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 과천 2

신상호 : 무한변주

by 은예진

'수련과 샹들리에'전을 보고 나와 커피 한 잔을 마시고 다시 관람에 들어갔다. '신상호: 무한변주' (2025.11.27~ 2026.3.29) 전에 들어서자 분청사기가 눈앞에 펼쳐졌다. 이번 전시는 사전에 알지 못했고 관심도 없었다. 그냥 '수련과 샹들리에' 전에 곁다리 같은 것으로 생각했다. 깊이 생각할 것도 없는 도자기 공예 전시라면 우리 고장에도 있다. 물론 가까이 있어서 가지 않는 도자기 박물관이지만 말이다.


1부 흙, 물질에서 서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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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청사기


1947년생인 신상호는 우리 나이로 올해 80이다. 그러니까 나의 친정어머니와 동갑이다. 치매에 걸려 주간보호센터를 다니는 어머니를 생각해 보면 왕성하게 작업하고 있는 작가의 활동에 경의를 표하고 싶었다. 신상호는 법관이나 의사가 되라는 집안의 기대를 저버리고 1965년 홍익대학교 공예학부에 입학했다. 그의 약력에 보면 대학교 이학년 때 이미 이천에 도자기 가마를 구입해 작품 활동에 임했다는 말이 나온다. 나는 옆에서 작가의 약력을 읽고 있는 낯선 이에게 말이 걸고 싶은 걸 꾹 참느라 힘들었다.


"도대체 얼마나 부잣집 아들이기에 대학교 이학 년짜리한테 가마를 사줄 수 있을까요?"

나는 내내 이 궁금증을 머리에 달고 다녔지만 답을 얻을 수는 없었다. 당연히 없겠지. 누가 이런 걸 궁금해하겠어. 그런데 '살롱 드 경성'의 저자인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사 김인혜가 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답을 얻었다. 집안의 반대에 반항심이 생긴 신상호는 가출을 해서 흙일을 하고 있었고 40일 만에 그를 찾은 아버지가 가마를 사줬다고 한다. 가마를 사 줄 테니 나머지는 알아서 살라고 했다는데 신상호는 정말 알아서 잘 살았다. 예술가에게 실력과 함께 꼭 필요한 것이 운인데 아무래도 신상호는 대박운을 타고 난 사람 같았다. 그리고 그 운을 능가하는 예술적 깡이 있는 사람으로 보인다.


처음 작업은 이천가마에서 남들과 같은 도자기 공예로 시작했다. '청자 진사화문호'를 만들고 김기창 화백과 함께 '백자 청화조목문대호'등을 만들었다. 그렇게 작업을 하면서 도자기 조각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는데 생각처럼 잘 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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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선 꿈- 인간


흙을 붙이는 방식으로 조각을 하고 분청 기법으로 무늬를 넣었지만 성공적이지 못해 다시 위에 올린 분청사기로 돌아가야 했다. 당시 일본과 수교를 맺으며 일본에서 우리나라 도자기 수요가 급격히 늘어났고 그 중심에 이천도자기 공방이 있었다. 신상호는 그렇게 운의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2부 도조의 시대


이제 신상호는 홍익대학교에서 교수를 하며 도자기를 만들었다. 이미 이십 대부터 도예가로 이름을 알린 그는 더 바랄 것이 없어 보였다. 여기서 멈췄으면 평범한 도예 가였을 텐데 신상호는 새로운 문을 열었다. 작업실을 이천에서 장흥으로 옮기고 나고야에서 가스가마를 한국 최초로 들여왔다. 시행착오를 겪으며 가스가마를 안착시키고 백자를 만들며 경제적 부를 누릴 때 그는 도자기 조각이라는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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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조의 시대로 들어가면서 관람자는 멈칫하게 된다. 이미 성공한 도예가가 이렇게 간다고? 엄청난 작업량과 새로운 도전은 보는 사람을 어안이 벙벙하게 만든다. 이제 그에게 단순히 운이 좋았다고 말한 것은 취소해야 할 순간이 왔다. 그는 남들과 비교하기 어려운 스테미너와 열정으로 미친 듯이 잡업에 몰두한 사람이었다. 이 정도 양으로 승부를 건다면 체가 너무 촘촘해서 운이 빠져나갈 수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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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미술에 영향을 받은 신상호는 '아프리카의 꿈- 토템' 같은 작업을 통해 꾸준히 아프리카를 향한 자신의 애정을 드러낸다. 애정의 수준을 넘어 어찌 보면 그의 조형 언어의 핵심이 아닌가 싶다.


3부 불의 회화


도예에서 도자조각으로 넘어갔을 때까지는 그걸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거기까지는 충분히 갈 수 있다. 그런데 신상호는 멈출 줄을 모른다. 이번에는 도자와 건축을 결합한 대형 프로젝트에 나선다. 가로세로 50센티미터짜리 도자타일을 제작해 벽면을 장식하는 기법을 개발했다. 타일에 그림을 그려 굽고 가변성 있는 설치 방법을 개발한 그는 '구운 그림'이라는 명칭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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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호의 구운 그림은 서울 센트럴시티 고속터미널의 <밀레니엄 타이드>를 시작으로 클레이아크김해 미술관, 금호아시아나 사옥, 서초 삼성타운 등의 외벽을 장식했다. 이쯤 되면 한 사람이 이렇게 엄청난 작업을 한 것에 현기증 난다.


나는 성공의 방정식이 질보다 양이라고 생각한다. 양이 늘어나면 질은 어쩔 수 없이 올라갈 수밖에 없다. 진짜 재능이 없어서 도저히 안될 사람이 아닌 이상 양이 늘어나는데 질이 답보할 수는 없다. 그런데 신상호는 그 양이 거의 쓰나미급이고 따라서 질은 폭발의 수준으로 올라간다.


4부 사물과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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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호는 이미 이십 대에 도예가로 성공해서 부와 명성을 거머쥔사람이었다. 그런 경제적 풍요가 뒷받침이 되었으니 예술적 영감의 원천인 아프리카 미술품을 수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미니멀리스트인 나는 수집을 좋아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친정아버지가 수집으로 한재산 쓰는 것을 보고 자랐다. 수석과 난초와 각종 나무 조각이 돈 먹는 하마라서 나머지 가족들이 피해를 많이 봤다. 그래서 남이 모은 것을 볼 때 약간 걱정스럽다. 여기에 얼마나 많은 돈을 태웠을까? 계산을 하게 되는 습성이 있다. 하지만 신상호는 벌만큼 번 성공한 예술 가니까 자기 예술의 근원에 돈을 쓰는 것은 투자일 것이다. 덕분에 지금 장흥에 카페 부곡도방과 신상호 미술관을 풍요롭게 채울 수 있을 것이다.


5부 흙의 끝, 흙의 시작


구운 그림 작업을 하던 신상호는 2018년부터 흙판에 금속 패널을 부착하고 다채로운 색을 입히는 도자 회와 연작 '생명수'와 '묵시록' 작업을 시작했다. 도자의 물질적 깊이를 평면 회화로 만드는 작업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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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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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록


이쯤 되면 손뼉을 치고 싶다. 도자기 그릇에서 시작해 여기까지 오다니 소처럼 우직한 걸음으로 묵직한 흙덩이를 밀며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는 느낌이다. 어디에서 멈춰도 신상호는 칭찬받고 경제적 풍요를 누리며 그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결코 멈추지 않고 계속 나아갔다. 도자기를 만들다 흙으로 조각을 하고 타일을 구워 대형 프로젝트를 하고 이제 거기서 더 나아가 흙으로 대형 그림을 그린다. 이렇게 조각과 회화의 통합을 이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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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의 꿈 우리는 아프리카 나이지리아출토 흑인 청동 두상


전시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2미터짜리 대형 두상이다. 지금 '곰브리치 서양미술사'를 읽고 있는데 나이지리아에서 출토된 흑인 청동 두상을 본 순간 신상호의 '우리는 아프리카'가 어디서 왔는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한 사람의 예술가가 60년간 작업한 결과를 시대별로 나누어 전시하는 것은 대단히 흥미로운 기획이었다. 작가의 작품이 워낙 많았고 작품 제작 기간도 길어서 전시가 풍요롭고 다채로웠다. 지루할 틈 없이 변화하는 작가의 작품 세계를 따라가다 보니 마치 자서전을 읽는 것만 같았다. 전시장에 들어갈 때와 나갈 때가 이렇게 다른 경우는 흔치 않다. 도자기? 하고 들어가서 와하는 탄성을 연속으로 내뱉으며 나왔다.


전시가 여기서 끝났더라면 내 체력을 방전시키지 않을 수 있었는데 3층에 또 전시가 있었다.

한국근현대미술 1 (2025.5.1~2027.6.27) 전이 열리고 있는데 20세기 전반에 제작된 145점이 전시되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인 고희동의 자화상은 너무 친숙해서 웃음이 나왔다. 이제 지친 나는 설렁설렁 그림 앞을 지나칠 뿐이었다. 그런데 별도로 마련된 이중섭을 지나 오지호 앞에서 멈추고 말았다.


오지호3.jpg 남향집

한국 근대미술품 중 몇 안 되는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된 오지호의 '남향집'이다. 오지호 사후 아내 지향진이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한 34점의 그림이 전시되고 있었다. '살롱 드 경성'에서 오지호 편을 읽으면 빨치산에 납치되고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활동에 연루되는 등 혼란의 시대가 만든 틈바구니에 끼어 많은 고생을 했다.


오지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추악함이나 증오 속에서도 미를 향해 나가는 흐름이 있을 때 비로소 회화 세계는 존재한다."는 굳은 신념을 지키며 그늘에도 빛을 비추는 그림을 그렸다. 소박한 전시실 오지호의 그림들은 하나같이 화사한 빛을 내뿜으며 피로감에 지친 내 눈길을 잡아끌었다. 빨간 옷을 입은 소녀와 낮잠을 자는 백구의 모습 속에서 남향집 햇살이 유난히 따스해 보였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함에 빛이 있었다는 성경 구절이 떠오른다. 그의 그림에는 내내 빛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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