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핀클 저 / 임지선 옮김 / 생각의 힘
몸에 문제가 생겨 미술관 투어를 하지 못하고 있다. 아쉽지만 당분간 꼼짝하기 어려울 듯싶다. 넘어졌으니 쉬어가는 수밖에 없다. 그럴 때는 책을 읽으면 된다. 나의 허접한 육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일은 읽는 것이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지. 미쳐야 미친다고 했지만 진짜 미술에 미쳐 인생 말아먹은 남자에 관한 이야기를 읽었다. 잘만 했으면 불법적인 일도 커리어가 될 수 있었는데 끝내 몰락하고 만 미친 사랑의 이야기다. 도파민 분출하는 짜릿한 순간이 이어지니 여름날 더위를 잊기에도 좋은 이야기다. 에어컨 아래서 수박 먹으며 읽다 보면 내가 그와 함께 미술관에 있는 것만 같은 느낌에 심장이 조여 온다. 저자인 마이클 핀클은 유려한 이야기꾼이다. 자 그럼 그를 따라 이 미술에 미친 브라이트비저의 행적을 따라가 보자.
나는 미술관에서 20호에서 50호 정도의 그림을 볼 때면 이 그림을 우리 집에 건다면 어울릴까라는 생각을 먼저 한다. 대부분 적당한 사이즈의 그림을 보면 그런 생각을 한다고 한다. 그런데 영화 '도둑들'을 만든 최동훈 감독은 미술관을 관람할 때 여기서 딱 한 작품만 훔친다면 어떤 작품을 몰래 가져갈 것인가를 생각하며 감상해 보라고 말했단다. 책의 서두 찬사글에서 정재승 교수가 이 이야기를 하며 최동훈 감독 덕분에 그림들이 완전히 다르게 보이는 은밀한 미학적 쾌감을 얻었다고 했다. 미술관을 거니노라면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는 작품들 속에서 가끔 소외감을 느낄 때가 있다. 아름답지만 뭔가 나와는 너무 먼 나라의 이야기 같은 이질감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데 그림을 훔쳐서 소유한다면? 너무 달콤해서 이가 썩고 당뇨가 올 것만 같은 느낌이다.
이야기는 17세기 플랑드르의 화가 페테르 파울 루벤스의 집에서 시작된다. 루벤스의 집은 기품 있는 박물관으로 그의 작품과 소장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거기서 브라이트비저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루벤스가 선물 받은 것으로 추정되는 독일 조각가 게오르크 페델의 '아담과 이브'라는 상아 조각상이다. 이브의 물결치는 머리카락, 뱀의 비늘, 올록볼록한 나무 질감을 가진 이 조각상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작품 중 하나다.
브라이트비저는 경비원들이 점심 식사를 위해 자리를 비운 순간 스위스 아미 나이프를 이용해 프렉시글라스를 열어 아담과 이브를 훔친다. 스물두 살의 브라이트비저와 그의 여자친구 앤 캐서린은 중고 명품을 걸치고 상냥한 인사를 하며 박물관에 들어가 순식간에 미술품을 훔쳐내 온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조각상이 그들의 품에 안겨 있다. 세상을 모두 얻은 것만 같은 벅찬 감동에 자동차 액세러레이터를 힘껏 밟는다. 그들 앞에는 어떤 장애물도 없었다.
프랑스 동부 공업 지구에 위치한 뮐루즈는 자동차와 화학 공장이 몰려 있는 지역이다. 어딜 가나 아름다움이 넘치는 이 나라에서 가장 별 볼 일 없는 동네에 고만고만한 집들이 모여있다. 흰색 석고를 바른 콘크리트 벽에 작은 창이 몇 개 있고 붉은 기와지붕이 가파른 소박한 이 집 다락방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예술작품으로 발 디딜 틈이 없다. 침대 옆에는 '아담과 이브'가 있고 풍요의 여신 디아나의 입상과 알렉산드리아의 성녀 카트리나 조각상이 있다. 나폴레옹이 직접 의뢰한 담뱃갑과 에밀 갈리에의 화병이 있다. 벽에는 크라나흐, 브뤼헐, 부셰, 와토, 호이엔, 뒤러등 시대를 풍미한 거장들의 유화가 있다. 별 볼 일 없는 동네 특별할 것 없는 이 다락에는 자그마치 20억 달러 우리 돈으로 2조 7,000억 상당의 예술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모두 브라이트비저와 앤 캐서린이 훔친 물건들이다. 다락방은 그들이 만든 예술의 보물상자였다.
역사상 유명한 미술품 도둑들이 많이 있지만 그들은 대부분 돈 때문에 도둑질을 했다. 모나리자처럼 너무 유명한 작품을 훔쳤다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전전긍긍한 도둑도 있었다. 그러나 브라이트비저는 아름다움에 둘러싸여 마음껏 즐기고 싶어서 훔쳤다. 그의 눈에 박물관은 예술의 감옥이었고 자신이 예술품을 해방시켜 온전히 즐기고 싶었을 뿐이었다. 유럽 전역에 걸쳐 온갖 미술관과 박물관을 돌아다니며 훔쳤고 결코 꼬리를 잡히지 않았다. 그들은 점점 대담해졌고 다락방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미술품이 쌓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두렵고 긴장되고 스릴 넘쳤지만 점점 중독상태가 되면서 무감각하게 훔치기 시작한다. 보란 듯이 훔쳐도 잡히지 않자 대담해져 갔다. 브라이트비저는 망을 보는 앤 캐서린이 허락할 때만 훔쳤지만 그날은 앤의 주의에도 개의치 않고 훔쳤다. 스위스 알프스의 중세 도시 루체른을 여행하던 중 개인 화랑에서 빌렘 반 엘스트의 정물화를 훔쳤다. 그리고 드디어 붙잡혔다. 여기서 멈췄더라면 좋겠지만(?) 경제적 능력이 있는 조부모의 도움으로 어머니가 능력 있는 변호사를 구해 큰 처벌 없이 끝냈다. 두 사람모두 초범이었고 유럽 전역에서 도둑질을 하는 바람에 국가 간 정보 공유가 되지 않은 영향도 있었다.
붙잡혀도 별일이 아니라는 것에 브라이트비저는 더 대담해졌고 아름다운 미술품이 자신에게 손짓하는 것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제대로 잡혔다. 브라이트비저의 꼬리를 잡은 경찰이 그의 다락방을 급습했을 때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 많은 미술품들은 모두 어디로 간 것일까? 아래층에 살면서 브라이트비저의 사생활을 존중하느라 다락방에는 한 번도 올라오지 않았던 엄마는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일까? 이야기는 또다시 미궁으로 빠진다.
예술품 도둑으로 유명세를 탄 브라이트비저는 매혹적인 자신의 이야기를 팔아 유명인이 될 수도 있었지만 이야기는 그렇게 흘러가지 않는다. 미술사를 공부하고 해박한 지식과 안목을 가졌던 브라이트비저는 그래봤자 도둑일 뿐이었다. 남의 물건에 손을 대는 것에 너무 익숙해져 결정적인 순간에 상점에서 도둑질을 하는 바람에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던 미술품 애호가는 그저 도둑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저자 마이클 핀클와 만났을 당시 그가 보여준 행동은 도둑으로서는 재능을 타고났다는 것을 드러낸다. 세상에 다양한 재능이 있지만 이런 재능은 결국 삶을 망가뜨린다.
다락방에 있던 그 많은 미술품들 중 조각상처럼 훼손이 불가능한 것은 강물에 버려진 것을 되찾았지만 그림들은 끝내 찾지 못했다. 브라이트비저가 한 짓에 비해 처벌의 수위가 너무 낮아서 당황스러웠다. 결국 중단하지 못하는 도둑질 때문에 인생이 망가졌지만 그가 한 짓에 비해 처벌이 약했다. 저자는 미학이 윤리보다 우월하다는 오스카 와일드의 문장을 서두에 씀으로써 은연중에 브라이트비저를 옹호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나는 어처구니없는 도둑과 그 도둑을 감싸느라 미술품을 훼손한 어머니는 마땅한 벌을 받지 않았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