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 청주

두 번째

by 은예진

엄마가 겨울이면 노인성 건조증이 더 심해진다. 옷에 하얗게 달라붙는 살비듬을 보면 소설 속에 등장하는 노인의 묘사를 보는 것 같다. 치매가 심해지면서 관리를 하지 못하는데 요양보호사와는 절대 목욕을 가려고 하지 않으신다. 아버지가 목욕 가라고 하면 싫다고 고개를 젓다가도 내가 목욕 가자고 하면 신이 나서 따라나선다. 그렇게 목욕탕에 가서 세신을 받고 나면 세상 행복한 기분으로 시원하다며 룰루랄라 하신다. 기억은 없어도 당장의 감정은 살아 있으니 치매는 지독하게 현재를 살게 해 준다.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이 현재에 산다. 지금 배부르면 좋고 지금 개운하면 좋다. 그런 엄마와 목욕탕에 가기 위해 청주를 방문한 날 국립현대미술관을 들려왔다. 두 번째 방문이다.



동생이 도슨트를 하고 있어서 시간을 맞추면 좋겠지만 그건 어려우니 마음먹었을 때 들려야 한다. 시간 날 때 들린다고 생각하면 어렵다. 주말 고속도로는 밀리고 집에 가야 하는 마음은 바쁘니 단단히 마음을 먹어야 가능하다.


이번 전시는 '조우遭遇, 모던아트협회 1957-1960' 2025. 10.2~ 2026.3.8 전이다. 국립현대미술관청주에서는 다양한 전시가 열리고 있는데 '조우遭遇, 모던아트협회 1957-1960' 전을 제외하고는 무료다. 모던아트협회 전시를 보기 위해서는 입장료 2,000원을 내야 한다.


'조우遭遇, 모던아트협회 1957-1960'

1956년 대한민국미술 전람회는 내부갈등으로 국전분규 사태를 맞이했다.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주관 전시에 참여했던 친일파 원로작가들이 심사위원으로 대거 참여해 일본 화풍에서 벗어난 젊은 작가들에게 낮은 점수를 주었다. 이에 젊은 작가들이 시대정신을 강조하며 반국전 운동에 나섰는데 그 대표적인 모임이 '모던아트협회'다. 국전분규를 통해 새로운 예술적 모색을 하던 젊은 작가들은 모던아트협회 활동을 하며 현대 미술의 발전을 촉진한바 그들은 대한민국 미술역사에 중요한 분기점을 만들었다.


모던아트협회는 한묵, 박고석, 유영국, 이규상, 황염수를 중심으로 해서 개별 작가의 실험을 존중하는 열린 연대로 단색화, 민중미술 등에 출발점이 되었다. 국전의 사실중의에 맞선 모던아트협회의 추상화는 단순한 양식이 아니라 삶과 정신, 현실과 사유를 아우르고 있다.


1957년부터 1960년까지 여섯 번의 전시를 개최한 모던아트협회는 문신, 정점식, 정규, 김경, 천경자, 임완규 등이 합류하면서 활동의 폭이 넓어졌다. 이들은 전후 한국적 모더니즘의 좌표를 설정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묵 설경


정점식 실루엣


박고석 장마 뒤


천경자 옷감집 나들이


모던아트협회의 그림들은 '모던'이라는 말이 적당히 어울린다. 모던이라 하면 '현대의' 또는 '근대의'라는 뜻이지만 우리는 대체로 '세련되고 현대적인 느낌'에 모던이라는 말을 쓴다. 모던아트협회의 그림들은 추상이라기보다는 추상적이라는 말이 더 울린다. 너무 낯설게 전위적이지 않아서 보기에 편하면서도 전후 미술계의 실험정신이 보이는 그림들은 관람하는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다.


그림 중에 한묵의 그림이 가장 많았는데 검색해 보니 백수를 넘긴 화가였다. 역시 예술가의 장수는 축복이다. 1914년에 태어나 2016년에 돌아가셨다. 1960년 모던아트협회의 활동이 중단될 시점에 문신과 한묵은 파리로 향했고 이규상, 김경, 정규가 잇따라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일찍 죽으면 고흐 정도로 작품활동을 미친 듯이 하지 않은 한 작품 수가 적을 수밖에 없다.


모던아트협회에 나중에 합류한 천경자의 그림은 두 점 있었다. '옷감집 나들이'와 '환'이었다. '옷감집 나들이의 색감'이 너무 예뻐 발걸음을 멈추었는데 '환'은 매혹적이었다. 샤갈의 그림을 연상시키는 몽환적인 분위기에 그림이다. 천경자는 1969년부터 세계 곳곳을 여행 다닌 것으로 유명한데 '환'은 1961년작이다. 그런데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백인으로 보인다. 그녀는 이국의 결혼식 풍경에 기뻐할 '환歡'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내가 이 그림에서 샤갈을 연상한 것은 샤갈이 유난히 연인이나 결혼에 대한 그림을 많이 그렸기 때문일 것이다. 환에는 결혼식의 들뜬 기분이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었다.


모던아트협회 전을 보고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돌아온 미래 ; 형태와 생각의 발현' 2025.8.7~ 2026.7.31이라는 제목으로 미술은행 20주년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다.


미술은행이란 국립현대미술관에 2005년 설립된 기관이다. 정부 예산으로 미술작품을 구입하고 공공기관, 지역문화예술기관, 기업 등에 대여, 전시하는 것으로 미술문화 발전과 국내 미술시장 활성화에 기역하고 있다. 책을 정부에서 사서 도서관에 비치 무료로 볼 수 있게 하는 것처럼 미술은행은 미술품을 구입해 작가들이 작품활동 하는 것을 지원하고 우리가 무료로 예술을 즐길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미술은행 20주년을 맞이해 미술은행이 품었던 혁신적인 미래가 어떻게 현재가 되었는지에 대한 고찰로 돌아온 미래라는 제목하에 기획전을 개최했다 그래서 전시된 작품들은 실험적이고 도전적인 작품 위주로 전시되어 있다.


빠키 움직이는 원형들 6 (빨강과 하늘색)

성낙희 회전

조덕현 문희 오마주


미술은행 전시는 작품 개별로 감상한다기보다 뭉뚱그려 전체 흐름으로 이해했다. 시간이 부족하기도 했지만 개별 그림으로서의 의미보다 공공미술 측면에서 살펴보는 게 효과적으로 보였다.


아름다운 것은 비싸다. 미학적인 측면에서 조금 신경을 썼다 하면 실용적인 측면만 고려한 물건과 가격 차이가 엄청나게 벌어진다. 형편이 넉넉하지 않으면 아름다움에 돈을 지불할 만큼 마음에 여유를 갖기 어렵다. 그래서 일부러 아름다운 것을 외면할 때도 많다. 그림을 보면서 이게 우리 집 거실에 걸려있다면 어떨까 생각하다 보면 어쩐지 한심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레플리카는커녕 프린팅 제품도 비싸다고 생각하면서 우리 집 거실에 거는 상상을 할 일인가? 그런데 미술은행은 우리가 비용을 들이지 않고 아름다운 것을 실컷 즐기게 해 준다. 그렇다면 꼭 소유하지 않아도 아름다움을 누릴 수 있는 것 아닌가?


소유의 욕심 버리고 아름다운 것 자체를 즐기고자 한다면 로열코펜하겐의 수놓은 듯 섬세한 문양의 접시도 화려한 프린팅으로 액자를 만들어 걸어놔도 손색없는 에르메스의 스카프도 즐길 수 있다. 굳이 소유하지도 못할 비싼 물건은 쳐다보지도 말아야 한다고 생각할 것 없이 그림 보듯 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삶을 윤택하게 만들어줄 아름다운 것들의 목록이 계속 떠오른다. 소유하지 않아도 아름다운 자연을 즐길 수 있듯 마음을 비우면 아름다움에 얼마든지 감탄할 수 있는 것들이 많다.


공공미술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이 아름다움을 즐길 수 있게 해주는 측면에서 꼭 필요한 일일 것이다.


날이 어둑해져서 집에 도착했다. 겨울밤은 흑백으로 물들어가는데 나의 눈은 아직 다채로운 색의 향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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