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남시에는 대규모 아트센터가 조성되어 있는데 오페라하우스, 콘서트홀을 비롯해 큐브하우스로 명명된 별도의 건물에 미디어센터와 미술관등이 자리 잡고 있다. 천당 다음에 분당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는 분당의 공립 예술기관이 총망라되어 있는 곳이다. 분당의 이름값을 할 만큼 규모면에서는 대단하지만 미술관만 보면 다소 아쉬움이 남는 측면이 있었다.
야탑에서 이매 쪽으로 버스를 타고 가다 보면 포스터와 사각 건물이 눈길을 끌고는 했다. 예술 관련건물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큰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이번에 가보니 내가 지나가다 자주 보던 건물이었다. 위쪽에 대형 건물인 아트센터가 위용을 자랑하고 아래쪽에 길에서 보던 사각 건물은 큐브플라자로 미술관과 미디어센터가 입주해 있었다.
큐브플라자에는 기획전시실, 반달갤러리, 상설전시장 이렇게 세 개의 전시실이 있는데 모두 출입문이 따로 있는 별개의 전시실이다. 내가 지금까지 가본 공립 미술관중 가장 전시의 질이 훌륭했던 곳은 양평군립 미술관이었다. 그곳의 전시가 훌륭했던 것은 대규모 전시에 서사를 입혀 진행방향을 따라가며 그림을 보다 보면 전시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런데 전시실이 분리된 곳은 서사를 입히기에 너무 한정적인 공간이 되는 게 아니가 싶었다.
기획전시실에서는 <베르메르의 비밀 : 고요 속의 빛> 2025. 12. 12~ 2026.3. 5 베르메르 사후 350주년 기념 전작 레플리카전이 준비 중이었다. 전에 고흐의 레플리카 전에서 아무런 감흥을 받을 수 없었던 경험이 있어 기다리지 않고 큐브 미술관을 방문했다. 레플리카라는 것을 모르고 보면 어떨지 몰라도 도록을 보는 기분이었다.
두 번째 상설 전시실에서는 2025 성남큐브미술관 소장품주제기획전 <시대의 취향> 2025.10.24~12.21 전이 열리고 있었다.
'취향'은 개인의 기호를 넘어, 한 시대가 만들어낸 공통의 가치와 문화적 경향을 반영한다고 본 큐브미술관이 수집한 작품들은 일상의 소소한 풍경에서 시작 실험적인 작품들로 확장시켜나가고 있다. 김호민, 나진숙, 박상희외 13명의 작품들이 한 점씩 전시되어 있는 전시관은 호젓했지만 나름 눈길을 끄는 작품이 있었다.
F와 J의 집 / 함수연
팸플릿에서 함수연의 그림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일상에서 마주한 인물과 풍경을 인공적인 파스텔톤으로 담아내어 현실과 꿈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들고, 그 너머의 세계를 상상하게 한다. 캔버스 안의 도시적 장면들은 익숙한 공간 속 숨어 있는 현대인의 쓸쓸한 정서의 표현이며 작가의 일상이 담긴 기록이다.
나는 F와 J의 집을 보면서 문득 요시모토 바나나의 '키친'을 떠올렸다. 무슨 연유인지 알 수 없지만 그 쓸쓸하면서도 위로를 주는듯한 느낌이 '키친'이었다. 할머니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시고 세상에 혼자 남은 미카케를 자신의 집에 들이는 유이치. 유이치와 함께 미카케를 진심으로 좋아해 주던 그의 엄마이자 아빠인(처음에는 아빠였지만 엄마가 죽고 나서 여성이 되어 아들을 키운) 에리코. 실제 소설 속 유이치의 집은 아파트임에도 그림 속 집은, 그 분위기는 미카케를 품어준 그의 집처럼 느껴졌다. 에리코마저 살해당하고 온기가 사라진 집에서 미카케가 요리를 해 유이치를 먹이는 장면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저 사람은 나에게 미카케처럼 느껴진다. 그녀는 지금 유이치의 키친을 향해 가고 있다.
결-숨결, 물결, 바람결 / 나진숙
합판 위에 그린 작품은 회화적 요소와 조각적 요소를 결합한 입체감을 가졌다. 이 신비로운 노란 결은 숨결에서 물결로 바뀌고 다시 바람결이 되고 있다. 선명하게 반짝이는 그림은 매혹적인 상상을 하게 하면서도 결과 결 사이로 시선을 잡아당긴다. 이 선명함에 시간이 담기면 어떻게 될까 궁금해졌다.
세 번째 반달갤러리에서는 2025 성남작가조명 전 정보영의 <그림 속의 그림>2025.10.24 ~12.21 전이 열리고 있었다. 이 전시의 전시 감상 자료집이 무척이나 유용했다. 개인전의 자료를 이토록 명료하게 설명하다니 작가보다 기획자인 박은경이라는 이름에 더 주의가 집중될 정도였다. 작은 책자 하나를 통해 나는 작가가 어떤 사조에 영향을 받았고 어떤 시선으로 그림을 그렸는지 이해했으며 정보영작가가 추구하는 빛에 시선을 돌릴 수 있었다.
반달갤러리는 일이 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일층에는 정보영 작가의 인터뷰 영상을 참고 자료로 틀어 놓고 있으며 이층으로 올라가면 얀 반 에이크의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이 탁상달력처럼 서 있다. 그 주변으로 정보영 작가가 작품에 사용한 유리 오브제들이 전시되어 있다.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은 화면 안에 시간과 공간이 복잡한 시선으로 얽혀있는 작품으로 유명하다. '시녀들'에는 그림을 그리고 있는 화가 자신과 그림을 의뢰한 펠리페 4세 국왕 부부의 모습이 담긴 거울이 등장한다. 단순한 초상화가 아닌 이야기가 들어간 '시녀들'은 바로크 미술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벨라스케스는 '시녀들'을 통해 한 화면 안에 화가가 서 있는 공간, 배경 속 거울, 관찰자의 공간까지 담고 있으며 그림 속에 캔버스를 배치하여 화면을 나오는 시선의 방향을 전도하고 그 시선이 결국 감상자 자신에게 되돌아가게 만든다.
정보영은 1995년 '벨라스케의 아틀리에'라는 그림을 그렸다. 17세기 네덜란드. 바로크 회화의 조형 요소를 작업에 참조하고 변용해 온 그녀의 전시회가 <그림 속의 그림> 연유는 여기에서 온다. 화가가 30년 동안 천착한 '재현'과 '존재'에 대한 고민은 '보는 것은 곧 그리는 것'이라는 답으로 귀결된다. 화가의 그림에는 대부분 빛이 등장하고 관람자는 그 빛 속에서 서사를 읽는다.
'어떤 조망'시리즈 중 하나는 외딴곳 창고처럼 보이는 두 건물이 마주 서 있다. 건물의 열린 문으로 빛이 새어 나와 가운데서 만난다. 그 빛을 따라 나의 시선이 서성인다. 조망이란 보는 것이고 보는 것은 곧 그리는 것이라는 작가의 말이 와닿는 그림이다. 정보영 작가의 그림 속에 빛은 조연이 아닌 주연으로 등장한다.
작가의 의도와 작품 해설이 잘 짜인 전시였다. 이제 나는 그림을 보면서 큐레이터가 어떤 일을 하는지 조금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전시회는 큐레이터 박은경의 기획이 반 이상을 한 전시라는 생각이 든다.
반달 갤러리를 나가 위쪽으로 올라갔다. 오페라 하우스 일층에 갤러리 808이 있다. 하지만 대관 위주의 갤러리라 전시회의 질이 거론할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그런데 갤러리 밖 오페라 하우스 로비에 작은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성남미디어센터 사진교육 심화반 수료 전시회였는데 콘셉트가 눈길을 끌었다. 책을 한 권 골라 그 책의 주제와 사진을 연결한 작업이었다.
포스터에 보이는 것처럼 '사람의 아들, '레미제라블', '오리진', '모순', '말더듬이의 겨울수첩'을 가지고 사진 작업을 했다.
텅 빈 로비를 걸으며 혼자 감상한 사진들과 내용이 큐브 미술관에서 오페라하우스까지 올라온 보람을 느끼게 해 줬다. 책 내용과 사진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아마 사진작가에게 들어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걸 몰라도 충분히 즐길만한 사진이었다. 나는 평소에 하지 않는 방명록에 소감을 쓰고 내려왔다. 역시 나는 이야기를 탐하는 사람이라서 이런 걸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성남아트센터를 다녀와서 공연히 바빴다. 한주는 심란했고 또 한주는 몸이 아팠다. 내가 여기에 쓴 모든 전시는 이제 끝났다. 시의적절하지 못한 글이지만 미술관 자체에 대한 기행에 의미를 두고 적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