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신: 합이합일 분이분일 合二合一 分二分一
햇살이 호수에 부딪쳐 반짝이는 봄날이었다. 아직 벚꽃이 피지 않아 호암 미술관에 가기 좋은 날이었다. 남들은 꽃이 피기를 기다려 가겠지만 나는 꽃이 피지 않은 지금이 적기라고 생각한다. 꽃이 피면 사람이 많고 차가 밀리니 꽃보다 한적함을 더 즐기는 사람이라 아름드리 벚나무에 꽃이 피기 전에 발길을 서둘렀다.
미술관이 문을 여는 10시에 맞추어 도착했다. 미술관에 들어가기 전 먼저 작년에 문을 연 호암 카페에서 호암 라테를 한 잔 마셨다. 익히 가격이 사악하다는 풍문을 들었던지라 절대 기죽지 않고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나 만 원짜리 라테 한 잔 정도는 마실 수 있는 사람이야! 뭐 이런 포스를 풍기며 주사위 모양의 큐알을 찍었다. 커피 가격보다 국수 가격이 나를 놀라게 했다. 국수라고 다 같은 국수가 아니라 별표 국수에 사골육수와 편육을 곁들인 전골 국수라고 하니 이해해 주기로 했다. 그리고 사실 스파게티는 비싸도 되고 국수는 비싸면 안 된다는 법이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달달한 호암 라테로 당 충전을 했으니 아름다운 정원 희원을 가로질러 미술관으로 향했다. 이번 전시는 <김윤신: 합이합일 분이분일 合二合一 分二分一 > 2026.03. 17~ 2026. 06. 28 전으로 우리나라 여성 조각가 1세대인 김윤신의 작품전이다.
김윤신은 1935년 생으로 만 90세가 된 조각가다. 요즘 드는 생각인데 몸을 쓰는 화가나 조각가는 구순의 나이에도 왕성한 작업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글을 쓰는 작가들은 나이가 들면 제대로 된 작품을 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서 아쉽다. 미술계에서는 같은 스타일의 작품을 반복해서 만드는 것이 일종에 세계관으로 인정받는데 글을 쓰는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같은 이야기를 동어반복하면 자기 복제라고 비난받는다. 데미안 허스트는 알약 그림을 1400점이나 그렸다는데 심지어 자기가 그린 것도 아니다. 시인이 그런 식으로 자기 복제적 시를 1400개 쓰면 아무도 읽지 않을 것이다. 독자로서 나도 같은 주제에 천착하는 작가의 글을 식상하다며 비난하고 있으니 미술은 나이 들어도 계속할 수 있는 여건이 훨씬 좋은 게 아닌가 싶다.
아무리 나이 들어서 문학보다 미술이 용이하다고 하지만 구십이 넘은 여성 작가가 전기톱을 들고 있는 모습을 보면 대단하다는 말 밖에 나오지 않는다. 김윤신의 작품 세계를 보면 마치 미술에 자신을 소신공양한 사람처럼 보인다. 그의 삶은 오직 그림을 그리고 조각하는 일 이외에는 어느 것도 안중에 없는 사람으로 보인다.
기원 쌓기
김윤신 초창기 작품인 '기원 쌓기'는 작가의 어린 시절 경험이 투영되어 있다.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아들의 생사를 알지 못하는 그녀의 어머니는 밤마다 장독대에 초를 켜 놓고 자식의 무탈을 기원했다. 초가 녹으면 돌을 올리고 그 돌 위에 또 초를 올려 기원을 쌓던 시절의 바람이 나무로 형상화된 것이다. 지금도 산에 가면 종종 볼 수 있는 돌 쌓기는 기원, 안녕, 안전, 축복 등을 비는 문화적 의미로 이어지는 맥락이 있다. 그래서인지 미술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오브제이기도 하다.
홍익대에서 조소를 공부한 김윤신은 1964년 파리로 유학을 떠났다. 조각을 배우러 갔지만 여의치 않아 석판화로 진로를 변경 유학생활 내내 판화 작업에 몰두했다. 하지만 귀국해서 보니 당시 우리나라 환경에서는 석판화를 계속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못했다. 그렇다고 조각을 하기도 어려운 상황 그녀가 찾아낸 돌파구는 롤러, 고무지우개, 줄자, 나무토막, 스펀지등을 이용한 평면 작업이었다. 그녀는 우리나라 1세대 여성 조각가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으니 여성 조각가의 불모지에서 온전히 스스로의 힘으로 밀고 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절대 포기하는 법 없이 새로운 길을 모색했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던 1980년대 김윤신은 조카가 있는 아르헨티나에 방문했다가 그만 그곳의 자연과 나무에 반해 버렸다. 그 길로 아르헨티나에 정착을 결심한 그녀는 우편으로 대학에 사표를 내고 작업을 시작했다.
아르헨티나의 다양한 나무 중에서도 김윤신이 가장 좋아한 나무는 알가로브였다. 위의 작품은 단단하고 묵직하며 색깔도 좋고 만질수록 윤택이 난다는 알가로브 나무다. 우리나라에서 접해보지 못한 전기톱을 만난 김윤신은 작업에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동양에서 온 여자가 전기톱을 들고 나무 작업을 하는 모습은 아르헨티나 사람들에게 이색적으로 보였을 것이다. 김윤신은 그들의 호의 어린 시선에 힘입어 다양한 작업을 시도할 수 있었다.
1990년대에 들어서며 김윤신은 T 자형 도상에 심취했다. 양팔을 벌린듯한 T자는 하늘을 향한 작가의 신심을 표현하기도 한다.
이번 전시의 제목이기도 한 '합이합일 분이분일'은 재료와 작가가 하나가 되는 과정을 거쳐 작품이라는 또 다른 존재가 탄생한다는 작가의 시적 표현이라고 한다. 남미 태양빛을 먹고 자란 굵고 탄탄한 나무를 전기톱으로 가르는 김윤신의 모습을 보면 재료와 작가가 하나가 된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알 것만 같다. 현대 미술은 작품의 완성도 못지않게 그 작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작가가 어떤 의미를 포함시켰는가가 더 중요하다. 그것이 마르셀 뒤샹이 샘을 통해 열어 놓은 개념미술의 세계다. 그런 의미에서 김윤신이 만든 세계인 '합이합일 분이분일'은 독자들이 그녀의 삶과 작품을 이해하는 중요한 제목이다.
김윤신은 조각작품만큼이나 많은 회화 작품을 제작했다. 이 작품의 거친 붓자국은 마치 나무껍질이나 다듬지 않은 나무 표면을 연상시킨다. 그녀에게 회화는 조각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림을 보고 있으면 넘치는 에너지에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90이 넘은 나이까지 활발하게 작업하고 있는 이 작가의 에너지가 꿈틀거리며 캔버스 밖으로 튀어 나갈 듯 용솟음친다. 만든 사람도 있는데 관람하기도 기운이 달리는 나 같은 사람은 그저 부러울 따름이다.
무제 같은 작품은 그저 에너지로만 느낄 수 있지만 '내 영혼의 노래'는 관람의 기쁨을 주는 그림이다. 삼면화로 벽을 꽉 채운 대형 캔버스 중앙에 자리 잡은 나무와 그 나무에 경쾌하게 흐르는 파동은 환희의 송가처럼 들린다. 작가의 영혼은 이 노래를 그림으로 그리며 무척이나 행복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하늘은 푸르고 나무는 곧게 자랐으며 갖가지 아름다운 색깔의 잎들이 가득한 날이다. 내 사진이 이 아름다운 색감을 다 담지 못해서 아쉬울 따름이다.
김윤신은 나무 작업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1989년과 2001년 멕시코와 브라질 오지의 채석장에서 돌조각에 몰두했다. 나무를 전기톱으로 자르는 작업만 해도 혀를 내두를만한데 오닉스나 석영 같은 돌조각을 90점 가까이 제작했다는 설명에 말을 잃었다. 예술도 결국 체력이구나 싶다. 비석이나 석물을 만드는 작업장에서 얼마나 많은 분진이 나오는지 알고 있는 나는 돌 작업을 하는 김윤신의 고된 모습이 눈에 보이는 것만 같다.
나무를 조각하고 판화를 제작하고 그림을 그리고 콜라주를 하고 이제 돌까지 깎은 그녀는 어디까지 가고 있는 것일까.
코로나 시기 나무를 구할 수 없던 김윤신은 자투리 나무에 채색을 하며 작품 활동을 했다. 그녀는 언제나 난관에 부딪쳤고 그 난관을 보기 좋게 헤쳐 나가며 새로운 작업으로 넘어갔다. 채색은 다양한 원주민들의 전통 문양으로 발전하기도 하며 또 다른 세계로 나아간다.
나무를 깎고 한옥의 제작 방식처럼 끼워 맞춘 작업을 한 '안데스 산맥'과 '노래하는 나무'다. 이 두 작품은 지식이 미천해 설명하기 어려움에도 몹시 마음이 끌렸다. 안데스 산맥은 자연의 모습을 그린 것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넓게 팔을 펼치고 나를 안아주는 어떤 존재처럼 느껴졌다.
브라질 리우데자이네루의 예수상 같기도 한 이 작품은 그 넓은 품으로 나를 위로해 주는 듯하다.
아직 삐약삐약 병아리 수준의 관람자이기는 하지만 조금씩 마음이 열리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미술이 내 삶에 성큼성큼 들어와 방 하나를 차지하기 시작했다.
희원은 사시사철 언제나 아름답다. 수원 화성을 지나치게 미학적으로 완성하려는 정조에게 신하가 뭐 하러 그렇게 아름답게 짓느냐고 물었다. 정조는 아름다운 것이 적을 물리친다고 대답했다. 아름다운 것은 적을 물리치고 진상도 물리칠 것 같다. 이 아름다운 곳에서는 함부로 진상짓을 하는 사람이 없을 것만 같다. 누가 감히 이런 곳에 쓰레기를 버리고 지저분한 짓을 할 수 있을까.
이우환의 관계항 만남, 튕김
루이부르주아 거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