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점 주차장에 차를 세운 우혁이 글로브박스 안에서 안경집을 꺼내 서아에게 건넸다.
“이게 뭐예요?”
“보면 모르나 선글라스지.”
“웬 선글라스?”
“나랑 같이 쇼핑하려면 너도 같이 선글라스를 쓰는 게 낫지 않겠어.”
서아가 다소 어색하게 입술을 오므리고 침을 삼키며 선글라스를 꺼냈다. 캐츠아이 쉐입의 명품 선글라스는 너무 눈에 뜨여서 얼굴을 감추는 게 아니라 도리어 ‘나 좀 봐주세요’하는 것만 같았다.
“이거 나 쓰라고 산 거예요?”
“응.”
우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맙소사.”
“왜?”
서아가 어이없다는 듯 콧소리를 내며 웃었다.
“이걸 쓰고 우혁 씨랑 같이 걸으면 누가 봐도 시선을 끌지 않겠어요? 영락없이 연예인 병 걸린 사람이 눈에 띄고 싶어서 쓰는 선글라스인데요.”
“정말?”
우혁이 시무룩한 목소리로 선글라스를 받아 들고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지난번 드라마 찍을 때 조연으로 나온 애가 쓰고 다니는 게 예뻐서 샀는데.”
“나는 그냥 선글라스 쓰지 않고 다니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요. 혹시라도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면 우혁 씨가 불편하지 나야 뭐 큰 상관있겠어요?”
“아닐걸. 나는 어차피 대중의 관심으로 사는 입장이라 상관없지만 네가 나랑 엮이기 시작하면 피곤해질 거야.”
“여태 신경 하나도 안 쓰고 다니더니 웬일이래요?”
“지금까지는 단발성이니까 상관없었는데 이제 같이 다니는 게 남들 눈에 자주 뜨일 것 같아서.”
“그럼 직접 장 보지 말고 그냥 인터넷으로 시켜요. 요즘 그러는 사람들 많아요.”
우혁은 자동차 핸들을 만지작거리며 대답하지 않았다. 서아는 우혁이 왜 그러는지 몰라 이상하다는 듯 흘깃거렸다.
서아는 우혁이 오늘을 얼마나 기다리고 있었는지 짐작도 하지 못할 것이다. 우혁은 말하기 민망하지만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가장 해보고 싶은 일이 둘이 같이 카트를 끌고 장을 보는 일이었다. 누군가 왜냐고 물으면 마땅히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신혼부부의 일상 중에 특별할 것도 없어 보이는 그 일이 묘하게 부러웠다. 어쩌다 백화점 식품 관에 갈 일이 생기면 종종 그렇게 장을 보는 커플들을 질투했다. 샴푸나 세제 따위로 채운 카트와 떡갈비를 꼬치에 찍어 여자 입에 넣어 주는 남자의 모습이 유난히 보기 좋았다.
서아를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사랑할 마음도 절대 없는데 어째서 서아와 장을 보러 가는 일이 그렇게 기대되고 떨렸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막상 같이 카트를 밀겠다고 생각하자 혹시라도 서아가 구설에 휩싸이지는 않을까 싶어 선글라스까지 구입했다.
그런 우혁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서아는 아무렇지도 않게 인터넷으로 장을 보자는 말을 하고 있다. 서아가 모르는 게 당연한데 우혁은 공연히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서아에게 섭섭한 마음이 드는 게 옳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퉁명스러운 말이 튀어나왔다.
“너는 어떻게 여기까지 와서 인터넷으로 시키자는 말을 할 수가 있니?”
우혁의 신경질적인 말에 서아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우혁 씨가 남들 시선을 신경 쓰기에…….”
“내가 언제 남들 시선을 신경 썼다고 그러냐? 됐다. 나도 선글라스 안 쓴다. 이제 장 보러 가도 되는 거지?”
우혁이 선글라스를 벗어던지고 차에서 내려 거칠게 문을 닫았다. 서아는 그런 우혁의 신경질이 이해가 되지 않아 고개를 갸웃거렸다. 말로만 듣던 예민한 연기자의 신경질이 이런 건가 싶었다.
‘그래 나는 가사도우미다. 직장 상사의 저 정도 신경질은 당연한 거 아닌가. 정신 차리자.’
서아는 자신의 위치를 되새김질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동안 우혁이 너무 잘해주는 바람에 처지를 망각하고 있었다. 잠깐 동안이나마 강우혁과 가족이라도 되는 듯 착각하고 있었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우혁이 매장 입구에 있는 카트를 뽑아서 밀고 앞장서자 여기저기서 ‘강우혁이야.’, ‘헐, 강우혁이잖아.’라고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서아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우혁이 미는 카트에서 한 발짝 떨어져 걸었다.
“뭐 살 거야?”
우혁이 고개도 돌리지 않고 물었다. 서아가 주머니에서 리스트가 적힌 메모지를 꺼내 내밀었다.
“여기요.”
우혁은 흘긋 고개를 돌려 서아의 손에 들린 메모지를 바라보았다. 빵 무늬가 인쇄된 노란색 메모지에 동글동글한 글씨로 가지런히 장 볼 목록이 적혀 있었다.
“됐으니까. 네가 가지고 다니면서 카트에 넣어. 내가 뭘 알겠니.”
“그럴 거면 뭐 하러 같이 왔어요? 나 혼자 봐도 되는데.”
“쉿!”
우혁이 고개를 휙 돌리며 휘파람 소리 같은 쉿 소리를 냈다.
“너 자꾸 왜 그러니?”
“내가 뭘요?”
“내가 너랑 같이 장 보는 게 그렇게 싫어? 인터넷으로 장 보면 된다고 하더니 이번에는 혼자 봐도 된다고 하잖아. 나랑 같이 이렇게 장 보는 게 몹시 불편한 모양이다?”
우혁의 목소리에는 빈정거림과 노여움이 뒤섞인 뾰족한 가시가 박혀 있었다. 서아가 발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 서 버렸다. 서아가 선 줄 모르고 혼자 걸어가던 우혁이 서아가 없는 것을 깨닫고 두리번거렸다. 뒤에 서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서아를 발견하고 우혁이 방향을 바꾸어 서아를 향해 걸었다.
우혁이 카트를 밀고 천천히 다가오자 서아는 아랫입술을 깨물고 우혁을 노려보았다.
“강우혁 씨야말로 왜 그래요? 왜 주차장에 들어오자마자 계속 시비예요? 내가 뭘 잘못했다고 그래요?”
우혁의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보였다. 그제야 아무것도 모르는 서아를 상대로 자신이 어깃장을 놓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기대가 너무 커서 들뜬 자신의 감정을 몰라준다고 서아를 상대로 어리광을 부린 것이다.
“남들이 본다. 가자. 우서 장부터 보고 나서 이야기하자.”
“연예인은 참 편리하네요. 곤란하면 무조건 남들이 본다는 말이면 다 해결이 되니까 말이에요.”
서아가 쌀쌀맞은 목소리로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입을 꽉 다문 서아는 메모지에 적힌 물건들을 사서 카트에 집어넣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