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에 눈이 온다고 했다. 나는 스마트폰 액정을 보며 출발 직전까지 고민했다. 눈이 온다는데, 반드시 오늘 해야 하는 일도 아닌데, 굳이 고속도로를 타겠다고? 그럼에도 가고 싶었다. 언제 또 아파서 무릎이 꺾일지 알 수 없는 일상에서 조금이라도 멀쩡할 때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한다. 나는 결심을 굳히고 내비게이션을 열었다. 수도권 제2순환도로를 타고 서용인에서 영동고속도로로 바꿔 타면 50분 정도 걸린다. 오늘은 수원시립미술관을 간다.
이제 미술관 다니는 일에 조금씩 요령이 생기고 있다. 가기 전에 전시에 대한 조사를 미리 하고 관련 도서도 읽었다. 예습의 중요성을 이제야 깨우치고 있다. 학교 다닐 때 그렇게 예습, 복습에 대해 귀가 닳도록 들었지만 소용없었다. 누가 알려줘서 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깨우쳐야 하고 배우는 데는 죽을 때까지 끝이 없다.
수원시립미술관 입장료는 4,000원이다. 할인 요건을 확인하라고 하지만 나는 해당되는 것이 없다. 수원시립미술관에서는 지금 세 가지 전시가 이루어지고 있다. 전시가 모두 좋아서 적기에 방문한 기쁨이 있었다. 시립미술관을 방문하면 할수록 저렴한 비용으로 이토록 고급스러운 문화를 누릴 수 있는 것에 감탄한다. 공립 미술관은 시민들에게 축복이다. 부디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좋은 시설을 향유할 수 있으면 좋겠다.
# <공생 > 2025. 9.26 ~ 2026. 3. 2 수원시립미술관 제2 전시실
11월까지는 예약제로 운영했지만 12월부터 매 시 선착순 입장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미술관 지하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가 12시 50분, 나는 표를 사자마자 제2 전시실로 향했다. 내 앞에서 전시실이 열렸다. 전시실 안으로 들어가자 신발을 벗고 슬리퍼로 갈아 신으라는 안내문이 있다. 부드럽고 편안한 슬리퍼를 신고 신발을 비닐봉지 안에 넣었다.
슬리퍼를 신고 안으로 들어서자 털이 길어서 폭신하고 부드러운 카펫이 밟힌다. 그 카펫은 슬리퍼를 감싸 안으며 고속도로를 달리느라 조금은 예민해진 나의 심신을 누그러트린다. 나는 눈앞에 들어온 전시실 풍경에 약간 놀란다. 허공에 매달린 조각품은 윤향로의 '오이스터'다. 내가 자주 가는 레스토랑에 겨울이면 오이스터 플레터가 계절 메뉴로 나온다. 별거 아니고 석굴 몇 개에 레몬이 곁들여진 건데 가격이 어이없다. 오이스터는 굴이다. 윤향로의 작품은 굴 껍데기이라고 보기에는 좀 매끈해 보인다. 굴이 진주를 품어내는 수용성과 생명력을 은유한다 고한다.
유지완의 '그 밤 꿈'부터 '통로'까지 아홉 곡은 음악이라고 하기에는 낯선 울림같은 소리다. 변사가 영화 이야기를 들려주는 음반의 음향을 작업한 몽환적인 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공간을 채운다. 그리고 내 손에는 입구에서 들고 온 민영훈의 소설 '서로에게 겨우 매달린 사람들처럼'이 들려있다.
푹신한 카펫에 의자를 놓고 민영훈의 소설을 펼친다. 소설은 윤향로의 '오이스터' 보다 유지완의 '그 밤 꿈에 나는 무슨 깊고 깊은 물속에 빠져드는 듯한 감이 들었다'보다 낯설다. 마치 현대 미술을 소설로 쓴 듯 서사가 없는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사람들이 하나둘 소거되는 듯 빠져든다. 깊게 빠져든다. 내 영혼은 넓은 전시실 오이스터 곁을 거닌다. 이 전시는 관람자들이 완성한다.
전시물과 음향과 소설을 결합한 <공생>은 올 한 해 많은 미술관을 다녀본 내게 전혀 새로운 경험을 안겨줬다. 소설을 읽는 동안 예술적 허세가 고양되는 느낌과 함께 반대로 그 부드러운 카펫에서 전해지는 평온함이 벌써 한 해가 가버렸다는 쫓기는 듯한 느낌을 가라앉혀 주었다. 연말연시 마음 시끄러운 사람이라면 평일 이곳에서 오십 분쯤 앉아 있다 간다면 먼 곳으로 여행을 다녀오지 않아도 충족된 마음으로 전시장을 나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누워서도 그 공간이 눈에 어른거렸다.
# <머무르는 순간, 흐르는 마음> 2025. 9. 26 ~ 2026. 1. 11 한국근현대미술
조선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인 정월 나혜석은 수원 출신이다. 수원시에서는 나혜석을 독립운동가로 재평가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객관적인 자료가 부족해 논란에 여지가 있다고 본다. 수원시립미술관을 방문하기 전 내가 읽은 나혜석의 글 모음 '경성에서, 정월'의 소개에는 나혜석을 페미니스트, 독립운동가로 소개하고 있기는 하다. 나무위키에서는 그녀가 만세운동으로 5개월간 옥고를 치른 것은 팩트지만 일제 강점기 친일파 남편과 살면서 일제로부터 호가호위한 것 또한 사실이라고 보고 있다. 일제강점기에 대외적으로 많은 활동을 했던 지식인들은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녀가 친일파였다고 비난할 생각은 없지만 '경성에서, 정월'의 나혜석 소개에 독립운동가라고 쓴 것은 생각해봐야 할 문제라고 여겨진다.
<머무는 순간, 흐르는 마음>은 나혜석의 사진첩에서 시작한다.
나혜석이 정신적, 육체적으로 어려움을 겪던 만년의 시기에 만든 사진첩에는 자신의 정체성을 되찾으려는 노력이 보인다. 수원시립미술관에서는 개관 10주년을 기념하여 이 사진첩을 근간으로 4부로 나뉜 한국근현대미술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나혜석과 관련되었거나 그녀의 사진에서 보여주는 정서를 담은 그림으로 구성한 전시는 기획자의 노고가 보였다. 전시는 개별 그림보다 전체 기획 의도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배워가고 있는 요즘이다.
1부는 한 예술가의 사진첩이라는 제목으로 나혜석 사진첩의 사진들을 보여주고 있다.
사진의 내용을 보며 돌아서면 '가장 일상적이고 가장 평범한 순간으로부터'라는 제목의 2부가 열리고 그림이 등장한다. 나혜석이 사진첩에서 그리워한 것은 이제는 잃어버린 가족이다. 딸 하나와 아들 셋을 둔 그녀는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남편 김우영과 이혼하지 않기 위해 애를 썼으나 돌아선 남편은 이미 다른 여자가 생겼고 더는 버틸 수 없었다. 잃어버린 가족에 대한 나혜석의 그림움을 <머무는 순간, 흐르는 마음>에서는 동시대에 활동했던 작가들의 가족 그림으로 표현했다.
배운성 '가족'
이외에도 박수근, 백영수, 임군홍등의 그림이 등장했으며 가장 눈길을 끈 것은 나혜석의 이혼한 남편 김우영의 초상화였다.
나혜석의 글모음인 '경성에서, 정월'을 통해 본 김우영은 사랑에 진심이었고 그만큼 돌아서면 무서운 사람이었다. 상처하고 전처에게서 난 딸이 하나 있던 그는 나혜석이 이화학당 만세사건으로 옥고를 치를 때 그녀를 도와준 변호사였다. 나혜석에게 반해 6년간 만남을 이어갔고 결혼할 때는 나혜석의 죽은 애인 묘지에 비석을 세워달라는 청을 받아들인 사랑꾼이었다. 나혜석이 화가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아낌없이 지지도 해줬던 사람이다. 그러나 최린과의 스캔들이 터지자 주변 사람들이 김우영을 부추겼고 더는 나혜석과 결혼 상태를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다른 자료에서 보면 나혜석은 뜨거운 가슴을 가진 여자였고 스캔들은 최린 이외에도 많았다. 피카소나 고갱뿐만 아니라 그 가난했던 박생광마저도 로맨스에서 에너지를 얻는다고 했는데 나혜석만 비난을 받다니 역시 여자로 태어난 게 죄는 죄다. (그렇다고 나혜석이 잘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이 옳았다. 임신했을 당시 그녀가 태중의 아이에게 가졌던 감정을 보면 결혼 생활은 그녀에게 정말 어울리지 않았다.)
3부는 '여정의 어딘가에서'라는 제목으로 나혜석이 화가로서 성장하는 과정에 만났던 인물들의 작품들이 등장한다. 김우영과 함께 633일간 세계 일주를 했던 그녀는 해외에서 유학하던 화가들을 만나 교류한다.
유럽에서 만난 배운성, 백남순, 이종우 등을 만나 교류하며 서양미술을 경험하게 된다. 나혜석 인생에 가장 찬란했던 순간에 만난 이들의 그림이다.
이혼 후 나혜석은 김일엽이 있던 수덕사에 들어가 자신도 승려가 되고 싶다고 했다. 스캔들 메이커가 승려가 되겠다고 하니 김일엽은 어림없는 일이라고 생각한 듯싶다. 나혜석은 수덕사 근처 여관에서 오 년을 머물렀고 그녀에게 미술을 배우고자 하는 젊은이들이 찾아왔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이응로였다.
이응로는 훗날 나혜석이 머무르던 여관을 사서 수덕 여관이라고 이름 지었다. 그 여관의 구들장 탁본이다.
4부 전시 나를 잊지 않는 행복 편에서는 나혜석처럼 식민지시대 드물게 해외여행을 했던 화가들의 그림을 전시하고 있다. 지난 뮤지엄 산에서 봤던 박래현의 그림과 천경자의 그림이 전시되고 있었다. 박래현의 그림은 뮤지엄 산에서 본 것과 유사한 고대문명과의 만남 순간을 그린 그림이었다. 해외여행을 많이 다닌 천경자의 그림은 역시나 이국적이었다.
전시는 이렇게 끝났다. 나는 나혜석 하면 으레 등장하는 그녀의 말년에 대한 이야기가 듣기 싫다. 마치 방탕하게 산 신여성의 최후는 무연고자 병원에서 홀로 죽어가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자기 이름을 감추고 병원에 들어갈 때 그녀는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홀로 죽어 갔다고 삶 전체를 잘못 살았다 할 수 도 없는 일이다. 자화상 속 그녀는 고집세고 강한 면모를 드러낸다. '경성에서, 정월'을 읽어보면 고집이 센 것은 알 수 있다. 타협하지 못하는 성격이 스스로를 고립시킨 걸지도 모르겠다.
# <네가 4시에 온다면 난 3시부터 행복할 거야. 수원시립미술관 5 전시실 2025. 4. 15~ 2026. 2. 22
생떽쥐베리의 '어린 왕자'에서 여우가 어린 왕자에게 했던 말 '네가 4시에 온다면 난 3시부터 행복할 거야'라는 말을 표제로 선택한 전시는 채지민과 함미나 젊은 작가 두 명의 그림을 전시하고 있다. 사랑에 빠져 본 사람들은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말이다. 너를 4시에 만난다고 생각하면 당연하게 3시부터 아니 그전부터 행복할 거다. 기다리는 여행도 여행의 순간보다 준비하는 과정이 더 즐거울 때가 있다. 기다리는 순간의 기쁨을 두 명의 작가들에게서 얻을 수 있을까?
1부, 기억의 풍경, 현실과 비현실 사이 - 채지민
아무도 페가수소 41에 관심이 없었다
압도적 벽
'채지민은 평면성과 공간감의 모순적 공존을 탐구하며, 일상의 오브제들을 비일상적 맥락에 배치하여 관람객에게 낯선 경험을 제공한다.'
팸플릿에 기술된 위의 문장은 '압도적 벽'이라는 그림에서 모두 설명된다. 이차원의 회화 안에서 입체적 계단과 벽을 배치하고 가운데 뜬금없는 라바콘이 등장한다. 평면성과 공간감의 모순이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저 벽과 계단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리고 엉뚱하게 놓여 있는 라바콘은 비일상적 맥락의 배치다.
채지민 그림의 입체성은 재미있는 경험을 선사한다. 그림에는 사인처럼 라바콘이 등장하고 입체적 조형물은 대단히 정밀 하게 계산된 것을 느낄 수 있다.
채지민의 인스타에 @jiminchae1121 들어가 보면 더 많은 작품을 구경할 수 있다. 쨍한 색감과 에르메스와 협업했던 작품들이 대단히 동화적인고 아름답다.
2부,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 - 함미나
과일 먹는 아이
헌터
함미나의 그림이 '네가 4시에 온다면 난 3시부터 행복할 거야'라는 기획의도와 조금 더 어울리는 그림이 아닌가 싶다. 유년 시절 바닷에서의 경험과 기억을 작업의 중심에 두며, 이를 통해 자신을 치유하고 관람객에게 위로를 전하는 함미나의 그림은 나의 입가에 미소가 머무르게 한다.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를 가진 어여쁜 손녀를 둔 나는 어린 소녀가 등장하면 저절로 입가가 올라간다. 이 조그만 아이가 쌍안경을 들고 두리번거리는데 아이가 잡고 싶은 새는 뒤에 있다. 어설픈 소녀 헌터는 밖에 나가 노는 게 좋은데 집에 가자는 엄마한테 반항하느라 울며 바닥을 뒹구는 우리 아기를 떠올리게 한다. 나도 네가 4시에 온다면 3시부터 행복하단다 아가야.
함미나 작가의 인스타에서는 @paint. hmnd 좀 더 심도깊고 다양한 작가의 그림을 볼 수 있었다. 단순히 동심만을 표현하는 작가가 아님을 확인하는 재미가 있다.
전시를 보고 돌아서면 포니정홀이 눈에 띈다.
아버지가 택시 회사를 운영하셨기 때문에 나는 기아 브리사부터 포니, 스텔라 등 현대차의 예전 모델들을 모두 타봤다. 아버지 회사의 택시는 모두 현대차였다. 어린 시절 사진은 주로 주황색 포니에 기대 찍은 것들이 많다. 그 추억의 포니가 왜 수원시립미술관에 있을까? 나의 예상대로 수원시립미술관은 현대산업개발에서 건립 기증한 모양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수원시립 아이파크 미술관이었다. 10년 세월이 흐르며 아이파크가 빠진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