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야? 늦어서 웬 맨발?”
은지가 짤주머니를 내팽개치고 따라 들어와 수건을 건넸다. 할머니 챙기느라 비를 맞아서 머리도 엉망인 데다 한쪽 어깨가 모두 젖어 있었다.
“횡단보도 바로 앞에서 맨발로 비를 맞고 있는 치매 할머니를 봤어. 어떻게 그냥 와. 그래서 신고하고 신발을
벗어드렸지 뭐야.”
“어휴, 하여간 우리 은서아 착한 건 못 말려.”
수건으로 머리를 쓱쓱 닦은 서아가 활짝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착해서 그런 게 아니라 당연한 거지. 너라면 맨발의 할머니가 비 맞고 있는 걸 그냥 모른 체했겠냐?”
“음, 아무리 그래도 신발은 못 벗어 드릴 것 같아.”
서아는 은지에게 대답을 하려다가 시계를 보고 정신없이 제과실로 뛰었다.
팀장은 전후 사정 따위 들을 필요도 없다며 화를 냈다. 제과실 앞에서 경찰로부터 할머니가 무사히 귀가 조치되었다는 전화를 받았다. 기분이 좋아진 서아는 팀장의 야단 앞에서도 씩씩하게 웃으며 다음부터는 이런 일이 없도록 주의하겠다고 말했다.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이십오 킬로그램짜리 설탕 포대를 낑낑거리고 옮겨다 열었다. 오늘은 크림을 만드는 날이다. 기본 파트의 일은 팀장 업무인데 어쩌다 이 일을 맡게 된 것인지 모르겠다. 크렘 앙글레즈와 크렘 파티시에, 아몬드 크림, 샹티 크림을 만드느라 다섯 시간 동안 손목이 시큰거리게 거품기와 핸드믹서를 돌렸다.
퇴근 시간이 돼서야 겨우 허리를 편 서아가 김 사장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핸드폰과 서아를 번갈아 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서아는 또 사장한테 붙들려 오늘 지각한 일로 르 꼬르동 블루 출신이 아닌 애들은 시간 개념도 없다는 소리를 듣는 게 아닌가 싶어 조마조마했다.
“서아 씨 오늘 지각했지?”
‘역시, 예감은 틀리지 않는구나.’
서아가 입술을 실룩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혹시, 치매 할머니한테 신발 벗어주느라 늦은 거야?”
“네?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어, 맞네. 아이고 이 사람아 자네 핸드폰도 안 보나?”
“근무 시간에 핸드폰은 당연히 못 보니까…….”
서아는 김 사장이 무슨 소리를 하는가 싶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무음으로 해놓은 핸드폰 화면을 열자 읽지 않은 메시지와 부재중 전화가 엄청나게 들어와 있었다.
“이게 다 뭐지?”
“궁금하면 이걸 봐.”
사장이 그녀 앞에 핸드폰 화면을 내밀었다. 핸드폰 화면에는 맨발의 서아가 엎드려서 할머니에게 신발을 신겨주는 장면이 찍혀있었다. 동영상 속에는 머리에 비를 맞으며 할머니의 발을 들고 있는 서아의 옆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경찰차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배웅하는 장면에서 영상이 멈추었다.
“어떻게 이 장면이?”
서아가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사장을 바라보았다. 사장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큰 목소리로 떠들었다.
“꽤 유명한 인플루언서가 지나가다가 서아 씨가 할머니한테 신발을 벗어주고 경찰차에 태워 드리는 모습을 찍어 올린 모양이야. 제목이 뭔 줄 알아? 가로수길 천사 강림이야. 장난 아니다. 지금 조회수 올라가는 거 봐.”
서아는 백만을 넘긴 조회수를 보며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심장이 쿵쾅거렸다.
“난리다. 난리야. 가로수길에 강림한 천사가 얼굴도 천사라고 누구냐고 어찌나 궁금해하는지. 그래서 내가 댓글로 가르쳐줬어. 우리 직원이라고.”
“네? 사장님 마음대로 제 개인 정보를 알려주셨다고요?”
“뭐 어때서? 내가 아니어도 다른 사람이 올리니까 기분 나빠할 거 없어. 이왕이면 내가 우리 알라메종에 있다는 거 알리면 그게 더 낫지.”
“사장님, 그건 아니지요!”
서아가 울상이 되자 김 사장은 괜찮다는 소리만 연신하며 서아의 어깨를 두드리고 달아났다.
‘괜찮겠지. 당연히 당신은 괜찮겠지. 괜찮지 않은 건 나지 당신이 아니니까.’
서아는 불안한 마음에 핸드폰을 열어 부재중 전화와 문자 메시지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부재중 전화는 이제는 연락하지 않는 동창들부터 전에 다니던 직장 동료들과 전화번호만 저장해 놓은 지인까지 각양각색이었다.
카페 마루의 세진을 제외하고는 답을 해야 할 사람이 없었다. 세진은 너 그렇게 살다 언젠가 한 번 크게 사고 칠 줄 알았다며 ㅋㅋㅋㅋㅋㅋ를 날렸다. 부재중 전화 목록에는 새어머니 윤희와 제인도 있었다.
문자에는 축하한다. 너 스타 됐더라 연락 좀 하자는 내용들이 대부분이었다. 서아는 손가락으로 문자를 올리다 새어머니의 문자에 숨을 멈추었다.
<세상 관심 끌고 싶어서 이제 별 가증스러운 천사 흉내를 다 내고 자빠졌네. 연기 한번 잘했네. 네 년의 진짜 본모습을 사람들이 알게 할 거니까 이걸로 뜰 생각 절대 하지 마라.>
서아의 영상 만으로 부족했는지 할머니 손자라는 사람이 그녀의 신발을 찍어 인증샷까지 올렸다. 그야말로 타는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사람들은 너도나도 서아의 선행을 칭찬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녀의 외모 칭찬에 열을 올렸다.
무심하게 올려 묶은 머리에 깨끗한 피부, 동그란 눈과 야무져 보이는 입매가 김태희 닮았다는 사람부터 아니다 김태희 보다는 송혜교 쪽을 더 닮았다며 댓글로 싸웠다.
서아는 울상이 되어 중얼거렸다.
‘제발 그만 좀 하세요. 내가 어떻게 김태희랑 송혜교를 닮았다고 이러세요.’
서둘러 퇴근하느라 지하철에 올라타자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쏠렸다. 순간 뜨끔했다. 여기저기서 가로수길 천사라는 소리가 그녀의 귀에 들렸다. 몸을 유리창 쪽으로 돌려 고개를 푹 수그렸지만 좌석에 앉은 사람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앉아 있던 사람이 핸드폰을 열어 그녀 앞으로 내밀며 속삭였다.
“이분 맞으시지요?”
핸드폰 화면에는 그녀가 할머니 발에 신발을 신겨 드리고 있는 장면이 캡처되어 있었다. 서아는 당황해서 대답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인 채 다른 칸으로 옮겼다. 하지만 그 칸에서도 마찬가지로 그녀를 알아본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들어야 했다.
겨우 집에 들어온 서아가 거실 소파에 몸을 던지며 소리를 질렀다.
“아, 어떻게 해. 누구야? 누가 남의 영상을 함부로 올린 거야!”
그때 서아의 핸드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친하지도 않은 누군가의 반갑다는 전화 일 것 같아서 본체도 하지 않았다. 퇴근하고 오는 전화는 하나도 받지 않았다. 한 번 받지 않으면 대부분 끊어졌는데 이번에는 집요하게 울렸다. 서아는 하는 수없이 몸을 일으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우혁이었다. 갑자기 구세주를 만난 것처럼 반가워서 재빨리 전화를 받았다. 하룻밤 보지 못했는데 마치 한 달은 보지 못한 것만 같았다.
“우혁 씨!”
서아의 목소리 톤이 저절로 올라갔다. 하지만 돌아온 우혁의 반응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야, 은서아, 너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놀란 서아가 말을 잇지 못하고 더듬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