화려한 사랑에 빠진다는 말이 귀에 달라붙어 얼굴이 화끈거렸다.


말이 안 되는 일이다.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화려한 사랑이라고 하면 당연히 강우혁이 떠오르는데 언감생심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세상 평범한 자신과 자칭 월드 스타 강우혁이라니. 서아가 머리를 마구 흔들며 아니라고 중얼거렸다.


옆 건물 주차장으로 들어서자 낯선 SUV가 그녀 앞에 와서 섰다. 차창 문이 열리고 우혁이 고갯짓을 했다.


“타.”

“이런 차도 있었어요?”

“응, 이 차는 수리 들어갔다가 이번에 나왔어.”

“차도 참 많네.”


서아가 중얼거리며 차 문을 열고 올라타다 깜짝 놀랐다. 붉은색의 시트가 너무 현란해서 눈을 어디에다 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우, 차가…….”

“화려하지? 이 정도는 화려해야 나랑 어울리지 않겠어?”


우혁이 서아가 앉은자리의 시트를 손으로 치며 자부심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순간 서아는 은지가 했던 화려한 사랑이라는 말이 떠올라 고개를 흔들었다.


‘아닐 거다. 절대, 저얼대 그럴 일은 없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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