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금홍란

검은 나비

by 은예진

“보아하니 그런 일 할만한 분은 아닌 듯싶지만 당장 급하게 되었으니 조바라도 해 보시겠소?”


여관 주인 여자의 한 마디에 본이는 허리를 깊숙하게 숙여 인사했다. 숙식을 제공받으며 밤새 여관 일을 시월이와 둘이 보았다. 그 일만 아니었으면 여관에서 조금 더 지체하며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생각했을 것이다.


밤 열두 시쯤 이부자리가 더럽다며 바꿔 달라는 손님의 부름에 들어갔던 시월이가 옷고름이 찢긴 채 저고리를 제대로 여미지도 못하고 뛰어나왔다. 시월이가 울고불고 난리를 치는 통에 이 방 저 방에서 손님들이 나와 보았다.


정작 시월이를 겁탈하려 했던 자는 재수 없는 년이 소동을 피운다고 화를 내었다. 그때 본이는 여기서 더는 이런 꼴로 지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다음 날 무조건 인력거를 잡아타고 경성에서 제일 유명한 기생이 누구냐고 물어보았다. 목적지도 알려주지 않고 기생에 관한 질문을 하는 손님에 당황한 인력거꾼은 한참을 고민하는 눈치였다.


경험 많은 인력거꾼이면 적당히 알고 있는 누군가를 대주고 말았겠지만 그는 이제 겨우 인력거를 끌기 시작한 지 몇 달 되지 않은 고학생이었다. 젊은 여자가 어떤 연유로 유명한 기생을 찾는지 모르지만 함부로 대답하면 안 될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글쎄요, 저도 제일 유명하다고 장담은 못 드리지만 대정 권번의 금홍란 씨가 인기가 좋아서 인력거꾼들 사이에 가장 많이 인력거를 타는 기생으로 알려졌습니다만.”


“금홍란 씨 집을 알고 있겠지요?”


“네, 금홍란 씨는 여느 기생들과 마찬가지로 다방골에 삽니다요.”


“그럼 그리로 가 주세요.”


젊은 인력거꾼은 여러 말하지 않고 금홍란의 집 앞에 본이를 데려다주었다. 홍란의 집은 그다지 크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초라하다 말할 만한 수준은 아닌 기와집이었다. 본이는 문 앞에서 서서 숨 고르기를 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빈털터리로 경성 바닥에 내동댕이 쳐진 본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생각 끝에 내린 결정이었다. 본이는 누구보다 이야기를 잘했다. 이야기가 재주가 되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는가.


셰에라자드는 천 일 동안의 이야기로 자신의 목숨을 구했는데 본이라고 이야기로 지금의 처지를 벗어나지 못할 것도 없어 보였다. 그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장소가 어디일까 신문을 앞에 놓고 뒤적이며 찾아보니 답은 요릿집이었다.


명월관이나 국일관, 태화관 같은 요릿집엘 뚫고 들어간다면 본이의 이야기 재주를 써먹을 방도가 있을 것 같았다. 혼자 몸이었다면 요릿집엘 나가기 위해 기생집까지 찾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본이 하나 믿고 경성까지 따라온 시월이를 여관의 거친 사내들에게 희생시키게 될까 봐 두려웠다.


“계신가요? 누구 없나요?”

“뉘시오?”

문이 열리고 행랑어멈이 고개를 내밀었다. 문이 열리자 희미하게 수심가 한가락이 들렸다.


일낙서산(日落西山)에 해 떨어지고

월출서산(月出東嶺)에 저 달이 돋누나

생각 사(思) 사록 세월 가는 것 덩달아 나 어이 할까요


을씨년스러운 겨울 풍경 속에 들리는 수심가는 경성의 화려한 밤을 수놓는 꽃들이 낮에 어떤 모습인지 짐작하게 하는 소리였다.


“무슨 일로 오셨소?”


“금홍란이란 분을 찾아왔습니다.”


행랑어멈은 여전히 문을 열어젖힐 생각을 하지 않고 묻기만 한다.


“우리 홍란 아씨를 왜 찾아오셨는데요?”

“긴히 만나 뵙고 상의할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무슨 일인지 모르나 약속 없이 찾아오는 손님을 만날 만큼 한가한 분 아니니 그만 돌아가 보시오.”


본이는 재빨리 일 원짜리 하나를 꺼내 문틈으로 밀어 넣으며 내가 홍란 아씨 만나서 해 끼칠 사람 아니니 부탁이라고 사정했다. 돈을 본 행랑어멈은 문을 슬쩍 열어젖혔다. 말로는 우리 아씨는 지금 쉬는 중이라 안 된다니까요, 하면서 눈짓으로 어서 뛰어 들어오라고 알려 주었다.


행랑어멈은 홍란의 방 앞에서 잠들었던 사람도 일어나지 않고는 배길 수 없을 만큼 큰 목소리로 글쎄 우리 아씨가 지금 쉬는 중이라니까, 하는 말을 반복했다. 결국 홍란이 문을 열고 무슨 일이냐고 물을 수밖에 없었다.


화장기 없는 푸석한 얼굴에 속옷 차림이었지만 한눈에 봐도 기생의 태가 났다. 달걀형의 얼굴에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은 반달눈과 도톰한 입술은 꾸미지 않아도 평범하게 살기에는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는 느낌이 묻어났다.


“경성 제일의 기생인 금홍란이라는 분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홍란이 본이를 위아래로 훑어본다. 반듯한 가르마와 호기심 많게 생긴 동그란 눈, 야무진 입술, 가느다란 목과 앞으로 모으고 있는 손, 그리고 치마 밑으로 살짝 드러난 신발코까지 빠트리지 않고 살펴본다.


“들어오시게.”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행랑어멈이 손짓한다. 맘 변하기 전에 어서 들어가라며 등을 떠밀었다. 방은 경성 제일의 기생이라는 말에 어울리게 화려한 옷들이 약간은 어수선하게 걸려 있었다. 이부자리를 제외하고는 여기저기 잡다한 장신구와 화장품들이 널려 있었다.


“저 여편네한테 얼마나 주었기에 저리 열심히 나를 깨우나?”

“일 원 주었습니다.”


“제법이구먼, 행랑어멈을 돈으로 다룰 줄 알면 다른 것도 제법이겠어. 기생이 하고 싶어서 나를 찾아온 모양이오.”


“네, 그렇습니다.”

“나이가 몇 살이오?”

“다음 달이면 스물한 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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