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아는 창을 두드리는 빗소리에 눈을 떴다. 우혁의 집에 와서 살기 시작한 지 벌써 한 달여가 되었지만 가끔씩 낯선 느낌에 두리번거린다. 우혁이 고른 침대와 화장대, 서아가 고른 침구와 커튼이 있는 방은 전에 새어머니와 살던 방에 비하면 호텔처럼 쾌적하다.
그 쾌적함이 도리어 낯설어 뭔가 허전하고 쓸쓸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런 날은 아빠 책을 꺼내 손으로 쓰다듬는다. 우혁이 빼앗았던 아빠 책은 이제 그녀의 책꽂이에 꽂혀 있다. 우혁은 빌려주는 거지 절대 주는 게 아니라는 말을 반복하며 그녀의 방에 꽂아 주었다.
베드 테이블에 놓아두었던 책을 펼쳐 젊은 아빠의 사진을 손가락으로 쓸어보았다. 새벽부터 천둥소리가 요란하게 울린다. 우혁은 일박 이일 일정으로 제주도로 화보 촬영을 갔다. 밥해줄 사람도 없고 일은 늦게 나가도 되니 오늘은 그야말로 휴가다.
이불 속에서 뒹굴뒹굴하며 한 시간을 보낸 서아가 커튼을 열어젖혀 창밖을 내다보았다. 굵은 빗줄기는 그칠 줄 모르고 계속되고 있었다. 붉은 꽃을 흐드러지게 피운 배롱나무가 비를 맞고 있는 모습이 고즈넉하면서도 운치 있었다.
파자마 차림으로 느릿느릿 걸어가 간단하게 캡슐 커피를 한 잔 내려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작은 방안 가득 커피 향이 퍼지면서 기분 좋은 나른함에 빠져들었다. 오늘 저녁이면 우혁이 돌아올 거고 이 커다란 집은 다시 쿵쿵거리는 그의 발자국 소리로 가득 찰 것이다.
화보 때문에 그동안 다이어트하느라 제대로 먹지 못했으니 오늘은 아마 엄청나게 먹어댈 것이다. 빈집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마음의 여유가 이런 거구나 싶어 마음이 마시멜로 마냥 말랑해졌다.
우혁이 아빠한테 얼마나 신세를 졌는지 모르지만 이건 과한 친절이다. 지난달 그녀의 통장에 입금된 가사도우미 급여는 오백만 원 이었다. 너무 놀라서 이게 다 뭐냐고 했더니 우혁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옛날에 농사짓던 우리 아버지가 말씀하시기를 똑같은 땜질을 해도 호미를 땜질하고는 몇 백 원밖에 못 받지만 경운기를 땜질하면 몇 천 원을 받았다고 하시거든. 같은 일을 해도 나 같은 사람하고 일을 하면 더 받는 거야.’
‘정말요?’
서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어리숙한 표정으로 물었다. 우혁은 그런 서아가 귀엽다는 듯 이마를 손가락으로 튕기고 이층으로 올라가 버렸다. 서아는 자리를 뜨지 못하고 입금 금액이 찍힌 핸드폰을 들여다보고만 있었다.
주변에 서아와 친분이 있는 누군가에게 지금 이런 상황에 대해 설명한다면 아마도 대부분 우혁이 무슨 의도가 있는 건 아닌지 의심해야 한다고 할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강우혁이 별 볼일 없는 파티시에 보조인 자신에
게 무슨 의도를 가질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그냥 믿기로 했다.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우혁을 믿고 가는 것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계를 본 서아는 화들짝 놀라 출근을 서둘렀다. 밥해줄 사람 없으니 시리얼에 우유를 부어 먹고 설거지도 하지 못 한 채 부랴부랴 신발을 신었다.
비가 오니 크록스 샌들을 신고 가는 게 제일 좋을 것 같았다.
지하철역에서 내려 알라메종을 향해 서둘러 가던 서아는 낯선 풍경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아침보다 빗줄기는 약해졌지만 아직 비가 제법 내리고 있는데 그 비를 다 맞고 서 있는 할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계절에 어울리지 않게 두툼한 카디건에 노인들이 잘 입는 인견 바지를 입고 있었다. 젖은 바지가 몸에 달라붙
어 앙상한 엉덩이와 다리를 도드라지게 드러내고 있었다.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할머니가 맨발이라는 것이었다.
서아가 재빨리 달려가 할머니 머리 위에 우산을 씌웠다. 빨갛게 된 할머니의 맨발은 빗물에 퉁퉁 불어 있었다.
“할머니 여기서 왜 이러고 계세요?”
할머니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서아를 바라보았다. 텅 빈 할머니의 동공이 불안한 듯 흔들리고 있었다.
“모르겠어. 나도 내가 왜 여기 있는지 모르겠어.”
머리에서 흘러내린 물이 눈을 타고 내리자 할머니가 손으로 얼굴을 비볐다. 서아는 할머니의 목이나 옷에 혹시라도 치매 환자용 명찰이 있나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할머니 잠깐만 기다리세요. 제가 경찰에 신고해서 집 찾아 드릴게요.”
서아가 전화기를 들어 112를 누르려는 순간 할머니가 혼자 웅얼거리며 도로로 뛰어 들려고 했다. 서아는 간신히 할머니를 잡은 채 신고했다.
“안되겠다. 우리 할머니 신발부터 신어야겠다.”
서아는 크록스 샌들을 벗어 할머니 발에 신겨 드렸다. 발바닥에 우툴두툴한 보도블록이 닿자 그 낯선 감각에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것만 같았다. 크록스 샌들을 신은 할머니가 재미있는지 발을 들었다 놓으며 쿵쿵거렸다.
“신발이 마음에 드시나 봐요.”
“응, 좋아.”
할머니가 젖은 입술을 혀로 핥으며 해맑게 웃었다. 서아는 그 웃음을 보자 자기도 모르게 같이 웃었다. 저만치서 경광등을 반짝이며 순찰차가 다가왔다. 서아가 손을 흔들자 차에서 여자 경찰이 내렸다.
“치매 할머니 신고자신가요?”
“네, 이 분이세요.”
서아가 할머니 손을 잡고 경찰에게 인도하자 여자 경찰의 시선이 서아의 발에 가닿았다.
“할머니가 맨발로 계셔서요.”
“아, 네에.”
머리를 얌전하게 묶은 나이 지긋한 여자 경찰이 기특하다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서아는 그저 할머니가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시기만을 바라며 경찰차 뒤꽁무니를 한참 동안이나 바라보았다.
거기까지는 흐뭇했지만 핸드폰 벨 소리에 화들짝 놀라 정신을 차리고 보니 지각도 한참 지각이었다. 팀장이 전화해서 파트타임으로 일하면 다 이렇게 되는 거냐고 잔소리를 퍼부었다. 급한 마음에 맨발로 뛰어 들어가자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그녀에게 쏠렸다. 서아는 발가락을 오므리고 허리를 굽힌 채 어정쩡한 걸음으로 라커룸을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